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서울 한복판에서 조용한 사건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굿즈도 유명 저자의 북토크도 없이 오로지 책만 존재하는 북페어의 사전 예매 티켓 600장이 순식간에 마감된 것입니다. 북페어 참여자들의 열띤 후기도 화제였습니다. 상품의 소비자가 아닌 텍스트 앞에 선 독자로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왔습니다. 바로 국내 첫 논픽션 북페어 '디스이즈텍스트'의 이야기입니다. 논픽션 장르가 한국에서 이토록 뜨거운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소식에 놀랐고, 이 멋진 기획이 대규모 북페어의 변방에 있던 논픽션 출판사와 기획자들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이번 호 〈틈〉의 큐레이션은 '디스이즈텍스트'를 공동 기획한 출판사 이김의 김미선 대표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논픽션의 존재 가치와 매력을, 논픽션 독자로 살아가는 일의 기쁨을 일깨워줄 다섯 권을 함께 만나 보시죠.

🖋️ 큐레이터 : 김미선 | 논픽션 전문 출판사 이김의 대표. 올해 초 열린 국내 최초의 논픽션 북페어 &디스이즈텍스트&의 기획자로 참여했다.
A. 김애란 작가님이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해서 하셨던 말씀이 있죠. ‘AI는 망설임이 없다’고요. 아마 많은 분들이 그 말씀을 인상적으로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LLM은 지체 없이 정답이란 걸 내놓지만, 인간의 사유는 ‘고민과 망설임’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국 개인을 형성한다고 믿고요.
정보의 중심축은 확실히 책에서 웹으로, 또 생성형 AI로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속도와 효율성만 따진다면 책은 결코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죠. 하지만 논픽션의 가치는 발견된 사실과 이를 치열하게 해석한 저자의 사유를 같이 마주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네이버 검색을 통해 그 순간에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긴 하지만 거기에서 통찰을 얻지는 않잖아요. 저자의 문장을 따라 고뇌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비효율적인 읽기’는 우리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흔적을 남깁니다. ‘디스이즈텍스트’를 가득 메운 이들은 이러한 비효율을 통과하며 인간다움과 나다움을 회복하고자 했던 열렬한 목격자들이었습니다.
<틈>에서는 보통 다섯 권의 책을 추천하지요. 하지만 논픽션 추천이 성공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세상은 넓고 인간의 관심사도 그만큼 넓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논픽션을 만나는 방법’을 먼저 소개한 뒤 제가 읽으며 좋았던 책을 몇 권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논픽션을 손에 잡기 어려우셨던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이제 저와 함께 의도적으로 느리고 비효율적인 논픽션 읽기, 같이 한번 경험해 보시지요.
[방법 1] 도서관: 마구잡이로 읽으며 취향 탐색하기
내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지금 내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관심사에 맞는 책이 가장 많은 곳은 도서관! 장서실에 가셔서 ‘마구잡이로’ ‘아무 이유없이’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쌓아 놓고 읽어 보세요. 더 깊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대출하거나 서점에서 구매해서 읽으면 됩니다. 읽고 좋았다면 그 주제나, 저자, 혹은 출판사의 책 등을 더 찾아 보셔도 좋아요.
취향을 찾으려면 뭐든 많이 접해 봐야 하듯,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베스트셀러도 읽어 보시고, 인플루언서가 추천한 책도 보시고, 밀리의 서재 같은 플랫폼에서 추천하는 매니악한 책도 한번 슬쩍 보세요. 서문부터 결론까지 다 읽고 지식이나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내려놓고, 지금 이 문장들이 말하는 사실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할 작은 ‘틈’을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독서가 될 것입니다.
저는 2~3시간 정도 시간을 잡고 노트와 펜을 챙겨서 사무실 근처에 있는 마포중앙도서관에 갑니다. 장서실에서 눈에 띄는 책들을 10권 정도 골라옵니다. 그런 다음 책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메모를 합니다. 앞뒤표지를 먼저 살피고요, 차례와 서문을 읽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은 왜 골랐는지, 저자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이 책을 쓰는 데 이르렀는지, 표지는 충분히 매력적인지, 본문 디자인은 가독에 도움이 되는지, 문장은 잘 읽히는지 (아닌 것 같으면 내 문장으로 새로 쓰기도 하고) 등 파라텍스트 읽기를 합니다. 좋았던 책은 오른쪽에, 마음에 덜 드는 책은 왼쪽에 놓는 방식으로 내 선호도를 가시화할 수도 있습니다.

