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무릎에는 세로로 긴 흉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미끄럼틀 지붕에서 뛰어내려서 생긴 상처예요. 친구들끼리 상처를 치료해보겠다고 놀이터 옆 화단에서 꽃과 나뭇잎을 따다가 상처에 바른 탓에 더 크게 덧나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약은 약국에서 사야 한다는 것을 아주 톡톡히 배웠죠. 여러분의 상처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요?
틈에서 만난 스카님은 자신의 이름에 ‘흉터’라는 뜻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들거나 부끄럽게 감추기보다, 잘 아문 흉터가 한 사람의 고유한 무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흉터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낸 흔적이라면, 우리는 서로의 흉터를 어떻게 읽어주고 돌볼 수 있을까요. 오늘 스카님의 이야기가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미(유) : 안녕하세요, 스카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스카(스) : 안녕하세요. 스카(Scar)라고 합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역시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많이 생겼어요. 청소년기에는 학교폭력의 피해를 겪기도 했고, 그 밖에도 여러 아픔과 실패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들이 잘 아물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상처 자국을 더 이상 부끄럽거나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저의 고유한 결을 드러내는 무늬로 바라보게 되었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모든 흉터가 사라진 매끈한 몸으로 부활하시지 않았잖아요. 흉터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삶을 살아낸 흔적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상처 입은 사람들의 생채기가 잘 아물도록 보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를 담아 스카로 활동하고 있어요.
유: 이름에 그런 뜻이 있는지 몰랐네요. 흉터는 몸이 지나온 시간을 품은 이야기 같아요. 오늘 스카님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를 잘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열심히 해볼게요(웃음) 스카님이 함께 하고 계신 당인리교회는 청어람의 이웃이기도 하지요, 덕분에 몇 번 밥을 얻어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틈을 읽으실 독자분들께 교회 소개 부탁드려요.
스: 당인리교회는 합정역 근처에 자리한 작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의 행정동 이름은 ‘당인동’인데요. 예전에 중국 당나라 출신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해요. 당시 서울 사대문 밖, 이방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지요. 전 이 이야기가 참 마음에 들어요. 제가 꿈꾸던 교회도 그랬으니까요.
당인리교회는 오늘날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사람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경계와 기준 때문에 교회 문턱을 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안심하고 찾아올 수 있는 교회를 지향하고 있어요. 신앙은 있지만 기존 교회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사람들, 혹은 교회 안에서 상처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마음 편히 머물 수 있기를 바라요.
제가 부임한 이후 교우들과 함께 오랜 대화를 거쳐 교회가 지향하는 일곱 가지 가치를 정리했어요.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호 돌봄과 교제’입니다. 저는 교우 등록 교육을 할 때 종종 저는 목자가 아니고, 여러분은 양이 아니라고 말해줘요. 저 역시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고, 한 명의 교우로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발버둥 치는 사람이니까요. 교회는 일방적인 돌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목회자 한 사람이 공동체를 이끌고, 나머지는 따라가는 방식의 교회를 지향하지 않아요. 또 그만큼 교우들이 교회 운영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지요.

유: 저는 ‘돌봄’ 하면 함께 밥상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서로의 배꼽시계를 체크해 가며 접시를 채울 음식을 준비하고, 숟가락을 사람 수대로 꺼내는 과정만큼 정성스럽게 사람을 돌아보는 시간이 없는 것 같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당인리교회의 밥은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스카님이 가장 자랑할 만한 점심 식사 메뉴가 궁금해요.
스: 맛있게 드셨다니 참 좋네요. 저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식사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도 사람들과 자주 밥을 드셨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신 것도 식탁의 교제였잖아요. 예배 후 함께하는 식탁은 성찬의 연장이라고도 생각해서 식사차림에 진심인 편이에요. 제가 요리하는 것을 원체 좋아하기도 하고요.
당인리교회에서는 3년 전부터 모든 공적인 식사를 비건식으로 하고 있는데요. 기후 위기, 동물권, 건강 등의 이유로 채식을 선택한 교우들이 있었고,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식탁을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에요. 교회에서 많은 비건 메뉴를 시도해 봤지만, 교우들이 가장 좋아했던 메뉴를 꼽자면 여름에는 ‘비건 타코’, 겨울에는 ‘비건 채개장’입니다! 교우들끼리는 언젠가 우리가 맛있게 먹었던 비건 메뉴와 묵상을 담아 책을 내보자는 이야기도 농담처럼 하고 있어요.
