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문 시대에 잡문이란

올 해도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네요. 연말이 다가오면 슬슬 압박감을 느끼지 않나요. 연 초에 계획했던 일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저는 수십 권의 책을 사면서도 읽은 건 고작 5권에 불과합니다. 한 권이라도 더 읽어보려 안간힘을 쓰는데 집중력이 예전 같이 않아 쉽지 않네요. 오늘은 저명한 문학가의 글과 몇가지 단상을 담아보려 합니다.  한 잔 커피를 곁들이며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잡문 시대에 잡문이란

글 : 선재

인터넷으로 '잡문 시대'를 검색해 보았다. 용어가 그럴듯해 정말 그런 시기가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 깜빡 속았다. '잡문 시대'는 1951년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어느 시기부터 일간지에는 교양에 목말라하는 독자를 위한 온갖 종류의 지식이 상품 생산하듯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잡담'을 늘어놓았다고까지 비판한다. 

저자는 지위와 명성을 갖춘 작가들까지 그런 무가치한 흥밋거리의 대량 소비에 '시중드는' 일을 도왔다는 점을 아이러니라고 꼬집는다. 당시에는 이상할 정도로 읽기를 좋아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 모든 괴상한 것들은 아무 의심 없이 선의와 진정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그날그날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급하게 성의 없이 쓴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서 가려내고 기사화하는 일은 급속도로 무책임하게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완전히 같은 길을 밟고 있었다 말한다. 한 예로 '크로스워드 퍼즐'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고되게 일하고 힘든 생활을 했는데도 몇천몇만이나 되는 사람이 여가 시간이면 글자로 된 사각형과 열십자 위로 몸을 구부리고 앉아 일정한 유희 규칙에 따라 빈칸을 메우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단지 우습거나 제정신이 아닌 면만을 본다거나, 조소를 퍼붓는 일도 그만두자고 한다. 어린애들이나 할 만한 퍼즐을 풀고, 한편으론 잡문을 읽었던 그 사람들은 결코 순진한 어린아이나 장난을 좋아하는 호사가가 아니었다고.

그들은 정치, 경제, 도덕의 혼란 속에서 불안해하고, 몸서리나는 전쟁과 내전을 몇 번이나 치르고 있었다. 그들의 보잘것없는 교양 유희는 즐겁기만 하고 의미 없는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 풀 길 없는 문제들과 두렵기 그지없는 몰락의 예감으로부터 두 눈을 감고 가능한 한 천진난만한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은 심각한 욕구에 따른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더 이상 위안을 얻지 못하고, 정신으로부터는 조언을 듣지 못한 채 거의 무방비 상태로 죽음과 공포, 고통과 굶주림에 직면해 있었다. 그토록 많은 글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무서움에 대하여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고, 자신의 내면에서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는 데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 그저 떨며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내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출처 : 민음사 ‘유리알 유희' 전문에서 발췌한 글

시대를 특정하진 않지만 잡문 시대라 일컬을 정도로 잡문이 성행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진보된 기술을 제한다면 지금 현시대를 대변한다 해도 한낱 이상할 것 없어 보인다. 지금은 모두가 작가인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방대한 글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양가적인 감정을 넘어 양심의 가책에 가까운 고독과 마주했다. 과연 내 글은 어느 범주에 속할까, 나 역시도 잡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잡문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진 않지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모두가 작가인 시대, 각종 매체를 통해 누구나 자기 목소리를 내고 스피커를 자처하려 한다. 헤세가 언급한 크로스워드 퍼즐과 같이 글쓰기를 위한 각종 챌린지도 유행한다. 한 예로 네이버의 ‘주간일기’를 들 수 있다. 네이버는 ‘일상은 기록해야만 기억되니까’라는 슬로건과 여행상품권을 내걸고 주간일기를 독려한다. 자본과 기술과 욕구가 한데 얽혀 유유히 나아간다.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썩 괜찮은 일기는 출간이 되기도 한다. 가치 있는 편지글은 서한집으로 묶여 세상에 공개되고, 잡문집이라 하여 잡문을 역은 책들도 무수하다. 다시 말해 일기든, 수기든, 잡문이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들이 보편화되었다. 잡문 시대의 잡문이란, 어쩌면 시대의 표상이 아닐까. 

비록 가벼운 표상일지라도, 그 속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녹아있다. 가치 한 스푼과 고뇌 한 스푼이 담긴 시대를 대변하는 목소리인 것이다. 헤세가 언급한 바와 같이 불안한 시대와 거대한 흐름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해 묵묵히 쓰고 묵묵히 읽는다. 그러니 잡문을 가볍게 말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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