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김해서입니다. 본가에서 이십일이 넘는 꽤 긴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부모님이 반찬과 생필품을 한가득 싸주신다는 것을 말리고 이번만큼은 빈손으로 올라왔는데요. 그래도 마음은 충만합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사랑하는 이들 곁에서 사랑을 넘치게 느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회복된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지요. 실제로 만성으로 굳어질 것만 같던 위염도 진정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은 어떤 속성의 감정인가요? 뜨겁게 타오르는 호기심, 지고지순한 한결같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보게끔 하는 능력, 아찔하고 도전적인 상황, 눈물 나는 희생 등 여러 이미지가 떠오르는데요. 그런 겹겹의 이미지들에 쌓여 오히려 사랑의 본령이 아득하게만 느껴질 때도 있죠. 사랑 자체를 정의하는 것보다는,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부터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스스로 잘 알고 있다면, 일과 생활에 치여 혼란하고 아픈 와중에도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일도 생활도 결국 ‘내가 인생에서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유지하는 영역이니까요. 저는 오늘 제 아빠에게 배운 ‘사랑의 힌트’를 나누겠습니다. 함께 여러 이야기 공유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사랑하면 그만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였다. 서울에서 해서가 내려왔고, 그래서 온 가족이 함께하는 나의 생일이다. 다른 이들은 생일날 소고기미역국을 먹는다지만, 해서는 소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해산물을 넣고 미역국을 끓였다. 내 생일이라도 생일상을 차리는 건은 내 몫이다. 지난밤에 아내가 미리 끓여 놓는다는 것을 못 하게 말렸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아내가 잠시라도 더 잘 수 있게 아침은 내가 차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니 오늘도 내가 조금 일찍 일어나 준비하면 그만이다. 내가 끓인 미역국이지만 아내가 끓여준 것으로 생각하며 먹으면 되니까. 내가 원하면 아내가 얼마든지 서둘러 요리하겠지만, 아내가 좀 더 자는 것이 내가 더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경계가 허물어진 어느 지점이라는 걸 우리는 서로 잘 안다.”
아빠의 페이스북에는 종종 일기처럼 짧은 글이 올라온다. 어쩔 수 없이 AZ美가 폴폴 풍기는 유우머 글도 있고(이를테면, “처서가 지났는데 ‘해서’가 되지 않는다~ 껄껄” 같은…) 살벌한 정치 얘기도 한 번씩 폭탄처럼 등장하지만, 대체로 사랑하는 대상이 담긴 이야기들이다.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아들딸, 사랑하는 고양이, 사랑하는 장모님, 사랑하는 형제들, 사랑하는 하늘, 사랑하는 음식, 사랑하는 강변 등. 그리고 때로, 발췌문으로 옮겨온 첫 문단처럼 ‘사랑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한다. 스스로 끓인 생일 아침상도 정성을 다하는 이유에 조금의 섭섭함이나 이해타산적인 태도가 관측되지 않는다.
아빠는 그런 사람이다. 가게 점원이 격무에 지쳐 쌀쌀맞은 태도로 응대하더라도, 나이 든 이라 무시하며 건성으로 대하는 전화 상담사를 만나도, 아끼던 길고양이가 사라져 슬픈 와중에도, 엄마와 말다툼이 벌어져도, 아빠는 하던 대로 행동한다. 반격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으며, 다른 고양이들에게도 잘해주고, 엄마의 아침상을 차린다. 당신의 신조는 “지금 사랑하면 그만. 지나치게 재지 마라.” 그러니까, 나의 아빠는 사랑받으려고 애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 여기고 일찌감치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
마음을 줄 때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준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는 데 혈안이 된 세상에서 그것은 합리적인가?
