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다란 질문
질문은 의문에서 나온다. ‘의문’이 한 개인이 갖는 의구심이라는 심리적 상태인데 반해서, ‘질문’은 그런 심리적 상태가 대화를 통해 소통의 장으로 진입하는 사회적 행위이며 적극적 행동이다. 또한 의문이 비판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질문은 곧 비판적 행동일 수 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질문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새로운 차원을 묻거나 혹은 서로 합의하기 어려운 쟁점을 다루는 질문들일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에는 왜 공룡이 살고 있지 않는가” “나무도 생각할 수 있을까” 혹은 “지금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인가” 등의 경우이다.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설정한 답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온갖 생각들을 동시에 소환하고 재배열하고 타자를 설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답이 없는 문제가 가장 교육적인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좋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답은 과거이며 질문은 미래이다. 정해진 답으로 회귀하는 과거형 교육과정과 수업모형을 어떻게 폐기할 것인가의 문제는 학교개혁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사회개혁의 기점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학교가 주입한 이러한 소통방식은 성인기의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의문을 갖는 것을 불편해하고, 지배적 문화가 정해준 답에 의지해 역산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삶 전체를 지배한다.
# 무지ignorance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이란 세상을 이해하는데 쓰이는 매우 잘 정돈된 작동 도구입니다. 진실을 알아내고, 규칙에 지배받지 않는 자료를 얻고, 과학자들은 이런 것을 과학적 방법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정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맥주 몇잔을 앞에 두고 동료들과 술집에 모입니다. 저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아요. 저희는 저희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전히 앞으로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죠. 또 그걸 해내려면 실험실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이야기합니다. 마리 퀴리 부인이 이렇게 말했죠. "사람들은 이제껏 완결된 것은 보지 못하고 앞으로 되어야 할 것들만 본다."
제임스 크럭 맥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완전히 자각되는 무지란 과학의 모든 진보에 대한 서곡이다." 과학에서는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아는 것은 과학자가 더 많은 것을 무시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식은 커다란 주제이지만 저는 무지가 더 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x 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에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모르고 있으니까." 혹은 심지어 "질문이 뭐죠?"라고 답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말했습니다. "교육은 그릇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불꽃을 튀겨주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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