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님을 만난 건 신입활동가들이 모인 독서모임에서였습니다. 에녹님의 조곤조곤한 말씨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모두가 웃고 있더라고요. 그는 대단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는 자신이 활동가라고 소개되는 것이 어쩐지 낯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통일에 대해서,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누구보다 신나게 떠들어놓고 말이죠. 어디다 던져놓아도 번듯한 통일 활동가, 에녹님을 소개합니다.
유미(유) : 자기소개해주세요!
에녹(녹) : 안녕하세요. 저는 활동가로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차에녹이라고 합니다. 한빛누리의 청년활동가 육성사업 ‘한몫하다’를 통해 연결된 <복음과상황>(이하 복상)에서 객원기자로, ‘더불어하나되는다음세대’(이하 더하다)에서 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 : 저는 이름이 흔한 편이라 흔하지 않은 이름을 가진 분들을 만나면, 꼭 질문하는 편이예요. 에녹이라는 이름은 어떤 분이 지어주신 이름인가요? 에녹님은 ‘에녹’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녹 : 제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 주셨어요. 목사님이신 할아버지가 직접 짓고 싶은 욕심(?)이 있으셨지만, 부모님이 꼭 주고 싶은 이름이 있었다고 해요. 에녹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오른 사람이에요. 다른 유명한 성경 인물들만큼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이 저에게 바라신 삶의 모습이겠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늘 동행하는 삶.

아무래도 이름 때문에, 눈에 띄게 나쁜 짓을 하는 건 어려웠어요. 이름이 이순신이거나 링컨이면, 왠지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야 할 것 같잖아요. 다행히 에녹은 모세나 이삭에 비하면 비교적 덜 유명한 인물이라, 그냥 이국적인 이름인가보다 정도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요. 덕분에 약간의 일탈 정도는 가능했던 거 같아요.(웃음) 저는 제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저를 향한 부모님의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켜 주거든요. 저에게 이름을 주신 부모님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하나님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함께 걸어가는 여정. 느리지만 확신에 차 있고, 소박해도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 게 아닐까요?
여담이지만,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입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이기도 하죠.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그의 이름대로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최대한 뒤로 미뤄진 셈입니다. 화내기를 더디하시고, 심판을 최대한 늦추시고, 죄에 빠진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미래 자녀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을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웃음)
유 :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된다’ 하는 생각 없이도 학창시절에 ‘에녹’이는 ‘유미’에 비해서 떠들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선생님에게 기억되기 쉬운 이름이니까요. 유미가 떠든 건 쉽게 잊혀져도 에녹이가 두 번 떠들면 바로 기억에 남을 것 같거든요. (웃음) 올해 3월부터 청년활동가 육성사업(한빛누리 한몫하다)에 참여하고 계신데요. 평소에 ‘활동가’라는 직업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관심이 없으셨다면 어떻게 사업에 참여하시게 된 것인지 그 동기가 궁금해요.
녹 : 사실 저는 활동가라는 직업이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세상의 부조리함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어도 모를 수가 없는데, 제가 그동안 너무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던 거죠. 대학을 졸업할 때쯤 활동가란 직업에 대해 처음 들었고, 시민단체나 정당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변혁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할지, 취업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을 통해 ‘더하다’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어요. 제가 평소 통일에 관심이 있던 터라 한번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대표님과 식사자리를 가졌는데, 거기서 잠깐 대화를 나눈 뒤 바로 출근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이 업계의(?) 많은 분들이 그렇듯, 처음 시작은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짧은 대화 속에서도 대표님의 열정과 진심이 느껴졌고, 단체의 비전이 좋고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보면, 우리 대표님이 소통하고 설득하는 부분에서 참 탁월한 것 같아요.
그렇게 아무런 예고도 준비도 없이 활동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는데요. 당시 ‘더하다’에서 저에게 급여를 주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때 마침 한빛누리에서 20주년 사업으로 ‘한몫하다’를 진행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대표님의 권유로 지원을 하게 됐습니다.
유 : 평소에 통일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저로서는 의외의 답이예요. 에녹님과 제가 비슷한 또래라고 알고 있어요. 저에게 통일은, 매해 6월이 되면 학교에서 하는 글짓기 대회와 포스터 그리기의 주제 정도거든요. 에녹님의 관심이 통일에 닿아있던 계기가 있을까요?