아빠가 내 곁에 있는 한, 사랑에 관한 행동가로서 아빠를 이길 자는 없을 것 같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관식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우며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혁명적이고 감동적으로 수행하는 인물로 그리는데, 내겐 전혀 놀라울 게 없는 일상의 장면들이었다. 사랑이 몸에 익은 자들은 상처받는 것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이 봤을 때 무식해 보일 정도로 ‘재지 않고’ 앞만 보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몸담은 이웃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도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냉장고에 작은 캔 음료를 항시 넣어두면서 택배기사와 경비아저씨를 챙기고, 덥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모두가 꺼리는 선산의 벌초를 기꺼이 도맡아 해결하고, 동네 고양이뿐만 아니라 장모님(나의 외할머니) 댁을 찾는 고양이 패밀리가 먹을 사료도 늘 체크한다.
아빠에게 사랑은 모호하고 거대한 신념이거나 죽어서야 알 수 있는 무한한 개념이 아니라, 초초분분 바로 행하고 나누는 방식으로 생생하게 눈앞에 실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동하는 사랑 그 자체가 당신에게는 이미 응답이요, 동력이고, 어쩌면 나의 산문집『답장이 없는 삶이라도』의 제목도 내가 당신의 딸이기 때문에 태어난 문장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큰 불평 없이 성실하게 사랑만 하는 사람이 되려면 멀어도 한참은 먼 것 같다. 일터에서든 일상에서든. 세상의 인정과 사랑을 추구하고,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없으면 속상해 울기도 하며, 말이나 마음이 오해받을 때 억울하고 두렵다. 타인을 위해 선의를 갖고 싶다가도 지독한 적개심을 품거나 의심을 놓지 않을 때 상심하며, 타인이 내게 베푼 선의마저도 언젠가는 그에 준하는 무언가로 갚아야 한다고만 여길 때도 있다. 하지만 순도 높은 사랑은 전염된다. 사랑은 사랑으로 퍼진다. 본가에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 역시 순해진 걸 발견하기 때문이다. 실패해도 그것이 실패만은 아니고, 사람들이 마음이 몰라줘도 내가 날 더 알아주기로 결심하고, 내 곁에 둘 정말 필요한 이가 누군지 알아보는 시력이 좋아지며, 계산하지 않고 솔직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그 상태만으로도 손해는 이익이 되는 것이다.
정다연 시인의 시집 『여름 대삼각형』에는 「빛 헤엄」이라는 시가 있다. 그 시의 시작과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는 말했다 파도가 두려워지기 전까진 파도를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까진 세상을 무서워하지 마라 할머니의 뼛가루를 바다에 뿌린 뒤 자주 바다로 나가 헤엄을 쳤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할머니가 남긴 말을 이해해보려고
(…)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까진 세상을 무서워하지 마라 사랑이 끝장나기 전까진 사랑을 끝장내지 마라 검은 암초에 부딪혀 뺨이 찢겨도 해초가 종아리를 휘감아도 두렵지가 않았다 세계를 곱게 빻은 빛 가루가 할머니라면 그것이 훨훨 한 줌처럼 가볍다면 도무지 세상이 무서워지지 않았다”정다연, 〈빛 헤엄〉, 여름 대삼각형
이 시의 화자처럼, 나도 그저 헤엄칠 일이다. 제대로 된 보호도 받지 못해 슬프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빠도 이렇게 걷고 있는 세상이니, 내게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사랑에 뛰어들 용기, 그리고 상처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순수한 열정의 씨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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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더이벤트😇 책 <내 작은 정원 이야기>
“당신의 마음에 남아있는 초록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내 작은 정원 이야기>는 네 평 남짓의 베란다에서 시작된 선요님의 정원 기록입니다. 물을 주고 기다리고 새 잎이 돋아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식물을 돌보는 일이 곧 나를 돌보는 일과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닳게 되죠. 어쩌면 식물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순간은, 깊은 숲만이 아닌 가까운 화분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 남아있는 초록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바쁘고 일상 속에서, 조용히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
✔ 책 소개: <내 작은 정원 이야기>
수많은 이들의 일상에 초록과 고요를 선사한 19만 팔로워 선요의
도시 아파트의 한 베란다에서 시작된 아주 사적인 정원 이야기, 그 6년의 조용한 기록.
