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25] 🥦 이런 가사는 너무 좋잖아

반갑습니다, 콜리🥦입니다. 이번 편지를 시작하는 오늘은 시월 사일입니다. 네, 엿새 간의 추석 연휴를 뒤로 하고 출근한 첫날이죠. 시월이 되었다는 것은 3분기가 끝났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즉 분기마다 돌아오는 일을 해야한다는 뜻이죠. 업무 시간 두 시간쯤 되니 눈이 뻑뻑해져서 인공눈물을 사용했습니다. 쉬는 동안엔 인공눈물을 한 번도 쓰지 않았는데 왜 사무실에선 불과 몇 시간만에 눈이 피로해지는 걸까요.

여러분은 지금 일상으로 돌아온 첫날의 저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한 달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니 월간 주요 일정을 정리해두는 게 좋겠어요. 회의, 출장 일정 따위를 적어두려고 달력을 집어 들어봅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수, 목, 금 사흘만 버티면 주말이고, 이어지는 월요일이 한글날이네요. 휴일을 마치고 돌아온 이에게 휴일 예고만한 위안이 또 있을까요. 시월 구일 잊지 않겠습니다. 아아 한글날 만세, 세종대왕 만세!

구독자 님이 이 글을 열어보신 시점은 한글날 연휴도 지났을 텐데, 어떻게, 짧은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놀리려는 게 아니에요. 그땐 저도 한글날 연휴를 보냈을 시점인걸요. 한글날이구나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저 휴일 하루로 보내버리셨다고요? 그래서 이번 편지는 우리말로 써진, 노랫말이 좋은 곡으로 준비했습니다. 세 곡과 함께 늦게나마 그리고 잠시나마 한글의 의미를 생각해보시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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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하와 얼굴들 - 가나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익살스러운 음악만 하는 줄 알았다면 <가나다>는 기분 좋은 반전을 선사할 것이다. 잘 들어보면 가사가 'N행시'로 진행된다. 운이 '가나다'순, 한글 기본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로만 지어진 가사를 만나기도 어려운 오늘날에 이처럼 한글날에 잘 어울리는 곡이 있을까. 세종대왕께서 치하하실 노랫말이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나다> 가사는 9행시다. '가'부터 '사'까지 일곱 개 자음은 다른 밴드 멤버들이 운을 띄우면 보컬 장기하가 행시를 완성짓는다. 그러나 이렇게 열네 개 자음을 모두 다루면 말을 짓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곡이 길어져서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여덟 번째 자음 '아'부터 '타'까지는 코러스로만 처리하되 마지막 '파'에서 다시 행시로 돌아와서 '하'를 끝으로 1절이 끝난다. 이렇게 짓기도 어려웠을 텐데 2절도 있다.

가사 내용은 헤어진 연인에게 띄우는 말이다. 화자는 차인 쪽일까 찬 쪽일까. "다른 사람에게 벌써 마음을 주지 마요", "하하 웃지 말아요"라는 걸 보면 아무래도 차인 쪽 같긴 한데 찬 쪽에서 하는 말로 들어봐도 말은 되는지라 영 애매하다. 어쨌든 "다 잊었다 제발 생각 말아요", "하염 없이 울어요"라는 구절에선 얼핏 애틋하기까지 하다. 맨 마지막 "줘요"까지 듣고 다시 한번 실감했다. 역시 장기하 음악은 재미 있다.

🥦 이문세 - 무대

장면 하나, 오래 전 취업준비생 시절 이야기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데 문득 내가 보잘것없는 배우가 된 것 같았다. 자신만만한 양 표정을 짓고 말을 해야 했다, 사실 나는 몹시 불안한데. 장면 둘, 밥벌이를 시작한 뒤 이야기다. 어떤 일로 자료를 수차례 주고 받고 대면해서 협의까지 마쳤는데, 얘기했던 것과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회사에 민감한 일이었다. 화가 나서 전화를 걸었지만 막상 성을 낼 수는 없었다. 나와 상대방의 관계를 고려하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무력했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사업을 하든 직장에 다니든, 가족이 있든 없든, 도시든 시골이든, 어디 무인도에서 혼자 살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사회생활이란 걸 하게 된다. 사전에 따르면 사회생활이란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집단으로 모여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 생활"이다. 질서를 깨는 행위를 한 사람은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그 정도에 따라 법적 처벌을 받게 될 수 있다. 질서를 깨지 않고자 우리는 일상에서 일정 부분 연기해야 할 때를 마주한다.

<무대>의 노랫말은 무대에 올라야 하는 이의 숙명을 그린다. 또한 사회생활 하는 누구나 공감 가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1980년 대학가요제 은상에 빛나는 샤프의 <연극이 끝난 후>가 생각나기도 한다. <연극이 끝난 후>는 낭만을 잃지 않은 사회초년생이라면 <무대>는 고독하고 노련한 사회인 느낌이다. 닳고 지쳐 엷어진 마음을 보듬는다. 어느새 스산한 가을 날씨가 완연해졌다. 이문세의 포근한 음성은 찬바람 불 때가 제격이다.

🥦 한영애 - 건널 수 없는 강

좋은 가사를 가리켜 흔히 시에 비유한다. 노랫말이 시처럼 아름다운 곡이야 너무나 많다. 시의 특징은 무엇인가. 시는 세부 장르로 나뉘고 특징도 그만큼 다양하겠지만 뭐가 됐든 함축과 운율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함축과 운율, 한영애가 부른 <건널 수 없는 강>은 시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가사가 정말 시구처럼 간결하고 은유적이되 어렵지 않다. 가만 듣고 있으면 가사가 어느새 드라마의 한 장면이 된다. 한영애의 우렁찬 목소리는 단지 노래를 넘어 어떤 외침 같다.

<건널 수 없는 강>은 원래 우리나라 포크(Folk), 블루스(Blues) 거장 이정선의 곡이다. 이정선은 기타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1993년 처음 낸 『이정선 기타교실』 시리즈는 올해도 개정판이 나왔을 정도로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에게 교본이 되고 있다. 과연 이 곡에서 가사 못잖게 주목해야 하는 것이 기타 연주다. 한영애의 음색과 결을 맞춘 듯한 기타 연주가 터져 나온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데이빗 길모어(David Gilmour)가 생각나는데 이정선은 어떤 기타를 사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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