녹 : 저도 학창 시절 그런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통일의 필요성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깊이 이해하고 느끼기보다는, 그저 외워야 하는 주입식 교육에 가까웠죠. 아이들이 공감하기 보다는 지루하고 어려운 주제로 받아들인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책을 읽고 공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감각을 갖게 되었어요. 세상에는 돌봐야 할 이웃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깝고, 가장 절실한 곳은 같은 언어와 음식, 역사를 공유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주 가까운 이웃을 외면한 채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쏟는 건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잖아요. 저에게는 북한이탈주민이 가까운 이웃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북한이탈주민을 돕기만 할 존재로 생각하는 건 옳지 않죠. 배울 점도 많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이웃이기에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을 저희가 ‘미리 온 통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결국 통일이 된다면 함께 살아갈 이웃이고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유 : 통일에 관심이 있었던 청년이 통일운동을 하는 청년 활동가가 되었네요. 이런 게 운명일까요?(웃음) 평소 에녹님의 관심사와 맞닿아있는 의제로 실질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더하다’와의 만남이 에녹님에게도, ‘더하다’에도 좋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빛누리 사업을 통해서 ‘더하다’ 뿐만 아니라 복음과 상황의 기자로도 활동을 하셨죠. 어떤 시간이었는지 궁금해요.
녹 : 네, 감사하게도 한빛누리 사업을 통해 다양한 단체와 여러 활동가들과 만나고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요. 유익한 교육 프로그램도 이수할 수 있었고요..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좋은 기회였어요. 사업을 통해 ‘더하다’ 뿐 만 아니라 ‘복음과 상황’에서 활동을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요. 처음에는 새로운 단체로 가는 게 낯설기도 하고 걱정되었지만, ‘복상’에 첫 출근을 하는 날, 정말 좋은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편집장님과 기자님들, 그리고 디자이너님이 너무 좋은 분들이었고, 단체의 소명과 비전이 아주 매력적이었거든요. 다소 복잡하고 예상치 못한 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저를 위해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복음과상황은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개신교 월간지예요.. 저는 인턴 기자로서 취재 현장에 따라가기도 하고, 마감 때는 원고를 교정교열하는 일을 했습니다. 다양한 단체와 교회들을 접하면서, 활동가의 영역이 내 예상보다 훨씬 방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연대하며 시너지를 낸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매달 사회의 여러 문제 중 어떤 부분을 조명할지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우리 단체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어요. 독자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질문하고 스스로 답해보기도 했지요. 6개월이라는 시간이 정말 짧게 느껴졌는데,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고, 함께 일한 분들에게도 배울 점이 정말 많았던 것 같아요. 복상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분들이 너무 좋은 분들이라,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더하다는 남북민 사회통합과 민족화해를 위해 작은 통일 이야기를 써가는 단체입니다. 말 그대로 규모가 작은 단체지만, 이웃과 지역 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있고, 점점 그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어요. 우리가 ‘미리 온 통일’이라고 부르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이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간사로서 단체의 홍보와 웹사이트를 담당하고, 사업 기획과 진행을 하기도 해요. 아직 이해와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북한이탈주민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알아가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늘 옆에서 도움을 많이 주시는데요. 대표님 이야기를 들으며 제 머릿속에 흐릿하고 모호했던 통일의 이미지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한 거 같아요. 그동안 대표님 혼자서 이 모든 일을 해왔다는 게 믿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행정 업무뿐 아니라 사람을 돌보고, 소통하는 일들이 엄청 많거든요. 제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유 : 복음과 상황 8월호에서 에녹님이 더하다 대표님이신 정혁구 대표를 인터뷰하셨죠. 인터뷰에서 에녹님의 시선이 진지하고 진중해서 인상적이었어요. 인터뷰를 통해 알게된 ‘더하다’와 실제 활동을 하면서 알게된 ‘더하다’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녹 :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작년에 대표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더하다’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오래 전부터 통일에 마음이 있었던 터라 대표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왔죠. 마침 단체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인터뷰 때 대표님이 하신 이야기가 처음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요. 단체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이 단체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반, ‘남북민이 어우러진 공동체’에 대한 기대감이 반이었어요. 분단과 통일에 대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생각이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그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듣고 싶었어요. 실제로 활동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이 생겼고, 이것이 저에게 정말 소중한 경험이 된 것 같아요. ‘나 정도면 편견이 없지.’라고 생각했던 제가 그동안 엄청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북한이탈주민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고, 살아온 배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이분들을 집단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각각 개인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려고 합니다. 결국 공동체라는 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거니까, 이 부분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유: 확실히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의제와 실제로 그 속에서 경험하는 의제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다 같지 않고, 너무 다르다’라는 에녹님의 성찰에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하다의 사업을 몇 가지 살펴보았는데요. 저는 ‘압록각맛집’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어떤 것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압록각맛집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도 소개해주세요.