“말 없는 생명과 함께하는 삶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요구했고그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돌려주었다.”
아파트 베란다의 네 평 남짓한 공간을 정원이라 부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화분 두어 개로 시작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식물이 조금씩 늘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그곳은 분명한 이름을 가진 공간이 되어 있었다. 도시 아파트의 한 베란다에서 시작된 아주 사적인 정원의 탄생기이자 넓은 마당이나 완벽한 계획이 없어도 평화로운 초록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정원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초대장과 같은 〈내 작은 정원 이야기〉는 식물을 좋아하고 집을 가꾸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과 맞닿아 있다고 믿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바쁜 일상에서 나만의 리듬을 찾는 조용한 시작을 안내한다.
✔️이벤트 선물: <내 작은 정원 이야기> (5명)
- 추후 당첨자에게 성함, 연락처, 주소 정보 받아 전달
✔️이벤트 참여 방법:
- 인스타그램 댓글로 “당신의 마음에 남아있는 초록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질문에 답해주세요!
- 인스타그램 @sideseoul 과 @book.people.house 를 팔로우하면 당첨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벤트 기간:
- 이벤트 마감: 9월 9일(화) 오전 11시
- 당첨자 발표(5명): 9월 10일(수) SIDE 인스타그램에서 개별 연락 드립니다.
🔭 보너스 코너! 요즘 리스트 by 해찬
💿 now playing -
해찬 : 봄과 가을을 정말 좋아해요. 입추가 지나면 "어? 가을인가?"를 입에 달고 지내며 가을의 흔적을 찾곤 하죠. 요 며칠 비가 내린 뒤로, 정말 가을바람이 불어와요. 집을 나서며 따뜻한 햇빛과 서늘한 바람을 맞을 때, 이어폰을 꼽고 이 노래를 듣는 순간을 정말 사랑합니다. 아끼는 가을의 한 장면을 공유해 보아요🍂
해찬 : 어렸을 때 부터 엄마의 영향으로, 조용필 선생님의 노래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최근에는 KBS에서 진행하는 조용필 콘서트 티켓팅에 참여하기도 했죠. 아쉽게 실패했지만, 덕분에 조용필 선생님의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듣고있는 요즘이에요. 특히 <걷고 싶다> 이 노래를요. 가사 속 "난 널 안고 울었지만 넌 나를 품은 채로 웃었네"라는 말을 들으면 후회 없는 베풂과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느껴요. 오늘이 후회로 남지 않도록,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게 돼요.
🎬 now watching -
컨택트 - 드니 빌뇌브 (약 스포 주의)
해찬 : 바쁜 일정의 며칠을 마치고 오랫동안 보고 싶던 영화를 봤어요. 외계인과의 대화를 주제로 하는 SF 영화 <컨택트>요. 영화 중반, 이런 대사가 나와요. "당신이 외국어에 몰입하면, 사고방식도 그 언어를 따라 바뀐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그림을 그리며 느꼈던 자유를 떠올렸어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익숙한 단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때, 오히려 더 풍부한 기록이 되는 듯하거든요. 다른 언어를 배우기는 부담이 되어, 그림이나 손동작처럼 가벼운 방식으로 일상을 표현하고 있어요.🙌🏻
💫 today's quote -
해찬 : 기후 변화로 가을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리지요. '작년보다 올해가 더 더운 것 같아!' 하는 대화도 심심치 않게 나누고요. 물론 여전히 땀이 주륵 흐르는 날씨지만, 그 안에서 가을의 흔적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평소 무심했던 감각을 열고 파란 하늘에서, 혹시 몰라 긴팔을 챙겨나가는 마음에서, 바깥 산책을 하고 싶어지는 저녁 공기에서 가을을 찾아보세요. 꽤 긴 가을을 보낼지도 몰라요. 앞서 한 차례 언급하기도 했던, 가을을 부르는 주문을 외우며 이번 뉴스레터를 마무리해 봅니다.
"어? 가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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붱
에세이 파트에서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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