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10월의 마지막 주, 레터네요. 가을을 즐길새도 없이 가을이 지나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많아요. 며칠 전에 저녁밥을 먹고 가족들과 상가 편의점을 갔는데요, 아파트 1층 땅을 정말 오랜만에 밟아봤어요. 살고있는 아파트여도 매일 지하주차장과 우리 집만 오가다 보니 멋진 조경을 바라볼 일이 그리 많지 않더라고요. 앞으로는 시간을 내어 땅을 밟고, 하늘을 올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상반기 편 회고록을 읽으시고 공감과 응원을 전해주신 구독자분들, 자신의 한 해를 돌아봤다고 말해주신 구독자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한 해를 회고하면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는 것 생각보다 큰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에게 아주 건강한 기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구독자님도 이번 레터를 통해 꼭 한 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
6월의 키워드, #걱정
화창했던 날씨와는 달리 6월엔 걱정의 연속이었다. 6월 초, 가족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나를 힘들고 고단하게 하는 일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넓은 바다를 보고, 맑은 하늘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제주의 바다와 하늘은 파랗고, 넓고, 깊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불청객처럼 연락 오는 회사의 연락 말고는. 겉으로는 일 때문인 것처럼 보였지만, 내 마음은 사람 때문에 잔뜩 힘을 들이고 있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회사에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국 출장이 결정되었다. 학생 때도, 어른이 되어서도, 여행으로 조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열 살 때부터 20년이 훌쩍 넘도록 영어 공부를 해왔지만 주로 문법과 독해에 최적화되어있다. 출장에서 직접 대면해야 하는 외국인들과 수십 개의 메일을 주고받았지만, 직접 대면한다고 생각하니 여간 부담스러운게 아니었다.
어차피 결정된 사안이긴 했지만, 만약 내가 죽어도 못 가겠다고 온갖 핑계를 댄다면 담당자가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솔직하게 포기할까 싶었다. 자신이 없었다.
거듭 고민한 끝에, 그냥 '가'기로 했다. 그냥 '하'기로 했다. 마음을 정한 후로는 오히려 심플해졌다. 가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명확히 정리하고, 모르는 건 동료들에게 물어 준비하고, 퇴근 후에는 영어 회화 공부를 했다. 벼락치기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주로 회화는 레이첼 선생님과 공부했는데, 내가 주눅 들고, 걱정하고, 자신없어할 때 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Confidence is everything!"
애초부터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갖는 것의 차이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때로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힘이 되기도 한다.
7월의 키워드, #경험
7월 첫 주, 열세시간 이상의 고된 비행 길을 거쳐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인근 렌터카 샵으로 발 길을 옮겼는데, 장시간 비행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정말 쾌적하고 좋아서 잔뜩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렌터카를 빌려 라스베가스로 향하는 길, 시차에 그만 무너져 버렸다. 상사께서 끝도 없는 사막 길을 운전하시는데 나는 뒷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헤드뱅잉을 하며 엄청나게 졸았다. 장시간 비행으로 쌓인 피로와 뜨거운 사막의 햇빛이 만나 도저히 내 의지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참고로 라스베가스의 온도는 40도를 훌쩍 넘는다. 핫 뜨거.
운이 좋게도 라스베가스에 도착한 날, 미국 독립기념일(7/4)이었다. 여기저기서 불쇼, 물쇼, 불꽃놀이의 향연이 펼쳐졌다. 눈에 보이는 광경은 모두 멋지고 좋았지만, 극 건조한 날씨에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갈증을 느꼈다. 걷다가 500ml 생수 한 병을 만원 넘게 주고 사서 마셨다.
첫날 이후로는 업무 관련 일정을 소화하기 바빴다. 하루 업무가 끝나면 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내게는 어려운 분들과의 식사 자리여서 그 시간도 업무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평소에 잘 접하지 못하는 고가의 음식을 앞에 두고도, 온전히 맛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와 집에서 시켜 먹는 떡볶이가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첫 해외 출장을 다녀오며 느낀 것은, 중간 중간 작은 시험대는 있었지만 큰 위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잔뜩 긴장하고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는 아주 수월하게 끝났다. 삶에서 다른 일들도 이와 같을 때가 많다. 잔뜩 겁먹고 걱정했지만,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닌.
얼마 전 읽었던 오정세 배우님의 인터뷰에서 이런 글을 봤다.
최근에도 처음 해보는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싸매고 있었다. 주사 맞기 전처럼 잔뜩 긴장하고 무섭다고 아등바등하고 있었는데, 지난 7월의 기억을 떠올리며, 또 이렇게 인터뷰 에서 마주한 오정세 배우님의 멋진 말을 기억하며 '에라 모르겠다' 힘 빼고 맞아보자고 마음을 달래본다. 어쩌겠나. 해야지. 해내야지.
