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74] 🌻 정동진 바다에서 평일로 부치는 노래들

평안한 추석 연휴 보내셨나요? 숑🌻입니다. 지금 레터를 쓰고 있는 이곳은 정동진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장소입니다. 강원도에 친인척이 살지도 않고, 해돋이로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할 연초나 설도 아니고, 여름휴가 성수기나 영화제 시즌도 아니니까요. 이번 연휴가 제법 기니까 휴일 끝엔 어딘가 새로운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요. 전라도나 경상도까지 멀리 가기엔 부담스러운데 바다는 보고 싶고, 아무 관광도 필요 없이 그냥 어딘가 다른 장소에 혼자 놓이고 싶어서 정동진을 떠올렸습니다.

정동진은 경복궁 기준으로 정동(正東)쪽 바다(津)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해요(나무위키를 보니까 의견이 분분하긴 한데..). 서울 기준으로 편도 1시간 44분. 딱 기차여행의 낭만과 설렘만 취하기 적당한 거리죠! KTX에 올라 점차 멀어지는 도시 풍경을 넘겨다 보고, 괜히 자리에 꽂힌 매거진 좀 뒤적이다가 챙겨 온 책을 펼쳐 조금 집중할라치면 차창 밖으로 초록 풀빛이 가득해져요.

이 짧은 여정에 '정동진 생각여행'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뭐든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편...). 의도한 만큼 생각을 충분히 하다 가는지 당장은 모르겠지만, 가끔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오늘은 정동진에 짧게 머물며 자주 들었던 노래들을 소개하며 지나간 연휴를 갈무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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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들 - Let It flow

혼자만의 짧은 여행지로 정동진을 택한 이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소에 묵직한 짐 가져다두기. 그 다음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한 책 읽기. 일렁이는 해변과 책장을 번갈아 쳐다봐서일까, 갑판으로 튀어오르는 바닷물의 짠내가 조금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녁으로 해물수제비 한 그릇을 사 먹고 든든한 배를 쓰다듬으며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걸었다.

<Let It Flow>는 지난 6월 발매한 밴드 '양반들'의 정규 1집 [Hymns from the Dragon Lake]에 실렸다. 밴드의 송라이터이자 보컬 전범선은 여러 모로 전복적인 인물이다('전복적'이란 형용사를 고르기까지 굉장히 오래 고민했다. 어떤 단어를 갖다 붙여도 이 인물을 한 단어로 압축하기엔 너무 납작해 보였기 때문에). 민사고 출신으로 아이비리그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동안 계속해서 밴드생활을 하는 스스로를 '풍류를 즐기는 양반'으로 규정하는 과정이 더없이 매끄럽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야심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마음이 누군가에겐 이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바다든 강이든, 널찍하게 흐르는 물결을 건너다 보며 <Let It Flow>를 듣는 시간은 언제까지고 황홀할 것만 같다. '끝과 끝과 끝이 하나되어 영원히 돌고 돌고 또 돌아가는 곳', '바다 속으로 꿈 속으로~' 같은 노랫말을 들으며 턱을 괴면 어디서든 멀리 떠나 온 기분이지 않을까. 동시에 어디든 더 먼 곳을 꿈꾸게 될 것만 같다.

🌻 고고학 - 파도

모래로 발이 푹푹 빠져 해변을 오래 걷기 힘들었지만 혹시 기대치 않게도 엄청나게 환상적인 노을을 마주하진 않을까 싶어 계속 걸었다. 해가 지기로 약속한 시간, 기대에 차서 고개를 자꾸 돌려봤지만 하늘에선 애매한 분홍빛만 새어나오다 흐지부지 어두워져버렸다. 아참, 정동진은 해돋이가 아름다운 곳이었지. 기막힌 노을을 기대하려면 서해를 갔어야지... 하늘에선 노을 대신 비실비실한 빗방울만 뿌려댔다.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와 놓고선 또 뭔가 이벤트를 기대한 내 자신이 웃기고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바다를 배경으로 한 노래를 귀에 잔뜩 담았다. 2022년 데뷔한 고고학은 사실 밴드 이름이 재밌어서 관심이 갔다. 바쁘고 치열한 밴드 경쟁 사회에서 이렇게 검색어에 쉽게 걸리지 않는 고유명사라니... <파도>는 바다와 관련되지 않았어도 내가 좋아할 스타일의 도입부다. 산뜻하고 청명하고 리드미컬하고, 뭐랄까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서핑을 하는 사람 같은 멜로디다. 해변을 걸으며 듣고 나서야 '아스팔트보다는 바다 가까이서 들어야 제맛인 노래구나' 실감했다.

🌻 강허달림 - 넌 나의 바다

강허달림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이정선의 <외로운 사람들>을 리메이크한 노래에서였다. 아무 반주 없이도 인간의 목소리 자체에서 블루스와 재즈가 느껴질 수 있구나, 그런 충격을 받았다. 목소리의 울림만으로 감동을 주는 아티스트가 하고 많은 소재 중에서도 바다에 대한 노래를 즐겨 짓고 부른다는 사실은 큰 행운이다.

<넌 나의 바다>는 여행으로 떠나 간 바닷마을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때 잔잔하게 귀에 담기 좋다. 아니면 부지런히 햇살이 비쳐드는 아침 시간이어도 좋겠다. 시집 한 권을 펼치듯, 반드시 노랫말을 꼭꼭 곱씹으며 듣기를 추천한다. 위로하듯 일렁이는 물결, 은빛 출렁이는 바다, 말없이 수줍은 수평선... 분명 먼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관찰한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고운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날 하루 바라본 모든 바다에 필터 하나를 덧댄 듯 기억 속 풍경이 더 애틋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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