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나가는 무렵에 여러 일들이 있었다.
지치고 힘들었던 일은 매일 아침마다 석촌 호수를 뛰며 조금씩 내다 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을 먹었다. 날이 좋으면 도서관에 갔고,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수전 손택의 책을 읽다가 졸리면 서가를 돌아다녔다. 달리기를 하며 그리스인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인가 ‘소크라테스 헬스클럽’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그 책을 읽으며 아테네의 김나지움에서 벌거벗고 올리브 오일을 온몸에 바르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운동하는 그리스인을 떠올렸다. 석촌호수를 뛸때 5km 되는 지점을 바라보며 저곳에 우리의 승전 소식을 기다리는 아테네 시민들이 있을거라 상상했다. 발이 빨라지고 힘이 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5km 지점을 지나면 여름의 끝이 있었다. 올해도 끝나지 않을 것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여름이 돌아보니 끝나 있었다.
8월에 끝나야 했을 ‘여름’ 글은 10월이 되어야 끝이 났다.
너무 오래,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그 실체를 자세히 보기 힘들다.
이번 여름에 많은 것들이 그랬고 난 허둥지둥하거나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냈다.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도 없었고 -없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그냥 매 순간이 힘들고 고달프기만 했다. 나의 마음은 항상 어딘가에 피신해 있었다. 이 누추한 곳에 귀한 나를 모셔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왜 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고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릴려고 이 짓을 하고 있을까, 흐린 눈으로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겼다. 영혼이 가출한 몸뚱이만 덜렁덜렁 걸어 다니며 별 의미도 없는 하루를 보냈다. 고장이 날 것 같았다. 인간은 생각보다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른다. 괜찮은거 같고 버틸만 한거 같아도 이미 임계점을 넘은 경우도 많고, 어디 몇 군데 부러져도 부러진 줄 모른 채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리니 어깨가 말리고 허리가 굽고 목이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도 뭐 괜찮은거 같은데 하면서 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 번 망가진 적이 있어서 고장 날 것 같으면 신호가 오는 편인데 이번엔 내가 그 신호를 무시했다. 왠지 이제 좀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이 정도는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무지한 생각이었고 날 과대평가하는 가소로운 짓이었다.
어쨌거나 한발 물러나 보니 꼬여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나에게 붙어있던 것들 중 일부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꼬인 건 풀면 되고 쓰레기는 버리면 된다. 간단한 일인데 쉽지가 않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멀리서 구경하는 남의 일은 솔로몬처럼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잘도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의 일은 어찌할 바를 몰라 술로만 풀고 있었다.
천천히 취하면 취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일어나면서 휘청거릴 때 비로소 취했다는 걸 알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도 잔잔하게 스며왔다. 내가 그렇게 부정적인 사람으로 변해버린 줄 그때는 몰랐다. 매일 새롭게 누굴 미워하고 근면하게 불평하고 꾸준하게 싫어했다. 상황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고만 생각했지 내가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진 않았다. 시간이 생겨 날 안팎으로 자세히 바라보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에 구멍이 나 있었다.
작은 구멍이라 잘 보이지 않아서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구멍으로 소소한 즐거움, 자잘한 행복들은 다 빠져나가고 구멍 보다 큰 근심과 걱정, 불안만 남았다. 구멍 난 마음을 꿰매고 나서야 다시 마음에 반짝이는 것들이 차올랐다. 매 순간 구멍으로 빠져나가던 순간들이 다시 쌓였다. 이제야 좀 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명상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에게 쉼이란 무엇인가요?
나에게 쉼이란,
불안, 걱정 없이 온전히 이 순간에 있는 것.
마음에 후회를 떠올리지 않고 평온히 두는 것.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고 그 안에 머무는 것.
그리고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면서 명상을 끝냈다.
항상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세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몸은 언제나 순간에 있다.
마음을 과거나 미래에 두지 말고 어디 외딴섬에 두지도 말고 몸이 있는 지금, 여기에 두자.
아쉬우니까. 이 순간을 별것 아니라고 치부하며 흘려보내기에는.
마음은 몸을 떠나서 제대로 살지 못하니까.
몸을 떠나 마음이 방황하던 여름은 끝났다.
끝은 언제나 시작에 닿아 있다.
이제 마음이 제자리를 찾은 가을의 시작이다.
그리고 ‘여름’ 글도 끝났다.
누군가는 제대로 끝나지 않는 ‘여름’ 글을 보며 앞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라 했지만, 약속을 하다보면 지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앞으로는 매주 한편씩 수요일에 글을 발행하려 합니다. 매일 쓰는건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이 여름의 이야기를 끝까지 쓸 수 있었던 것은 구독자 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회사커피
오늘의 레터를 보고 내 상태가 어떤지 한 번 꼭 돌아봐야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걱정과 나쁜 것들은 여름 옷과 함께 정리하고 가을을 맞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좋은생각입니당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