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8월 20일 화요일 오후 4시다. 태평양 물이 넘실 넘실 거리는 크루즈 10층 카페에 앉아서 글을 간단히 적어본다. 7월 초인가, 남편과 금요일에 당일치기로 샌디에이고에 갔다가 얼떨결에 크루즈 예약을 했다. 실은 UCLA EMBA를 일년정도 미루기로 결정하고 난 뒤, 학기가 시작하는 주에 잡아두었던 휴가 기간이었는데, 그냥 날리기가 아까워서 질렀다. 8월 정도 되니 정말 스태미나가 딸리기 시작했다. 다들 휴가를 가는데 왜 가는지 알거 같았다. 막판 스파트를 달려야지, 오예.
왠지 3박 짜리 크루즈는 별로일 거 같고 그래서 캘리포니아 남쪽으로 쭈욱 길게 가다보면 그 남쪽 끝에 있는 Cabo San Lucas를 찍고 Ensenada를 거쳐 돌아오는 5박 6일짜리 코스로 잡았다. 이번 휴가에는 인터넷도 거의 하지않고, 남편과 아이에게 집중하는게 목표다. 우리 아이가 어떨 때 꺄르르르 웃는지 (내 아들은 근데 정말 잘 웃는다), 어떤 운동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더 신경써서 먹여야 할지, 현재 상태 점검이라고나 할까. 아이는 한국말을 이제 기가막히게 하는데 (한국말을 주입하는 부모 덕분에), 영어 알파벳은 어린이집에서 마스터했다. 따라서 일상 대화는 한국어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잘하는데, 쓰거나 읽지는 못하고, 영어는 말은 잘 못하는데 단어나 짧은 문장은 더듬더듬 읽는다. 두개의 언어를 잘하는 게 디테일을 따져보면 같은 레벨로 성장하는게 아닌거다.
시간이 많이 없어서 아이에게 좋은 음식보다 내가 후다닥 빨리 해먹이기 좋은 음식을 많이 먹였다. 수영장에 가는 것도 내 시간이 맞아야 같이 갔고 (따라서 토요일 수업을 대부분 갔다), 내 업무가 마쳐야 아이를 데리고 오기 때문에 어린이집에서 6시에 데려오는게 항상 우리 가족의 일상이었다. 아이가 다행히 어린이집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에 제일 안정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따라서 멕시코 카보, 엔세나다가 나한테 중요한게 아니고, 우리 도윤이와 우리 인모가 그간 어떤 성장 경험을 하는지 공유하고 관찰하는게 중요했다. 그런데 이게 왠걸. 나는 사람들이 크루즈크루즈 하는데 실은 이 경험에 압도당했다.
첫째. 태평양의 사이즈. 이건 말로 표현이 안된다. 거대한 크루즈도 태평양에 떠있는 그냥 그저 그런 고래 정도 밖에 안된다. 밤에 찾아오는 고요함이 어마어마하게 무섭고, 낮에는 얼마나 물이 파란지 이 장관에 압도당한다. 해변가에 있는 바닷가 풍경 좋은 자리는 예약하기도 어렵고 비싼데, 여기는 창가를 중심으로 앉으면 대부분 이 장관을 시시각각 즐길 수 있다. 어제는 게다가 보름달이 뜨더라. 남편과 얘기하다가 문득 라이프 오브 파이 라는 영화가 생각났고, 정말 인간은 개미새끼만도 못한 존재다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다 자체만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복잡 다단해서, 어떤 현상이든 벅차더라도 내가 해석하거나 내가 받아들이는데 달려있다라는 걸 다시 생각했다.
두번째. 크루즈 안의 경험이 어마어마 하다. 이건 떠다니는 빌딩인데, 호텔, 레스토랑, 피트니스, 스킨케어, 액티비티 등등을 다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리조트다. 이 경험을 토대로 나는 다음에 꼭 알라스카를 가봐야겠다, 디즈니 크루즈도 타 봐야겠다 라는 마음을 먹었다. 참고로, 아이들을 맡아서 베이비시터를 해주는 프로그램이 크루즈마다 있다. 아이를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아이도 그 곳에서 책도 읽고, 시간마다 다른 프로그램을 경험한다. 갑자기 생긴 둘만의 시간에 인모랑 나랑 실은 당황했다. 그런데 좋았다. 오늘 아침엔, 여기 스카이 점프라고 방방이 타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서 우리 가족 1시간 정말 땀 삐질삐질 나게 놀았다. 그리고 나서 야외 수영장, 자쿠지에서 또 신나게 놀았다. 어제는 야외 수영장 중에 물놀이를 기깔나게 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아주 잘 놀고... 그리고 정말 잘 잤다.
셋째. 음식. 내가 요리할 필요도 없고, 절절 매면서 아이 입에 떠먹일 필요도 없다. 물론 미국 음식 문화가 많아서, 안타깝게도 엄청나게 건강한 음식이라던지 아님 아시안 음식이 상대적으로 없긴 하다. 하지만, 맘만 먹으면 24시간 내내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놀다 지친 아이는 음식을 정말 잘 먹는다. 아이가 수영을 하다 나와서 음식을 먹고 나는 책을 보고 있는데, 저 뒤 쪽에 카보에서 유명한 관광 명소가 보였다. 나는 순간 이 곳이 천국인가 했다.
여행을 한다고 현실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족이 있으니, 이 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주 귀한 시간이라는 걸 알겠다. 글을 배타는 중에 쓸수 있어 감사하고, 또 기쁘다. 따라서 모두에게 추천한다. 미국 사는 사람들에게 크루즈는 한국인이 일본 또는 싱가폴 가는 정도의 투자인데,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 럭셔리 문화로 치부될지 모르겠다. 여기 사는 사람이라면 꼭 경험해야 하고, 가족들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한국에서 여행오는 분들도 가랭이 찢어지는 경험일지라도 후회는 없을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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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치노매드
누구든 한번은 크루즈 여행을 해야할 것 같아요! 생생한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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