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1] 🍄 MBTI '극F'가 추천하는 풍성한 감정의 음악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기쁘고 풍족한 하루 보내고 계시나요? 구독자님께서는 이성과 감정 중에서 어떤 단어가 자신과 더 어울린다고 느끼시나요? 저는 스스로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꽤나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과학인 MBTI로 근거를 대보면 저는 판단의 근거로서 thinking과 feeling의 비율 중 80% 이상의 점유로 feeling이 나타나곤 합니다. 

안타깝게도 제 감정은 대부분 슬픔과 상실에서 기인합니다. 물론 기쁨과 풍족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긍정적인 감정도 있지만, 어쩐지 더욱 강력한 에너지가 발화되는 순간은 거의 부정적인 상황이나 그러한 기분이 처해 있을 때 인 것 같습니다. 기쁨이 모이면 더해지는데, 슬픔이 모이면 제곱이 되더라고요. 때로는 이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행히 다른 사람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나름 가면을 잘 쓰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과거의 저는 감정에 지배 당할 때마다 스스로를 굉장히 어둡고 연약한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는 너무나 이성적(logos)인 종교거든요. 순간의 감정(pathos)과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아닌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냉철한 이성'이 중요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감정을 '사람의 마음을 연약하게 하는 악한 마음'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감정적인 나를 온전히 '나 답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어렵고, 깊은 동굴을 파고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긍정하고 있고 무수히 많은 관계와 상황 속에 표준화되어 만들어진 '이성적인 나'보다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감정적인 나'일 때 더 자연스럽거든요. 나아가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동기부여가 되고 동력이 되어 무언가를 실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오늘은 서론이 길었네요. 이렇게 말이 많아진 것은 사실 이 글을 쓰는 요즘 제가 너무 감정적인 상태라 그렇습니다. 소개 해드릴 음악도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평소보다 더욱 차분한 음악들을 듣고 있거든요. 혹여 기분 좋은 날을 보내고 계신 구독자님의 마음을 괜히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짐스러운데요. 부디 쓰다면 바로 뱉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신 순간에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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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Ólafur Arnalds - Not Alone

음악에 압도 당한 경험은 보통 즐겁고 신나는 음악보다는 마음과 행동을 잠식해버리는 음악을 들었을 때다. 별다른 감상평 없이 그저 음악을 듣는 것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되는데, 올라퍼 아르날즈(Ólafur Arnalds)의 음악이 그러하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슬란드 출신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올라퍼 아르날즈는 아이슬란드 특유의 미니멀하면서도 동시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해내는 뮤지션으로 평가 받고 있다. 유년시절 할머니에 의해 쇼팽(Chopin)의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클래식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들이 많은 것은 그런 까닭인 것 같다. 2-3년 전 쯤이었나, 요즘처럼 비 오는 여름날 서촌의 서점 이라선↗을 방문했다가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을 처음 접했다. 장대비로 번잡하고 혼란했던 내 마음이 순식간에 그의 선율 덕분에 차분해졌다.

그를 다시 만난건 우연한 기회로 보게 된 드라마 <브로드처치(Broadchurch)>↗에서다. 몇년 전 추천을 받아 보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몰입해버린 나머지 밤새 시즌1 전체를 다 보았다. 올라퍼 아르날즈는 드라마가 종영하는 마지막 시즌3까지 모든 음악을 맡았다. 드라마의 각본을 집필한 크리스 칩널(Chris Chibnall)이 브로드처치를 쓸 때부터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썼다고 하니 음악과 드라마의 조화는 말할 것도 없을테다. 드라마의 인기만큼이나 사운드트랙도 좋은 평가를 받아 올라퍼 아르날즈에게도 단순 참여가 아닌 하나의 좋은 작품을 남긴 좋은 결과가 되었다.

물론 그의 음악이 마냥 슬프고 우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클래식에서부터 일렉트로닉까지 다양한 장르와 악기를 넘나 들며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데 계속 듣고 있다보면 일종의 현대미술 전시회를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니멀한 음악을 발견하고 싶다면, 꼭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길 권한다.

🍄 Thom Yorke - Suspirium

<Suspirium>은 톰 요크가 프로듀싱을 맡아 발매한 사운드트랙 앨범 [Suspiria(2018)]에 수록된 타이틀곡이다. 동명의 영화 <서스페리아>↗는 2018년에 개봉하였으며, 1977년의 같은 이름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영화는 보지 않았다. 공포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데다가 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영화가 선사할 공포를 다 체험한 듯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마치 신선,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듯 느껴지는 톰 요크(Thom Yorke)가 새로운 음악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자극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애플 뮤직에서 이제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알람이 뜨자마자 일 하는 도중 비상구 계단으로 뛰쳐나가 잠시 음악을 감상했을 정도였다. 미니멀리즘의 극치라고 느껴질만큼 간결한 그의 목소리는 비상구 계단보다 더 차가워 섬짓하면서도 영적이었고, 사운드는 겨울 칼바람 같이 아리면서도 겨울 햇살을 머금고 뿜어내는 눈처럼 아름답게 눈부셨다. 

국내 흥행은 실패했으나(사실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아주 흥행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코다 존슨(Dakota Johnson),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클로이 모레츠(Chloe Moretz), 미아 고스(Mia Goth)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다. 감독은 무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유명한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다. 무용단 안에서 펼쳐지는 기괴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주된 내용인데, 꽤나 상징적인 요소도 많이 담겨있다고 한다. 물론, 공포영화가 무섭다면 톰 요크의 이 음악만 들어도 된다.

톰 요크는 Variety와의 인터뷰↗를 통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으로부터 영화가 단순한 공포가 아닌 '비애감(Melancholy)'이 담겼다고 들었고, 톰 요크 역시 대본을 읽고서는 그 비애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걸 이렇게나 아름답게 표현하다니! 역시 톰 요크는 미쳤다.

🍄 FKA Twigs - Home With You

FKA Twigs 역시 독특하면서도 독보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구현하는 뮤지션이다. 올라퍼 아르날즈와 톰 요크에게서 느낄 수 있는 현대예술의 감각이 미니멀리즘에 가까웠다면, FKA Twigs는 아방가르드하고 보다 전위적인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그녀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대부분 마치 행위 예술처럼 보이는데, 만약 그녀가 영화 <서스페리아>에 나오는 무용단에 들어갔다면 분명 메인 댄서가 되었을 거다(...).

댄서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아방가르드 팝, 일렉트로닉, 아트팝, R&B, 힙합 등 다양한 장르를 구사하는 다능인(multipotentialite)으로서 재능도 가졌다. 그러한 재능에 화룡점정을 찍어주는 것이 그녀의 신비로운 음색이다. 목소리를 들으면서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그녀가 카일리 미노그의 백업 댄서로 활동한 경력도 있었다(소름)! 

FKA Twigs가 2019년 발매한 2번째 앨범 [Magdalene]는 비평가들의 높은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성경 속 마리아 막달레나에서 영감을 받아 앨범을 작업했다고 한다. 사랑과 여성이라는 주제를 상실과 비탄, 그리고 회복의 과정으로 전개해나갔고 이를 때로는 감정적으로, 성적으로, 신성하게 표현했다. 특히, 수록곡 중 <Home With You>는 애달픈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반되는 사운드의 결합과 극적인 변화가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그녀 역시 가장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when I have been at my most ungraceful, confused and fractured)에서 이 앨범을 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고 위안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감정이 예술을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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