유: 책이 나오면 꼭 청어람에서 북토크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북토크 끝에 스카님이 만들어주신 비건 타코를 나눠먹을 수 있으면 더욱 좋겠어요. 당인리교회에는 ‘길손의 식탁’이라는 식사송이 있다면서요? 실제로 밥을 먹기 전에 함께 부르는 곡인가요? 이 곡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궁금합니다.
스: ‘길손의 식탁’은 실제로 식사 전에 기도를 대신 부르는 기도송이에요. 식사 전에는 흔히 대표자가 기도를 하곤 하지만, 저는 거창한 말보다 담백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서로를 축복하는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한 교우가 그런 마음을 담아 노래를 만들어 주셨고, 지금은 당인리교회의 식탁을 여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노래가사가 좋아서 소개하고 싶어요!
길은 멀고 우린 이 자리에 오가던 손들 모여 이 양식을
오늘 식탁에 축복을 또한 이 식탁이 축복임을
차리신 손에 감사를 (다함께: OO님 감사합니다~!)
또한 모인 서로에게 인사를 (다함께: 잘 먹겠습니다!)
유: ‘길손의 식탁’ 노래를 들으니, 당인리교회에서 밥을 먹는 일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의 예배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비건 식탁이 단지 ‘메뉴의 변화’가 아니라 교회의 영성이나 관계 방식까지 바꾸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스: 비건 식탁은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식사를 고민하다가 나온 결론이었잖아요. 그런 실천이 쌓이다 보니, 음식뿐 아니라 공동체의 여러 결정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같은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누가 배제되고 있는지, 누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지를 이전보다 자주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희 교회에는 매주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교우들이 있거든요. 그중에는 중증 장애로 인해 이동이 전혀 어려운 분도 계세요. 그분을 위해서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성찬떡과 포도주를 미리 보내 드리기도 하고요. 오래 자리에 앉아 있기 어려운 교우를 위해 리클라이너 의자를 구입해서 비치해 두었어요. 작년에는 교회 계단과 화장실에 안전손잡이를 설치하기도 했고요. 모두가 함께 먹을 수 있는 식탁을 고민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를 고민하는 과정으로 이어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비건 식탁은 단순한 메뉴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동체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언어같아요. 예수님의 식탁도 그랬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뿐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고 마셨는지를 기억하잖아요.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모두가 환영받으며, 서로의 필요를 살피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교회였으면 좋겠어요.

유: 다양한 취미가 있으신 것으로 알아요. 쌈장도 만드시고! 마라톤도 하시고 스쿠버 다이빙도 하시고요. 제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일들이 더 있을 것 같은데요.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 외에 근래 가장 즐겁게 하시는 일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그 일은 어쩌다 시작하게 되셨나요? 그 일이 스카님의 신앙생활과 연관이 있나요?
스: 여러 취미 중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은 단연 스쿠버 다이빙입니다. 스쿠버 다이빙을 처음 접한 것은 10년쯤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직후였어요. 당시 저는 삶에 무척 지쳐 있었고 깊은 소진을 경험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몇 주간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처음 바닷속 세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다 아래 펼쳐진 풍경은 제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달랐어요. 형형색색의 산호초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들, 거북이와 민달팽이, 새우 같은 작은 생명체들이 조화로운 생태계를 이루고 사는 모습을 보며 계속해서 탄성을 내질렀답니다. 특히 수만 마리의 정어리 떼가 제 몸 주위를 감싸며 지나가던 순간은 지금도 일종의 신비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 경험이 제 신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어요. 첫째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이었고, 둘째는 그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답니다. 한 번은 물속에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내 조카들은 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무척 두렵고 슬펐어요. 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응답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가 기후 위기라고 생각해요. 물속에서 하얗게 죽어가는 산호초 군락들을 보고 나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직관적으로 아실 거예요.
