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5] 🌻 뭍에서 멀어져야 잘 보이는 것들

구독자님, 건강한 한 주 보내고 계신가요? 이번 주 월요일이 겨울을 알리는 입동이었다고 하죠. 한 차례 비가 내리더니 날이 부쩍 추워졌습니다. 서울에는 첫눈까지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지난 주말부터 일주일의 휴가를 쓰고 통영의 욕지도에 머물고 있어요. 이곳은 바람이 많이 불지만 남쪽이라 그런지 아직 공기가 온난합니다.

이따금 섬의 어원은 '멈춰 서다'의 명사에서 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멈춰 '섬' 이후에야 뭍에서 멀어진 거리를 실감하며 달려 온 일상을 반추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마침 휴가 기간에 제 차례 레터를 쓰게 된 일도 우연인 듯 필연으로 느껴집니다. 육지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섬에서 300명이 넘는 수신인에게 편지를 띄울 기회가 삶에서 흔치 않을 것 같거든요. 이 글을 받아보실 구독자님에게도 섬의 잔잔한 여유가 전달된다면 좋겠습니다.

오늘 소개할 세 곡은 이번 여행을 떠나오면서 자주 들은 노래, 그리고 떠나올 수 있도록 힘을 준 노래로 꾸렸습니다. 올해라는 책에서 이 시기를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둘 수 있다면, 파란 플래그에 이 곡들의 제목을 적어 붙여둘 것 같아요. 그만큼 오래도록 의미를 두고 귀에 자주 담았던 노래들이니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에게도 무사히 가 닿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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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희은 - 배낭여행

처음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본 여행의 추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내 경우는 스물 네 살 1월에 떠난 내일로 여행이었다. 계획형 인간답게 나와 부모님 모두에게 유효한 계획서를 빼곡하게 작성하고 군산부터 통영을 거쳐 부산까지 일주일의 여정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 적었던 일기가 지금도 떠오른다. 혹시 처음 홀로 떠나보는 이 여행이 내게 안 맞는 걸로 판명난다면 중간에라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다행히 중도 귀가하지 않고 여행을 마쳤다. 직장인이 된 이후에도 혼자 여행을 다니곤 했지만 대학생 때, 하물며 생에 처음 맞닥뜨린 경험 앞에 두려움과 설렘으로 배낭을 꾸리던 기억은 분명 독보적이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질적 차이가 존재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올해 늦여름의 어느 날, 윤종신이 쓰고 양희은이 부른 <배낭여행>을 식당에서 우연히 들었다. 그의 풍성한 목소리를 듣는 동안 가진 것 없이 떠났던 순간이, 사방으로 뻗친 감각만으로 충만했던 그날의 여행이 온전히 되살아났다.

몇십 년 전도 아닌데 뭐 그리 별난 과거처럼 여겨질까. 지금은 낯선 곳의 풍광에 취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기왕의 일상을 훌훌 떨치지 못하고,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지질한 미련으로 순수하게 몰입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일상에 능숙한 어른이 된 것 같다가도 그저 겁 많은 인간이 되어간다고 느낀다. 흔한 관용구처럼 내 마음이 마음처럼 되기가 나날이 어렵다. 멈춘 듯 보이지만 쉼없이 모양을 바꾸는 물결과 구름 같기도 하다. 스스로도 알기 힘든 마음이 자연의 그것처럼 별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되려 위로가 되는 듯도 하다.

'제자리에 머물면서 왜 알 수 없는 걸까, 멀리멀리 떠나야만 왜 내가 잘 보일까' 노랫말을 곱씹으며 머물 땐 도망치고 싶던 '제자리'의 고귀함을 잠시 떠올렸다. 잿빛 일상에서 이를 떠올리지 못한다고 나를 탓할 이유는 전혀 없다. 뒤척이는 물결과 흐르는 구름처럼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별나지 않은 자연의 일부임을 다행스레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 도마 - 소녀와 화분

도마의 첫 정규앨범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는 앨범명부터 내 눈을 사로잡았다. 동그마니 섬이 그려진 푸르른 커버까지 내 몫처럼 맘에 들었다. 깊은 저녁에 조용히 틀어두기 좋은 포크 풍의 노래. 앨범의 어떤 곡을 골라도 새벽녘 배를 타고 어느 섬에 들어갈 적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리듯 차가운 공기, 선실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사람들, 사방에서 하얗게 철썩이는 파도. 이른 아침 다다른 섬은 목줄 없이 쏘다니는 개가 종종 보일 뿐 전체적으로 가만한 인상이다.

"슬픔을 집에 가두지 말고 풀자고 했다." 앨범에서도 가장 자주 들은 이 노래의 좋아하는 구절이다. 이 짧은 문장 하나가 왜 이리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 꽁꽁 안고 있지 않아도 슬픔은 알아서 내 안팎을 자유로이 드나든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 틈새로 공기가 순환하듯, 내 곁에 누군가 머물다가도 곧 떠나 혼자가 되듯이.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슬픔과 어깨를 나란히 하더라도 그리 버겁지 않겠다는 든든함이 차오른다. 슬픔이란 목줄을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이곳저곳 제 향기를 묻히고 다닐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고 유능한 뮤지션인 도마는 올해 3월, 머나먼 섬으로 영영 떠나고 말았다. 공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음을 기약했던 나날이 후회스럽게 떠올랐다. 기타 치고 노래하는 영상을 뒤늦게 찾아보니 자신의 목소리만큼이나 꾸밈 없고 맑은 미소로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와 또래인 그녀가 따뜻하고 향기로운 그곳에서는 아무 근심걱정 없는 얼굴로 노래하며 안식을 취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진심으로 쓰고 부른 노래를 오래오래 찾아 들으며 기뻐하고 위로 받고 외로워 하다가도 슬퍼할 테다. 그렇게 도마의 음악을 기억하고 싶다.

🌻 신해철 - 나에게 쓰는 편지

2년 전쯤, 입사 이래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던 나날이 있었다. 매일이 계주선수의 심정이었고 내게 몰아닥친 업무를 모두 해치우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루종일 등을 꼿꼿하게 펴고 집중했음에도 마감을 지키지 못해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울적한 기분에 빠질 틈도 없이 다시 움직여야 했다. 헤쳐나가야 할 업무의 파도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그 파도 위로 길게 드리워진 자책의 그늘이 괴로워 가끔 울기도 했다.

그런 내게 다정한 말을 건네준 동료가 있었다. 자책하게 만든 상황을 탓하라고, 과거에도 분명히 잘 헤쳐나간 적 있던 나임을 까먹지 말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신해철의 이 노래를 우연히 들었다. 연휴가 지나간 뒤 다시 찾아올 일상이 벌써 버거워 겁을 먹던 중이었다. ‘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게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내 울고 싶어 /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란 가사에 마음을 기대놓았다. 혼자 바쁨과 우울에 매몰되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준 이, 그리고 나보다 나이를 더 먹은 노래 한 곡 덕에 그 시기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나에게 쓰는 편지>는 지금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둔 상비약처럼 막막한 순간마다 떠올리게 된다. 그가 20대에 쓴 노래가 지금의 내게 이르기까지 조금도 빛 바래지 않고 유효하단 사실이 신비할 뿐이다. 내가 가장 두려운 건 혹시 모를 미래에 이 노래의 가사에 감응받지 못하거나 불신하게 되는 일이다. 언젠가부터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가지만 소중한 것은 변하지 않고,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으므로 슬플 땐 맘껏 울어도 된다는 이야기를 나는 오래오래 믿고 싶다. 필연적인 우울에 빠질 나와 주변의 소중한 이에게 구원이 될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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