[Vol.62] 🌻 음악을 듣는 데도 복날이 있다면

여름의 중턱에 레터를 쓰고 있는 숑🌻입니다. 요즘 날씨는 정말로 여름답네요. 타협의 여지 없이 이건 여름 날씨입니다. 저에게 여름은 달력의 군데군데 적힌 24절기를 그 어떤 시기보다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 계절이기도 해요. 이번 주와 다음 주는 대서와 입추 사이죠. 그 언저리로 초복, 중복, 말복이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자리잡고 있고요. 더위에 끙끙 앓다 그 단어들을 보면 괜히 더 덥게 느껴지곤 합니다. 뭐, 대서(大暑)? 그래 어쩐지 거대하게 덥더라.

구독자님은 혹시 복날을 챙기시나요? 복날마다 삼계탕 가게가 미어터진다는 뉴스 기사를 멀거니 구경한 적은 많지만 저는 딱히 복날을 명분으로 뭔갈 챙겨 먹지는 않는 편이에요. 다만 올해는 여느 때와 같이 달력을 들여다보다 '복날 음식처럼 여름에 꼭 챙겨야 할 음악이 있다면 뭘까' 생각하게 됐어요. 이열치열 절절 끓는 발라드가 될 수도, 상쾌한 등목 같은 음악이 될 수도, 디저트처럼 청량한 음악일 수도 있겠네요.

오늘 골라본 세 곡은, 굳이 음식으로 빗대자면 여름에 먹는 쌀밥 같은 노래들입니다. 듣자마자 오장육부가 개운해지거나 관자놀이에 흐르던 땀을 더 뜨겁게 해주지는 않아요. 하지만 가만히 저작근을 움직이며 '그렇지, 지금은 여름이지'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져요. 원망스럽게 내리쬐는 땡볕을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됩니다. 입맛이 뚝뚝 떨어지는 날씨지만 힘내서 밥을 먹어야 튼튼하게 이 계절을 날 수 있잖아요? 씹을수록 뭉근하게 단맛이 배어나는 밥 한 숟갈 같은 노래와 함께 이 계절의 맛을 음미하는 오후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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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lly Joel - Summer, Highland Falls

1976년에 발매된 빌리 조엘(Billy Joel)의 정규 4집 수록곡이다. 제목부터 퍽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뜻일까 궁금해 검색해보니 'Highland Falls'는 뉴욕에 위치한 지명이며 빌리 조엘이 실제로 그곳에 머물며 곡 작업을 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여름의 풍경이 무척 근사하고 서정적인 동네일 것 같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한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곳에서의 시간을 기억하려는 듯 계절과 지명까지 제목에 탕탕 붙여서!

3분 20초에 불과한 이 노래 한 곡을 들으며 나는 세 번 탄복했다. 청량한 피아노 소리가 적당한 조급함으로 달려오는 듯한 도입부, 1분쯤 무더운 여름날의 굵은 땀방울을 식혀주듯 한층 산뜻한 피아노 선율, 1분 53초쯤 우아하게 귀를 사로잡는 목관악기까지. (클라리넷일까? 정체를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세요)

어쩌면 노래 제목 덕분에 가보지 않은 이국의 여름을 상상하며 듣게 되어 더욱 몰입하게 된 것 같다. 마치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들을 때마다 지내본 적 없는 열도의 기찻길이 있는 마을을 그리워 하게 되는 일과 비슷하다. 이렇게 어떤 작품을 통해 기억을 왜곡하고 가공할 때마다 예술가의 역할에 하릴없이 감탄하게 된다. 한 명의 대중으로서 그들이 빚어내는 로망에 휘말리고 마는 순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 까데호 - 여름방학

가끔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일부러 찾아 듣는다. 목소리와 연주는 음악의 영역을 공평하게 갈라 쓸 수밖에 없는데, 두루 집중하며 듣기에 내 집중력이 한정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최근 가장 자주 찾아 들은 '가사 없는 음악'을 소개하자면 2018년 데뷔한 우리나라 밴드 까데호(CADEJO)의 첫 번째 정규앨범 수록곡 <여름방학>이다. 까데호를 알게 된 지 얼마 안됐지만, 찾아보니 인디씬 곳곳에서 다양한 협업으로 멤버들의 실력이 고루 알려져 있었다. 각각 재즈밴드, 소울, 레게밴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드러머로 구성되어 색깔 있는 연주를 선보인다.