[방법 2] 동네 서점: 인간-알고리즘 활용하기
‘디스이즈텍스트’가 수많은 독자의 환호를 받았던 데에는 책을 매개로 한 사람 간의 대화가 주효했다고 생각합니다. 북페어는 1회성이지만 그것을 일상에서 가능하게 하는 곳이 바로 동네서점인데요. 작은 서점 주인들은 자신의 철학과 안목이 담긴 책들을 큐레이션해 들여 놓습니다. 슬쩍 둘러보는 것만으로 그의 취향을 알 수 있죠. 그게 나의 현재와 맞닿아 있다면 대화를 시도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요즘 나의 고민이 무엇인지, 어떤 분야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넌지시 말을 건네보세요. 화면 속 인공지능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시선으로 책을 골라줄 것입니다. 그렇게 맞춤 추천을 받고 나면 어떻게든 책을 읽게 됩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왜 이 책을 추천했는지 궁금해하면서요. 그게 좋았다면 이제 그 서점의 단골이 되셔도 되겠고요, 아니면 다양한 작은 서점들을 다니며 취향의 범위를 넓혀 가셔도 좋습니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아침달 펴냄, 188쪽, 전자책 있음 [도서정보보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살면서 어떤 순간에 아름다움을 느끼시나요? 예술 분야의 책들은 일상에서 쉽게 생각하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조금은 생경하지만 기분 좋은 흔적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공연예술이론을 공부한 저자의 일기 같기도 하고 공연예술 소개서 같기도 한 이 책은, 이방인으로서의 나, 찰나로 존재하는 공연예술에 대해 낯선 시선으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이론가들의 글 특유의 분위기도 분명 있지만, 전반적으로 저자의 문장 하나하나가 대단히 촘촘하고 단단합니다. 마치 작가가 옆자리에 나를 앉혀 놓고, 혹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말해주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저자가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흘러가는 것이 아까워 페이지를 쉽게 넘기지 못하는 책이기도 하고요.
이 책은 저에게는 누군가에게 책을 권하거나 선물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 보는 책이기도 합니다. 손에 잡히는 컴팩트한 사이즈, 뭔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촉감(겉싸개가 천으로 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만), 책을 펼치면 보이는 본문도 글의 성격과 무척 잘 어울리게 군더더기 없이 디자인되어 있어요. 주석의 위치나 분량이 여타 책들과 좀 다른데, 그게 또 이 책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문학과 지성사 펴냄, 344쪽 [도서정보보기]
사회학 분야의 서적은 개인의 결핍이나 고통이 온전히 나만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사회 구조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최근 글로벌 출판계에서 가장 뜨겁게 조명받는 흐름인 ‘자기이론(Autotheory)’의 정수를 보여주는 탁월한 저작입니다.
세계적인 석학이 된 저자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인터뷰하며 오랫동안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의 뿌리이자 부모의 출신 성분인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계급적 환경을 부정하고 탈출하고 싶으면서도 지독하게 얽혀 있는 그 애증과 부채감이 책의 뼈대를 이룹니다. 자전적 에세이의 내밀한 고백과 날카로운 사회학적 분석이 절묘하게 교차되어 있어, 학술 서적에 가까운 책임에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여정
피터 고프리스미스 지음, 이송찬 옮김, 이김 펴냄, 432쪽 [도서정보보기]
자연과학 논픽션은 인간 중심의 좁은 시야를 확장하며 우리 존재의 현재를 겸허하게 되짚어보게 만듭니다. 『생명의 여정』은 저희 출판사가 정말 좋아하는 피터 고프리스미스의 책인데요. 이 책의 가장 명징한 통찰은 지구가 생명을 만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많은 생명체가 남긴 흔적들이 모여 지금의 지구를 빚어냈다는 역발상에 있습니다. 인간 역시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흔적을 보태는 존재일 뿐이라고요.
이 책은 문어라는 매혹적인 생물로부터 촉발된 의식 탐구 3부작(『아더 마인즈』, 『후생동물』)의 마지막 책으로, 전작들이 ‘과연 동물에게도 의식이 존재하는가’에 천착했다면, 이 책은 “우리 인간은 앞으로 지구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철학적 결론을 제시합니다. ‘단서를 찾아 몸을 움직이는 몇 안 되는 철학자’라고 뉴욕타임스가 극찬한 저자 피터 고프리스미스에 대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철학자다운 깊이 있는 생각, 과학자다운 지혜로운 탐구, 거기에 아름다운 문장까지 구사하는 완벽한 저자라고요. 문어가 내미는 손에 붙들려 그의 글 안에서 유영하다 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 이는 파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 호의 큐레이터 김미선 님이 소개해주신 논픽션의 세계가 어떠셨을까요? 글을 따라가며 어떤 부분이 흥미로웠는지 궁금합니다. 😆
지난 호인 선미님의 인터뷰에 답장을 주셨어요!
- 낯설지만 두렵지 않은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주는 인상을 남긴 인터뷰네요! 소스리스트 추천도 좋았고,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제게 용기를 주네요 ㅎ
누군가의 진솔한 이야기가 용기를 주기도,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게 한다는 말이 오늘따라 더욱 마음에 와 닿네요. 앞으로도 자기만의 속도로 일상을 보듬는 세속성자를 만나 성실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다가오는 6월을 잘 맞이하시길 바라고요, 다음 호엔 5월의 신간 소개와 함께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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