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3] 🥦 여운이 파도처럼 덮치기도, 잉크처럼 번지기도 하는 노래

반갑습니다, 콜리🥦입니다. 벼락 같이 비가 쏟아지다가 언제 그랬냐는듯 햇빛이 내리쬐는 무더위를 나고 있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니 밖에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등을 흥건하게 적시게 되는 더위인데요. 캐리어 박사님 감사합니다. 구독자 님은 여름날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지열을 뿜어대는 아스팔트를 피해 산이나 바다로 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고 저 멀리로 떠난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영화관도 좋은 피서 장소가 될 거예요. 괜찮은 자리 예매만 성공한다면 자리 걱정할 일 없지, 시원하고 화장실도 쾌적하지. 대체로 산과 바다보다야 집에서 가까울 테니 다녀오기 편하기도 하고요. 영화계에서도 이 계절을 십분 활용하는 것인지 요즘 쟁쟁한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하고 있습니다. <탑건: 매버릭>이 흥행의 주인공이 되었고 <한산>이 그 뒤를 따르고 있네요. <헌트>도 기대가 되고요.

올해 들어 본 영화 중 저는 <헤어질 결심>이 제일 좋았습니다. 장면 장면,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매혹되었다고 할까요. 처음으로 '다시 볼 결심'을 하고 영화관을 두 번 찾아가게 할 정도였어요. 지금은 본 지가 꽤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따금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곱씹고 있습니다. 이번 PRIIISM은 <헤어질 결심>이 남긴 여운에 착안해서 꾸려봤습니다.

노래 들으러 가기에 앞서 영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힙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셨고 곧 보러 가실 분이 비록 적더라도 계실 테니까요. 영화를 무척 즐긴 입장에서 <헤어질 결심>을 한 분이라도 더 보러가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화를 안 보신 분도 이 편지에 담긴 음악과 글을 즐기시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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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Lennon - Oh My Love

<헤어질 결심>을 보고 존 레논(John Lennon)이 생각났다. 존 레논과 신시아 레논(Cynthia Lennon), 존 레논과 오노 요코(Ono Yoko)의 관계라고 해야 정확하겠다. 해준(박해일 분)과 정안(이정현 분), 해준과 서래(탕웨이 분)로 대입해보면 묘하게 그 관계들이 닮았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 해준과 서래의 관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존 레논이 선보인 음악 때문이기도 하다.

존 레논은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고 한다. 첫 번째 배우자였던 신시아 레논과 만난 것도 리버풀 미술대학 시절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시아 레논은 존 레논이 꿈꾸던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전위 예술가로 활동하던 오노 요코에게 반한 존 레논은 그녀를 일생의 사랑으로 여기며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 음악은 물론 사상, 행동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말이다.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존 레논이 쓴 곡이야 많다. 그중 <Oh My Love>를 고른 까닭은 이 곡이 <헤어질 결심>의 인상과 닮았기 때문이다. 일단, 두 작품 모두 참 묘하다. 영화는 안 보신 분도 있을 테니 <Oh My Love>로 이야기하자면, 이 곡은 제목이나 가사만 보면 세상 달콤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차분하다 못해 어딘가 어두운 느낌마저 든다. 소리가 또렷하지 않다. 마치 음악에 안개가 낀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Oh My Love>은 그 여운이 서서히 밀려온다,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 에피톤 프로젝트 - 환상곡

에피톤 프로젝트가 이런 곡을? <환상곡>을 처음 듣고 사뭇 놀랐다. 그전까지 에피톤 프로젝트 하면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이화동>, <새벽녘> 같이 예민하고 여린 감수성이 그득한 발라드를 자동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환상곡>은 여리다기보단 농익은 쪽에 가깝게 들렸다. 셔플 리듬과 음악을 밀고 당기는 박자 변화도 인상적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에피톤 프로젝트에 갖던 일종의 선입견이 보기 좋게 깨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박찬욱 감독 작품을 하나도 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보여지는 모습, 그가 만든 영화들에 대한 평 같은 걸 접하며 은연 중에 나는 박찬욱 감독 작품을 이럴 것이라 짐작했다, 세상 진지하고 고상함. 위트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음. 그러나 <헤어질 결심>을 보고 대번에 인정했다. 진지하고 고상한 것은 얼추 맞는 듯하지만 위트에서 완전히 잘못 짚었다! 영화를 보다 피식거리길 수차례, 박찬욱 감독 이 분 위트 가이셨네.

물론 <헤어질 결심>을 보고 <환상곡>을 떠올린 가장 큰 이유는 가사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많이 공감하실 것이다. 어느 한 소절만 따오기 아까울 정도로 <환상곡> 가사가 <헤어질 결심>과 꼭 포개진다. 그럼에도 하나 집으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이다. <헤어질 결심>이 남긴 여운을 몇 번이고 되뇌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해준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될까?

🥦 Radiohead - Fake Plastic Tree

무언가 터질 듯 터지지 않으며 서사를 쌓아올린다. 몇 번을 그렇게 간지럽히고는 폭발한다, 마침내. <헤어질 결심> 이야기만이 아니다. 라디오헤드(Radiohead)의 <Fake Plastic Tree>도 그렇다. 1995년 발매된 라디오헤드 2집 [The Bends]에 수록된 이 노래는 라디오헤드 음악 중 가장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곡 중 하나다. 대중적으로도 비교적 잘 알려지고 사랑 받아서 라디오헤드의 가장 최근 투어였던 2018년까지도 라이브로 연주되었다.

2010년대 즈음부터는 음악으로 보나 외관으로 보나 거의 산신령 내지는 도인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보컬 톰 요크(Thom Yorke)가 소싯적엔 나름대로 고운 겉모습과 음색을 자랑했다. <Fake Plastic Tree>은 그 시절 톰 요크의 매력이 극대화된 곡이기도 하다. 특히 고운 진성에서 미끈하게 가성으로 전환되는 순간의 매력이 인상적이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 내뿜는 멜랑콜리는 또 어떠한가.

변태적이라는 감상이 들 만큼 <헤어질 결심>도 너무도 곱다. 벽지, 의상부터 바닷가, 절 같은 장소의 구도나 색감 따위 소위 미장센이 대단히 유려하다. 두 주인공인 서래와 해준도 어쩜 그리 곱상할까. 외모 뿐만 아니라 대사 한마디 한마디까지 말이다. <헤어질 결심>을 생각하며 듣다 보면 <Fake Plastic Tree>의 마지막 소절이 영화 대사마냥 더욱 아릿하게 들린다. "If i could be who you wanted(내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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