저는 신앙이란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깨달음을 회복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어요.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도 기후 위기와 관련한 책 모임과 세미나를 꾸준히 하고 있답니다. 공동 식사를 비건식으로 준비하는 것도 같은 맥락 때문이고요. 얼마 전에도 환경 주일을 맞아 야외에서 함께 예배하고 플로깅을 했었는데요. 이 모든 게 생태 감수성을 향상하는 것과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관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작년에는 성탄절을 맞아 예배당 내부를 바닷속으로 장식하고 함께 예배드렸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이 비단 인간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모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예배에 담고자 했어요.
유: 저는 종종 스카님의 SNS 계정을 통해 스카님의 대리운전 기사의 면모를 구경하기도 했어요. 바울도 투잡이었다는 말씀이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대리운전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일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신지도 궁금해요.
스: 원래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자비량 목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목회의 방향을 고려했을 때, 기성교회에서 사역하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대리운전은 사실 작년에 처음 시작했고요. 그 외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일들을 병행하고 있어요.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디자인 작업을 하고,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대학 병원 IRB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제 명함에는 목사라는 정체성 외에도 이런 여러 역할들이 함께 적혀 있답니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라… 날마다 에피소드들이 쏟아지지만, 최근 들어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방대한 성산업의 규모와 남성 중심의 음주문화입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여성 종업원이 있는 업소를 찾는 손님들을 태우다보면 이 사회의 한 단면을 매우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되거든요. 대리운전은 제게 사회를 관찰하는 하나의 창 같아요.
뜬금없지만, 대리운전을 하면서 저는 제가 교우들과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교회 공동체의 소중함을 더 많이 느끼고 있어요. 사람을 소모하고 대상화하는 문화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지 질문하게 돼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가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것도 군대에서였어요. 제가 장교로 군 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저는 구조와 문화가 한 사람을 얼마나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목격했거든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많은 남성들이 군대라는 공간에서 위계질서와 가부장적 문화를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내면화하곤 해요. 저는 그것을 나쁜 방향으로 작동하는 ‘공동체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히려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어요. 사람을 더 폭력적으로 만드는 공동체가 있다면, 반대로 사람을 더 나은 존재로 변화시키는 공동체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질문을 오랫동안 붙잡으면서 목회자가 되고자 마음먹었어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존 사회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교회 공동체를 이뤄가고 싶어요.

유: 여러 역할을 하고 계시잖아요. 목회자이면서, 생계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이기도 하고, 또 한 사람의 생활인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여러 자리를 오가다 보면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 스카님이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고민은 무엇인가요? 그 고민 앞에서 스카님을 지탱해주는 루틴이나 기도 같은 것이 있나요?
스: 사실 많은 역할과 일을 병행하다 보면 일종의 자아분열을 경험하기도 해요. 분절되고 조각난 노동을 이어가는 시간이 스스로를 하나의 존재로 통합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각각의 역할이 요구하는 언어와 태도가 조금씩 다르니까요. 여러 케릭터중에 진짜 내 케릭터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드는거죠. 저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것 같아요. 서로 다른 나, 서로 다른 정체성, 서로 다른 일터와 삶터 모두에 함께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요. 하나님은 제 삶의 서로 다른 궤적과 모순된 선택, 부끄러운 과거와 자신 없는 현재, 그리고 불안한 미래까지도 다 품고 계신 분이라고 믿어요. 그 믿음이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묵상기도를 배울 기회가 있었어요. 그래서 종종 침묵 가운데 머물며, 내면 깊은 곳에서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려고 노력해요. 제가 차고 다니는 스마트워치에는 진동에 맞춰 천천히 호흡하도록 도와주는 기능이 있는데요. 이동 중에도 그 진동에 맞춰 길게 심호흡을 하며 짧게 침묵기도를 하곤 해요. 아주 사소한 습관이지만, 분주한 일상 속에서 저만의 호흡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유: 처음 자기소개에서 흉터 이야기를 들려주신 게 계속 마음에 남아요. 스카님은 흉터를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치열하게 삶을 살아낸 흔적이자, 고유한 결을 드러내는 무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오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당인리교회도, 스카님의 목회와 생활도, 서로의 무늬를 지우지 않고 함께 읽어가는 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자기 삶의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 아문 무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떤 공동체와 어떤 돌봄이 필요할까요? 스카님에게 어떤 경험이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스: 상처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용납과 지지라고 생각해요. 상처가 아물기 전에는 아프기만 하고 아무런 여유가 없잖아요. 그 시기를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사람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설명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 주고, 회복이 더딜 때도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요.
