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31

여름 - 3

2025.09.22 | 조회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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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김토성의 프로필 이미지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친구와 함께 오전에 광교 호수공원을 뛰기로 했다.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보니 최근에 풀베기한 모양인지 풀이 무성해야 할 곳이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니 진하고 존재감이 뚜렷한 식물의 향이 났다. 내게는 그게 여름의 한 폭을 채우는 향이다. 가끔 너무 강렬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상쾌하면서도 묘하게 역한 양가적 느낌을 받는다.

 

그건 식물들이 베여나갈 때, 삶의 가장자리에서 죽음을 앞에서 마주할 때 풍기는 향일까. 그래서 평소에는 잘 느낄 수 없는걸까.

 

수전 손택은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언급하며 매독이란 천재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라며 매독에 걸린 천재들이 완전한 광기에 빠져들어 죽기 전, 극도로 강렬하고 열광적인 정신활동을 한다며 광기의 낭만적인 측면에 관해 이야기했다. 때로 예술은 광기와 교집합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 광기의 끝은 비참하거나 파괴적인 죽음이고 그 앞엔 천재의 삶에 대한 보상 마냥 걸작이 남는다.

 

모차르트도 그가 죽던 해에 '마술피리', '티토 황제의 자비' '레퀴엠'등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는 걸작들을 남겼다. 요절한 천재의 삶이 더 기억에 남듯이 삶의 끝에 토해내는 작품들이 더 사람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걸까 따위 생각을 하며 풀베기 된 잔디 더미를 지나 친구 집으로 향했다(물론 그들은 매독이라든지 광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천재였기에 걸작을 남겼을 테지만).

 

다행히도 난 매독에 걸리지 않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단명하는 천재도 아니다. 당연히 그냥 천재도 아니라서 삶의 끝에 대단한 뭔가를 내놓을 것 같진 않다.

 

그럼 난 무엇을 남길까.

 

운이 좋다면 지금 살아온 만큼을 더 살 수 있을거다.

거기에 하늘이 돕는다면 몇 년을 더 붙여서 살 수 도 있겠지.

고작 그만큼이다.

 

30년 하고도 몇 년을 더 사는 동안에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준 적은 많지 않다. 당시에는(대부분의 경우 지금도) 내가 가진 것들을 스스로 노력했기에 이루어낸 것이라 여기겠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운이 좋았기에 이루어진게 더 많았다.

 

내가 태어난 곳, 나의 부모, 가족, 나의 성향, 건강, 친구들. 날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만 보아도 내가 노력해서 얻은건 없다. 운 좋게 요렇게 태어나 얻은 것일 뿐.

 

마찬가지로 슬프고 힘들고 견디기 힘든 아픔들도 모두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생긴것 보다 그저 운이 나빠서 벌어진 일들이 많다. 그러니 내 탓을 해봐야 뭐하나. 벌어진 일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지.

 

난 삶의 끝에 뭔가 엄청난걸 만들진 않을거다.

하지만 그 끝에 선 나는 결국 꽤 괜찮아진 나일거라 생각한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하루에 조금씩 어제 보다 나은 날들이 모여서 지금 보다는 채워져 있을거다. 실수하고 잘못해도 괜찮다. 길을 잘못 들어도 되고 돌아가도 된다. 그래봐야 고작 몇 십년이다.

엄청난건 못남겨도 나름 괜찮게 즐겁게 산 내 삶을 놓아두고 가면 된다.

 

게으르지만 부지런히 하루를 살아내야지.

내가 좋아하는 작고 사소한것들을 해야지.

작게 자주 행복해야지.

사랑을 많이 해야지.

새로운 것도 많이 해야지.

아는 척 하지 말아야지.

여행을 많이 다녀야지.

새로운 골목길을 헤매야지.

봄이 와서 새 잎이 돋을 때마다 감탄해야지.

 

그러다보면 소풍 끝나는 날이 올거고,

내 장례식장에는 천상병의 귀천을 리믹스한 곡을 틀어달라고 할거다.

별먼지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즐거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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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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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옐의 프로필 이미지

    1
    2 months 전

    지치는 출근길에 토성님의 글을 읽고 작게나마 행복해졌어요!

    ㄴ 답글 (1)
© 2025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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