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 능력의 시대

007 스카이폴에 부쳐

2026.08.22 | 조회 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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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전기 없던 시절을 겪어보셨나요? 정전이 자주 있었던 시기 정도는 기억하실 겁니다. 정전이 된 어느 날, 저희 집에 놀러 왔던 친구와 친구 누나가 양초에 불을 켜고 비바람을 막는다며 은박지로 바람막이를 만들어 집으로 향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강한 인간이었습니다. 양초는 물론 집 밖에 나가자마자 꺼졌겠죠.

 

인터넷이 사라진 날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8년 전이니 기억에 남으셨을지도요. 그날 쓴 제 기사로 그날의 급박함을 보여드립니다.

 

https://byline.network/2018/11/26-30/

 

오늘은 주말을 맞아 곧 넷플릭스에서 사라진다는 007: 스카이폴 영화를 봤습니다. 007 영화는 상상 속 첨단 무기가 나오는 것이 특징인데, 가끔 이 첨단 무기가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임스 본드를 곤경에 빠뜨리고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되죠. 007: 스카이폴은 첨단 무기가 하나도 없는 제임스 본드가 단신으로 임무를 처리하는 내용을 다룹니다.

 

AI 시대가 되면서 저는 기획자, 개발자, 그로스 마케터의 역할을 모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되었죠. 제가 잘 아는 회사에서는 기획자들을 모두 기발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리더군요. 적절한 변화라고 봅니다. 앞으로는 AI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다른 역량보다 중요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AI는 현재 전기나 인터넷 같은 인프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과 성격이 조금 다르죠. 전기는 아껴 쓰는 정도가 끝이었다면 인터넷은 잘 쓰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AI? 쓰는 사람에 따라 활용도 차이가 엄청나죠.

 

그런데 여러분, AI가 사라지는 상황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지금 가끔 그럴 때가 있긴 하죠. 클라우드플레어가 터진다든가, 클로드 서버가 바쁘다든가 하는 날. 그런데 이건 몇 시간에 불과하고 클로드 스킬을 챗GPT에 불러와서 써도 되고, 오픈워크 같은 무료 프로그램에 이관해도 됩니다.

 

그런데 인터넷과 더불어 AI가 전부 사라진다면요? 여러분은 글을 쓰고 자료를 정리하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마케팅 예산을 집행할 수 있으실까요? 저는 글쓰기 외에는 큰 자신이 없습니다. AI로 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이 AI 활용법이지능의 위탁이라고 봅니다.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작가에게 감정을 위탁하듯이, 우리는 지능을 빌려 쓰는 수준이 아니라 위탁하고 있는 셈이죠. 역사상 가장 저렴한 외주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걸 저에게 하라고 하면? 저는 원래부터 제 전문 분야였던 글과 유튜브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AI가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지금 국가에서도 국산 AI를 키워서 엑소더스에 대비하고 있으니 다소 역량 차이가 있더라도 비슷한 작업을 대체해서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의 순수 역량이라고 보긴 어렵겠죠. 없어지면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요.

 

지난 WWDC에서의 애플의 AI가 인상적이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실 애플은 AI에서 내세울 게 별로 없긴 합니다만, 글을 대신 써준다기보다 글쓰기를 도와주겠다고 했었죠. 궁여지책일지도 모릅니다만, 지능을 위탁해버리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좋은 해법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AI는 유능한 외주업체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 제가 AI에게 대신 쓰게 만들고 있는 코드들을 들여다보고 이게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 코드인지 물으면 AI는 대부분 단계별로 학습을 시켜줄 것입니다. 이렇게 해 나가면 제 원천 실력이 늘어나는 거겠죠. 데이터 분석도, 디자인도, 영상 편집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AI가 좋은 결정을 내리겠습니다만, 그것이 최고의 결정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 마케팅 분야에서는 인간의 감과 결정이 더 뛰어날 때가 많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AI가 성숙해진다고 해서 인간의 능력이 퇴화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펜으로 글을 쓰던 시절에도, 워드에 글을 쓰는 시절에도 좋은 작가는 항상 나왔습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건데, 생각까지 AI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더 훌륭한 작가가 많은 양의 글을 낼 수도 있겠죠. 이런 경우 초창기의 질적 하락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틱톡이 나오면서 영상 찍기가 쉬워져 롱폼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던 콘텐츠가 나오듯이 AI 시대에는 AI라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

 

우리는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운동을 합니다. 저는 작정하면 하루에 1,000보 미만으로 걸을 자신도 있습니다만, 울릉도에 가서 산을 타고 몸이 건강해지는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원천 능력의 기쁨이라니. 필수까지는 아니겠지만 원천 능력을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AI 활용 방법은 상당한 차이가 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물론 AI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원천 능력을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의 결과물 차이는 별로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과 결과물을 활용하는 결정 사이에 큰 괴리가 생길 것이라고 봅니다. 좋은 글을 이미 쓰고 있던 사람이 AI가 만든 글을 잘 판단할 수 있듯이요.

 

저는 저녁에 주로 시간을 소비하기만 합니다만, 앞으로는 이 원천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시간을 한두 시간씩 주려고 합니다. 저에게 모든 AI가 사라져도 저는 제임스 본드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권총을 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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