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계절🍂

안녕하세요. 중앙아메리카의 파나마에 살고 있는 이레네라고 합니다. 저는 몇 주 전 한국에 휴가를 왔습니다. 파나마는 일년 내내 여름만 가득한 나라인지라 지금 여기, 고국의 가을이 저에겐 무척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반갑고, 따스하고, 더 또렷하달까요. 이번 주는 제가 흡수하듯 들이켜고 있는 가을에 대하여 썼습니다.

우리의 가을이 저의 부족한 글로 찰나동안이라도 더 깊어지길 감히(?) 소망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가을은 그러기 좋은 계절인 것 같습니다. 

🤎다정한 계절, 순천으로의 여행🍂

그 날 아침 여덟 시, 나는 졸린 눈으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KTX 차창 너머 색색의 풍경이 시선을 붙드는 까닭에서였다. 어떻게 저렇게 고울까. 어떻게 봐도봐도 질리지 않을까. 열대우림 파나마의 화려한 빛깔과는 다른, 어딘가 농익고 여물은 가을색이 창 밖에 우아하게 흐드러졌다. 나는 순천으로 향하는 내내 그 풍요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여행하기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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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 향한 건 몇 년 전의 기억 때문이다. 그 때도 이렇게 늦가을이었고, 친구와 나는 순천-여수 여행 코스를 짰다. 그러나 여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심심해 보였던 순천은 고작 하루 일정이 전부였다. (...지독한 편애의 시작...) 계획을 세우는 내내 우리는 '여수밤바다' 노래를 흥얼거렸고, 여수에서 먹을 음식 메뉴와 맛집은 주루룩 적어 놓은데 반해, 순천은 한두 개가 고작이었다. 여수에선 차를 빌렸고, 순천에선 대중교통으로 가지 못하는 장소는 대충 포기했다. 우리는 이런 편애를 나중에 몹시 후회했다.

그런 이유로 이번 가을엔 다시 순천에 향했다. 잠깐 맛보았던 순천의 고즈넉하고 소박한 멋을 제대로 느끼고 싶었고, 무엇보다 시절이 어수선한 탓에 우울함에 침잠한 기분을 돋우고 싶었다. 순천이라면, 이 아름다운 남쪽 도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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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는 시간에 열차에 올라탄 덕에 순천에 도착했을 땐 점심 무렵이었다. 동행한 친구와 나는 미리 알아둔 식당으로 향했다. 정오를 삼십여 분 앞둔 시간이었는데도 손님이 가득했다. "꼬막 정식 두 개요." 주문한지 얼마 안 되어 분주하고 재빠른 몸짓의 종업원이 반찬 카트를 끌고 왔다. 2층짜리 카트에 담긴 열 네댓 가지의 찬은 곧장 우리 테이블에 놓였고, 겹치는 것 없이 하나 하나 모두 맛있었다.

특히 찬바람 부는 이맘때가 제철이라는 꼬막은 정말 오동통했다. 그 중에서도 참꼬막의 맛은 기가 막혔다. 알이 굵은 참꼬막에선 향긋한 바다 내음이 났는데, 내 비루한 표현의 한계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구절로 대신한다.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한' 맛.

어디 그 뿐인가. 반드르르 윤기가 도는 솥밥과 보글보글 소릴 내는 뚝배기 된장찌개, 노란 계란물을 입혀 부친 꼬막전, 씁쓰레한 맛이 나는 푸성귀 샐러드까지··· 계절이 가꾸고 사람이 손질한 음식들에선 다정한 맛이 났고, 나의 배를 기분 좋게 채웠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음식을 만든다는 건 일종의 연금술 같단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 시꺼먼 갯벌에서 꼬막을 캐서 이렇게 맛있게 만들 생각을 했을까? 여기 계란물을 입혀서 부칠 생각을 어떻게 했냐고."
"서양인들이 꼬막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봐. 케첩에 찍어 먹었을 수도 있어."
"으악"
"으악." 