녹 : 압록각맛집은 더하다의 가족들이 모여서 북한이탈주민, 특히 한부모 엄마들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해 설립한 협동조합입니다. 단체가 사회적경제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고요. 음식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남북의 문화를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교류하는 만남의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압록각맛집에서 준비 중인 메뉴는 주로 북한의 전통 음식입니다. 여러 음식 중 저의 최애는 옥수수 국수인데요. 처음 먹었을 때의 그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북한식 국수의 특징이 굉장히 시원하고 깊은 맛이 납니다. 그리고 면도 식감이 좋고 굉장히 맛있습니다. 그 외에도 청수냉면, 두부밥, 인조고기밥 등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는 음식들이 많습니다. 최근 나들목교회 케이터링을 통해 시범을 보였는데요. 맛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많더라고요. 혹시 기회가 되시면, 와서 한번 드셔 보시길 권합니다!
유 : ‘옥수수 국수’를 기억하겠습니다(웃음) 에녹님이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한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는데요. 이제 그 이름에 조금 익숙해지셨는지 궁금해요. 활동을 이어나가면서 즐거웠던 장면과 힘들었던 순간들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녹 : 활동가로 불리는 게 아직 어색하긴해요. 스스로 활동가라는 정체성은 갖고 있지만, 남들에게 불리는 건 낯부끄럽더라고요. 활동가가 마음만으로 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전문성을 갖추었는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있어요. 어울리는 구색을 맞추어야할 것 같은데,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열심히 경험하고,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활동가로서 즐거웠던 순간은 정말 많은데요.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건, 단체의 초등학교 아이들과 했던 했던 ‘희망의 인문학, 마음성장 독서맛집’이에요. 읽고 쓰는 것이 어려운 아이들의 인문학적 사고를 길러주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처음에는 선생님 말도 안듣고, 서로 데면데면했던 아이들이 시간이 갈수록 가까워지고 마음을 여는 것을 보며 뿌듯했어요. 아쉽게도 독서맛집은 아이들이 중학교 입학을 앞두면서 잠정 중단되었지만, 유익한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다시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더불어 하나되는 다음세대’가 되기를 바라면서요.

다음으로, 복음과상황에서 임진강언덕교회로 취재를 갔던 기억이 떠오르는데요. 임진강 건너 북녘땅이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는 저와 기자님들을 포함한 외부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는데요. 교인들의 자연스러운 환대 문화가 인상 깊었어요. 처음 교회를 찾는 분들도 같은 따스함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교회는 사회통합과 평화, 그리고 소수자를 위해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데, 임진강언덕교회는 이미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임진강언덕교회는 적은 수의 교인이 모이지만, 초대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고, 무너진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단단한 교회였습니다. 매주 예배를 마칠 때마다, 교회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더라고요. 합심하여 통일을 꿈꾸고, 준비하는 교인들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활동가로서 이런 건강한 교회와 단체를 세상에 알리고, 다른 단체와도 연대할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 주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기억날 만큼 힘들었던 순간은 아직 없는 것 같아요. 자주 저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좌절하기보다는 배움과 성장을 위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아직 정말 힘든 걸 경험해보지 못한 걸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다행인건, 제가 힘들 때 곁을 지켜주며 도와줄 수 있는 분들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분들의 존재가 저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다루는 주제나 관심 분야는 다르더라도, 결국 좀 더 살만한 세상을 꿈꾸는 건 같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느끼는 어려움을 똑같이 경험했기 때문에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 한 가지 생각났어요. 제 일정이 워낙 불규칙하다보니 종종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평일뿐 아니라 주말에도 행사가 있거나, 예상치 못한 일정들이 생길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런 변화에 맞춰 시간 관리와 에너지 배분을 하는 게 아직은 쉽지 않더라고요. 이 부분도 선배 활동가님들을 통해 조언을 듣고 있습니다.
유 : 어떻게 조언해주시던가요?
녹 : 저에게 자신의 시간과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금방 지치고 번아웃이 올 수 있다고도 하셨죠. 그리고 무엇보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영역’을 설정하고, 그 영역이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저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됐죠.
솔직히 시작하기 전에는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모든 일들이 다 저에게 유익해 보이거든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면 감당이 안 될 때가 많죠. 지금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제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는 중입니다.