레이첼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 "Confidence is everything!"은 직접 해본 사람만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직접 해보면 막상 별거 아닌, 그러니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8월의 키워드, #일상
일과 살림을 병행하며 엇비슷했던 일상에서 해외 출장으로 인해 잠시나마 리프레쉬하고, 먼 나라, 낯선 나라에서 느낀 경험과 깨달음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으련만,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난한 하루가 반복됐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일상(日常)'은 한자로 일(日) 자에 항상 상(常) 자를 써서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everyday life'.
단어의 의미 그대로 엇비슷한 날들이 반복됐다.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내가 해야 하는 to do list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쳐내고 나면 새로운 일들이 쌓였고, 집에서는 똑같은 일들을 쳐내도, 다음 날이면 같은 일을 또 해야 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늘 하던 일이었지만 어쩐지 더 지난하게 느껴졌다.
아이의 식단표를 주방 한편에 붙여두고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대각선을 그으며 하루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걸로 한 달의 지나온 날과 남아있는 날을 헤아리곤 했다. 8월은 왜 이리도 긴지, 하루하루 대각선을 그어도 남아 있는 날들이 너무 많게만 느껴졌다. 올해를 보내며 가장 길고 더디게 느껴진 한 달이었다.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9월의 키워드, #여행
9월엔 가족과 함께 시드니 여행을 다녀왔다. 여러모로 '처음'의 의미가 많은 여행이었다.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지였고, 아이와 열 시간 넘는 비행도 처음이었다. 또한 남편과 아이에게 호주 여행이 처음이기도 했다.
나는 호주가 얼마나 멋지고 좋은 나라인지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에게 모두 좋은 여행이 될 것이라 자신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두 사람이 너무 만족해했다. 나보다 더 많은 나라를 경험한 남편도 호주의 매력에 푹 빠져 가본 나라 중에 가장 만족스럽다고 극찬했고, 아이도 대한민국 화성시보다 더 좋다며, 시드니에 살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사실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호주 여행을 완벽하게 즐기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와 같은 결의 이러한 마음은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인 것 같다.
여행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오페라하우스 써큘러키 역에서 페리를 타고 왓슨스베이와 본다이비치를 갈 때 마주했던 풍경이다. 드넓고 푸르른 바다 위에서 보는 시드니의 전경과 오페라하우스는 인간과 자연이 만들어낸 위대한 걸작품이었다. 첨단 기술을 자랑하듯 도시적인 매력이 있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마주할 수 있는 거대한 자연경관까지, 시드니는 정말 매력적인 도시다.
여행이 끝나면 또다시 지난한 일상을 마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여행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꺼이 잘 견뎌야겠다. 그래서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까?
10월의 키워드, #성장
평소에도 성장에 대해 고민하긴 하지만 유독 이번 달엔 성장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지만 지금 내가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때때로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이럴 때는 '꼭 성장해야 하는 걸까, 행복하게 살면 되는거지'라고 위안을 삼으며 꼭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했고, 그러다가도 성장하고 성취해내는 사람들을 본보기 삼아 깨닫고 배우고자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기도 했다.
선명하게 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의 청사진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때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채워야지 하며 의지를 불태우다가도, 어쩔때면 그저 나태하게 삶을 음미하며 한없이 널브러지고 싶기도 하다. 느리지만 조금씩 쌓아온 나의 성취들이 기특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보잘것없이 느껴져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매일매일 성장과 나태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봤을 때 거창하진 않더라도 스스로 꽤 만족스러운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내년 10월엔 어떤 생각을 기록하고 있을까. 다행스럽고 감사한 건, 나는 앞으로의 내 미래가 기대된다.
마치며
두 번의 레터를 거쳐 지난 10개월을 돌아보니, 결코 쉽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여러 새로운 시도와 경험을 하고자 애를 썼던 제 자신이 꽤 기특합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느라 힘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험이 유익했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설레기도 했지만 자신 없어서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잔뜩 겁을 먹고 걱정했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만큼 어렵지 않아서 마음을 쓰러내리기도 했고요.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잔잔하기보단 오르락내리락 기복있는 그래프가 그려질 것 같습니다.
구독자님도 함께 지난 10개월을 회고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많은 것을 했고, 채웠고, 배웠고, 느꼈을 겁니다. 만약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남은 두 달 동안 열심히 채워보죠! 아직, 두 달이 남아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우리 조만간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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