친구와 나는 뭐 그런 이야길하며 밥이 담긴 솥을 박박 긁어 먹었다. 따뜻한 물을 부어 숭늉으로 입가심까지 하니 손이 절로 배를 두드렸다. 과장 조금 보태, 세상 모든 게 다 평화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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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비스듬히 땅을 적시는 오후, 순천만습지에 향했다. 평일인지라 방문객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탁 트인 공기가 상쾌했다. 자연스레 미소가 피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렇게 자유로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파나마는 아직도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는 분위기인지라 이 자유가 더욱 달콤했는지 모른다. "코를 너무 심하게 벌렁거리는 거 아니야?", "뭐래? 나 원래 콧구멍 커.", "그래, 좋겠다, 진짜." 웃음을 터뜨린 친구가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내가 너스레 떠는 장면을 찍었다. 우리는 시덥잖은 농담과 진지한 고민을 주고 받고, 그러다 이쁜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걸었다. 찍는 사진마다 그림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무명천처럼 바삭했고 그 아래 금빛으로 너울대는 갈대밭은 수줍게 살랑거렸다. 화려한 꽃이라든가 근사한 조형물 없이, 그저 오롯하게 하늘과 산, 갈대, 그리고 그 사이를 유유히 나는 철새가 전부였다. 동양화에선 '여백의 미'를 중요시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그 순간의 순천만은 완벽한 아름다움이었고, 나는 역설적이게도 그 '비어있음'에서 내 마음이 채워지는 걸 느꼈다.

문득, 이 순간이 꿈같았다. 어제만 해도 도시 위를 둥둥 떠다녔는데, 갑자기 다른 세계로 건너온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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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 근처의 와온해변에서 노을을 구경하고 숙소에 돌아왔다. 평소답지 않게 많이 움직여 놀란 근육들이 아우성쳤다.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맥주 한 잔을 들이킨 후 뽀송한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의 만보기 어플이 알림을 보내왔다. "올 해 신기록! 28,000보!" 알찬 하루가 숫자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친구와 나는 나란히 엎드려 누워 오늘 찍은 사진을 하나 하나 확인했다. 수 백 장인데도 뭐한 장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모두가 그 근사한 배경 덕이었다.

우리는··· 가을에 안겨 있었다. 상냥한 자연이 어루만지고 있는 얼굴은 밝았고, 표정엔 그늘이 하나 없었다. "사진에서 왠지 가을 냄새 나는 거 같아." ···친구가 나직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정말 그러했다. 뭔가가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 바삭거리는 건조한 냄새 같기도 한. 봄의 물기와 여름의 습기가 말라버린 쓸쓸함이 사진에서 풍기는 듯 했다. “곧 겨울이 오면 여기도 쓸쓸해지겠지?” 조금쯤 서운함이 묻어나는 내 말에 친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갈대밭은 사시사철 똑같애. 겨울도 지금이랑 별로 다른 거 없을 걸.”

…아. 솔찬히 이성적인 친구... 

머쓱해진 나는 괜스레 코를 킁킁거리다 편하게 드러누웠다. 며칠간 잠을 설친 탓인지, 혹은 2만 8천보라는 업적을 세운 탓인지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러는 와중에 비식 비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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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1월의 중순, 가을의 끝자락이다. 

봄에 움트기 시작해, 여름에 싱그러움을 가득 품었다, 가을이 되어 그 빛을 토해내는 자연의 풍경은 무척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 슬프다. 그러나 그걸 완전한 소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채운 만큼 비워내는 과정 역시 반드시 필요한 법이니까. 여백과 공백은 때로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품기도 하니까.

아프고 시린 날들이다. 그러나 가을을 즐길 여유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 만일 지금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그리하여 매몰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번 주말엔 무작정 걸어보아도 좋겠다. 가을 볕과 청명한 공기는 상처를 꺼내어 말리기에도, 눈물을 내어서 말리기에도 좋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에 오늘 하루 고운 볕이 들길 바란다. 풍성한 색을 흩뿌리는 가을이 조금 더 다정하게 당신의 머리 위로 저물길 바란다.

우리는 지금, 함께 가을 속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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