최근 운동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이유도 비슷해요. 열정만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거든요. 결국 중요한 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 가면서, 맡은 일들마다 최고의 컨디션과 퀄리티로 해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시면 에녹님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는 편인지 궁금해요. 평소 에녹님이 힘을 비축하는 비법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녹 : 저는 평소에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아닌 거 같아요. 그래서 필요한만큼 비축을 해 놓아야 하거든요. 집에 가면 우선 잘 쉬려고 해요. 옛날에는 잠도 늦게 잤는데, 요즘은 일찍 자게 되더라고요. 다행히 잠들면 거의 기절해서, 아침까지 안 깨고 푹 자요.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해서 거의 항상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어요. (청력에는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집에서 일을 하거나, 무언가 집중해서 할 때도 음악을 듣는 편이에요. 장르도 다양해서, KPOP, CCM, EDM, 클래식 등 그날 끌리는 곡으로 선택해요. 원래는 운동도 했는데, 최근에는 잘 하지 못하고 있네요. 저에게 운동은 힘을 비축하기보다 쓰는 쪽에 가까워서, 어떻게 하면 바쁜 일정 사이에 끼워 넣을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집에 여기저기서 받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읽으려 해도 틈이 잘 안 나더라고요. 일주일에 한 권씩 읽고,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최근에 했던 책모임이 정말 좋았거든요. 독서와 나눔은 저에게 잠시 멈춰서 생각할 틈을 주고, 혼자서 얻을 수 없는 통찰과 아이디어를 얻게 해줍니다. 그것이 나중에 무엇을 하든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유 : 근래 읽은 책 중에 에녹님에게 큰 힘이 되었던 책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그 책에서 어떤 통찰과 아이디어를 얻으셨나요?
녹 : 최근 읽고 감명깊었던 책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책이에요. 이 책은 1980년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아내와 다섯 딸과 함께 살아가는 펄롱이라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어두운 내면을 보게 되고,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선택 앞에서 깊은 고민을 거듭하죠. 자신을 압박하는 사회적 힘과 권력에 맞서,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해 나가는 그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펄롱과 마을 권력의 핵심인 수녀원장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데요. 수녀원장이 “성을 이을 아들이 없어 아쉽겠다.”고 말하자, 펄롱은 자신도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의 성을 따랐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담담하게 답하죠. 그가 고용하는 인부들이 다양한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라는 점도 떠올리게 하면서, 여전히 ‘출신’과 ‘배경’을 기준으로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멋진 대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펄롱이 살아가는 사회의 어두운 면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을 읽으며 ‘내가 펄롱의 상황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게 되었어요.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종교인이라면, 그리고 활동가라면, 사회적∙경제적 압박 속에서 나는 결국 어떤 가치를 최우선으로 둘 것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활동가라고 해서 모든 압박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니까요. 작가의 훌륭한 필력으로, 전체적으로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져 읽는 재미도 컸습니다.
유: 인터뷰의 마지막 순서는 차에녹의 신앙 소스리스트*를 들어보는 시간입니다. 에녹님의 신앙여정에 영향을 준 세 가지의 소스리스트를 들려주세요. 소스는 책이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에녹님이 만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소스 리스트는 2021년 1월에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재미공작소의 오프라인 문학 행사의 이름입니다. 소스 리스트에서 호스트 작가는 자신의 첫 시집 혹은 첫 소설집 탄생에 영향을 준 영감의 원천 열두 가지를 '소스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해요.)
녹 : 신앙여정의 소스리스트라, 처음 듣는데 정말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아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첫 번째는 저의 멘토인 부모님입니다. 첫 신앙을 물려준 분이기도 하고, 인생의 기로에서 갈피를 잃을 때마다 길잡이가 되어 주시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삶 자체로 저에게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주시지요. 특히 요즘은 부모님이 선택하고 걸어온 길이 정말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자주해요. ‘지금 내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비전을 세우고, 사역에 뛰어들고, 제자들과 함께 살았다고…?’ 지금의 나와 비교하면, 그 결정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부모님은 늘 청출어람을 말씀하시지만, 저는 기쁘기보다 오히려 부담될 때가 많습니다. 먼 타지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솔직히 그렇게 살 자신이 없거든요.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부모님의 일상을 보면서 그것이 참 따뜻하고, 진실한 삶의 모습이라고 느껴요. 제가 부모님과 함께 들어가 있는 단체 카톡방이 하나 있는데요. 방 이름이 ‘삶으로 말씀읽기’입니다. 말씀을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닌 삶으로 살아내는 것. 내 하루하루 일상에 비추어 말씀을 읽는 것. 이것이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신앙여정의 가이드라인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그것을 함께 나눌 지체들이 있다는 게 큰 복인 것 같습니다.