저는 이십 대 후반에 미국에 있는 선교단체에서 1년 정도 스태프로 지낸 적이 있었는데요. 영어가 낯설다 보니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그곳에는 해외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돌아온 은퇴 선교사들도 계셨는데, 제 더듬거리는 영어를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들어 주셨어요. 돌아보면 그곳에서의 시간이 온전히 제 내면에 집중하고 회복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뒤에는 또 다른 돌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나에게 생긴 흉터를 함께 어루만지며, 그 흔적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이요. 저는 과거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과거는 지나간 일이지만, 그 의미는 현재의 힘으로 계속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고 믿어요.
상처받았던 내가 말하기 시작하고, 또 그것을 진심으로 들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과거의 나도 조금씩 구원받는다고 느껴요. 저에게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짝꿍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급 사랑고백이 되어 버렸네요. 후후.
유: 스카님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스: 혹시 ‘장송의 프리렌’이라는 만화를 보셨나요? 이 만화는 용사 힘멜이 죽은 뒤, 그와 함께 모험했던 엘프 마법사 프리렌이 옛 동료들과 걸었던 여정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에요.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가는 프리렌은 그 여행을 통해,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사랑을 뒤늦게 이해하게 돼요. 프리렌이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는 것은 바로 힘멜이 생전에 보여줬던 용기와 다정함, 정의로운 선택들이에요. 저는 힘멜이라는 캐릭터와 예수가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훗날 사람들이 예수를 기억하면서 영감을 얻는 과정까지도요.
저는 물론 마왕을 물리치지는 못하겠지만, 남아있는 교우들 중 하나라도 ‘아, 스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하고 생각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아요. 아, 갑자기 눈물 난다.
유: 인터뷰의 마지막 순서는 스카님의 신앙 소스 리스트*를 들어보는 시간입니다. 스카님의 신앙 여정에 영향을 준 세 가지의 소스 리스트를 들려주세요. 소스는 책이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소스 리스트는 2021년 1월에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재미공작소의 오프라인 문학 행사의 이름입니다. 소스 리스트에서 호스트 작가는 자신의 첫 시집 혹은 첫 소설집 탄생에 영향을 준 영감의 원천 열두 가지를 '소스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해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번역, 권김현영 해제, 문학동네 펴냄, 276쪽, 전자책 있음 [도서정보보기]
처음으로 여성주의를 접할 때 읽은 책이에요. 모든 이에게 추천하고 싶지만, 특히 여성주의에 처음 관심 갖는 남성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에요. 쉬운 언어로 풀어냈지만 그 안에 있는 깊은 통찰은 결코 가볍지 않아요.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상상하도록 이끌어 주는 책입니다.
느린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롭 닉슨 지음, 김홍옥 번역, 에코리브르 펴냄, 580쪽 [도서정보보기]
여러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책들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재미있고 밀도 있게 읽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너무 빠르거나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이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 책은 제게 생태와 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세상을 조금 더 넓고 깊게 이해하고 싶은 분들에게도 추천합니다.
은유신학
샐리 멕페이그 지음, 정애성 옮김, 다산글방 펴냄, 332쪽, 절판 [도서정보보기]
저는 대학 시절, 소위 ‘하나님 음성 듣는 법’을 강조하는 선교단체에 있었어요. 내가 경험하는 많은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라고 믿으며 성장했지요. 그런데 이 책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말하는 일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어요. 우리는 언제나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과 신학 역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로 그 한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요. ‘은유 신학’은 제게 신을 생각하는 법, 신과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신학을 바라보는 틀 자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딱 한 가지 문제라면, 이렇게 좋은 책이 절판이라는 것.
때마다 쉴만한 그늘을 찾게되는, 무더운 날이 이어지는 요즘입니다. 틈 독자님들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마다의 속도로 존재하며 일상을 일구는 모든 분을 응원하겠습니다. 다음호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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