<여름방학>은 그야말로 여름방학 그 자체다. 선풍기를 적당한 세기로 틀어놓고 요추 건강에 좋지 않지만 몸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 발을 까딱거리는 순간과 어울린다. 아무 계획 없는 주말에 시간을 내 소관대로 펑펑 써제끼며 태평하게 휴일을 낭비하는 그때 공간을 채우면 가장 어울릴 노래다.

지난 주말에 들렀던 종로의 어느 북카페는 테이블마다 신청곡을 받는 곳이었다. 은근한 가랑비가 아스팔트를 적시는 날씨이기도 했다. 고민 끝에 까데호의 <여름방학>을 적어 넣었다. 돌담길을 배경으로 아늑한 카페를 꽉 채우는 기타와 베이스 연주가 듣기 좋았다. 아무리 편안한 공간일지언정 내 집처럼 편하게 느껴지기는 어려운데, 이 노래를 듣던 순간만큼은 그 카페가 내 공간만큼 평화롭다고 느꼈다. 4분 즈음부터 아스라히 매미 소리가 들리는 부분이 특히 매력적이다. 꼼짝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사람들, 여름에 진심 맞네.

🌻 여행스케치 - 별이 진다네

매미 소리만큼이나 여름을 수놓는 BGM을 꼽자면 어떤 게 있을까? 나는 대학교 때 농촌봉사활동(이른바 농활)을 갔다가 초여름 밤에 들은 풀벌레와 개구리 소리, 이따금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89년 데뷔한 여행스케치의 대표곡 <별이 진다네>는 도입부에서부터 꽤 노골적인 자연과 여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농활 때 올려다봤던, 우유를 뿌려놓은 듯 별빛이 총총한 밤하늘과 논밭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찌는 듯 습한 여름이면 대개 시원시원한 음악으로 비워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많다. 나도 대부분의 시간은 별다른 고민 없이 귓바퀴를 씻어 내릴 만한 장쾌한 사운드의 곡을 골라 하루를 채우곤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여름이란 계절 역시 여느 때와 같이 다채로운 색깔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언뜻 똑같이 더워 보여도 어떤 낮은 숨 막힐 듯 찌는 더위, 어떤 저녁은 비교적 서늘한 바람, 어떤 밤은 그 중간쯤의 온건한 공기...

이 노래는 이따금 찾아오는 아름다운 여름밤에 맞춘 듯 어울린다. '나의 가슴 속에 젖어오는 그대 그리움만이~' 같은 노랫말을 되뇌자면 순식간에 1980년대의 진득한 감정으로 되돌아가는 것만 같다. 이렇듯 시적인 노랫말을 쓸 만큼 연모하는 이를 그리던 감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짙어만 가는 어둠 속 별빛 같은 이를 그리던 마음이란! 어쩌면 치열한 한낮의 더위가 물러가고 난 밤이기에 꺼내놓을 수 있는 온도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소개한 세 곡은 공교롭게도 모두 가까운 주변 친구들로부터 추천 받아 듣게 됐다. 사실 은은한 인생 노잼 시기를 겪으며 음악을 찾아 듣는 일에도 무력한 나날이었는데, 이 노래들 덕에 복날의 삼계탕만큼이나 기운을 차리고 매일의 일력을 찢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내가 받은 힘보다 더 큰 행운이 돌아가길. 여름날의 소중한 시간을 들여 이번 레터를 읽어준 구독자님에게도 근사한 에너지가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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