다음은 교회입니다. 저는 지난 4월에 처음으로 지금 다니는 교회에 갔는데요. 복상 편집장님의 권유로 나갔다가, 현재는 매주 출석하고 있어요. 이전에 다니던 교회 역시 좋은 곳이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가 마음을 온전히 쏟지 못하는 상태였어요. 그러던 중 편집장님의 권유로 지금 다니는 교회의 수련회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마치 내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꼈어요. 신앙생활을 혼자 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에겐 나눔 없는 묵상이 열매 맺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신앙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침 나갔던 교회가 저에게 딱 맞았던 거죠. 교인이 많지는 않지만, 끈끈하고 서로 살뜰히 챙기는 분위기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어요. 저에게 정말 소중한, 좋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요. 지금은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간간이 주보 글도 작성하며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 신앙여정에 중요한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요. 이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습관처럼 드리는 지루한 예배가 아니라, 가슴을 뛰게 하고 늘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예배의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하겠죠. 좋은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 안에서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앙여정을 함께 하는 이들과 말이죠.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양인 박용주 선교사님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처음 이 찬양을 들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느꼈어요. 그것이 슬픔인지, 감격인지, 감사인지,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고통 가득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약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걸 알려주셨지요. 내 눈길을 자꾸 그쪽으로 돌리시고, 내 걸음이 계속 그들을 향해 가도록 마음을 주시는 걸 느꼈어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은 누구일까?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이들이 떠올랐어요.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하고, 슬픔이 차올라 먹먹하고, 마치 오래 전부터 나에게 주어진 사명 같은 사람들.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바라보시고, 함께 울고 계셨던 쓸쓸하고 어두운 곳.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언제 들어도 눈물이 나는 이 가사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분의 임재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분단된 조국 산하를 바라보며 슬픈 민족의 아들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형제가 갈라져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가는 비극이 더 오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낸 이산 가족들의 상처를 보듬고 위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지난 날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밝고 힘찬 미래를 그려봅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는데요. 나이가 더 들면 나는 어떤 고백을 할까 생각했을 때,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소절을 적으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는 그 날에는 내 나이 많아 힘없을지라도 기쁘게 눈 감을 수 있어요.”(아름다운 꿈 / 김명식)
지난 34호 '2025년 10월의 신간 소개'에는 유난히 많은 답장이 왔답니다.
- 어떤 책이 새로 나왔나 살펴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매번 도움이 많이 됩니다. 덕분에 장바구니에 책이 쌓여가네요. (책장에도...) → 도움이 된다니 기쁩니다! 책장과 장바구니 화이팅(?)!
- 알차고 친절한 ‘틈’ 덕분에 장바구니가 무거워졌습니다. 팔레스타인-기독교-그리스도-창세기-생태로 이어지는 소개의 흐름이 하나의 시의적 서사로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이번 틈도 감사합니다. → '시의적 서사'라! '틈' 독자다운 말씀이시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매번 꼼꼼히 읽지도 못하고 지나가지만 뭔가 이번 호는 하나하나 주의깊게 읽어봤어요. 소개해주시는 모든 책을 다 읽을 엄두도 나지 않지만 소개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형도가 어렴풋이 그려지는 느낌이랄까. (이 정도 만족에만 머물면 안되는데ㅠ) 정기적으로 뭔가를 발간한다는 것이 정말 고된 일이라는 걸 알아요. 작은 흔적이 힘이 되었다면 하는 바램에 답장을 남겨 봅니다. → 눈밝은 독자님이라 소개글만으로도 지형도가 그려지는 게 아닐까요! 찾는 수고를 알아주시고 응원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 '틈' 잘 읽고 있어요. 이렇게 선별해 소개해 주시는 게, 한정된 시공간에 머무는 제겐 큰 도움이 됩니다. 덕분에 오늘도 읽고 싶은 책이 생겨 캡쳐해 두었네요. 늘 감사합니다^^ → 읽고 싶은 책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네요. 도움이 된다니 기쁩니다. :)
- 책(신간 중고)을 사지 않기로 한 약속 때문에 한동안 안챙겨보다가 간만에 봤더니 ....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두란노 데뷔(?)라! 마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읽는 중인데 ^^ → 얼마나 책이 많이 쌓였으면 그런 약속을 하셨던 걸지요! 그 약속을 깨고 살펴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앗, 티시 해리'슨' 워런이예요! ^^ → 와, 덕분에 오타를 수정했습니다.
- 엄선한 책들 공유 감사드려요. 다 읽지는 못하지만 신간 소개만 봐도 영혼의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예요. → 이런 답장에 저희도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네요. 감사합니다.
한낮의 햇볕의 온기가 귀해지는 시기네요. 바람 조심하시고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들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음호에는 11월 신간을 가지고 돌아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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