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끝내 무언가를 붙든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는 당신이 직접 넘겨야 한다. 다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녀가 마지막에 손에 쥔 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매일 밤 지워지고,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해야 했던 그 모든 날들의 끝에서, 크리스틴은 기억보다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둔 무언가를 발견한다.
지난 4주 동안 우리는 크리스틴과 함께 욕실 거울 앞에 섰고, 그녀의 일기를 함께 읽었으며, 그녀가 발견한 균열들을 함께 추적했다. 존 로크의 철학으로 기억과 정체성의 관계를 살폈고, 데이비드 흄의 논리로 신뢰의 토대를 의심했으며, 폴 리쾨르의 언어로 서술이 어떻게 진실을 만들고 또 파괴하는지를 들여다봤다. 이제 마지막 질문 앞에 선다.
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은 무엇인가.
감정 기억의 문제
신경과학은 기억을 하나의 단일한 능력으로 보지 않는다.
뇌 안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기억을 담당하는 서로 다른 구조물이 있다. 해마(hippocampus)는 사실과 사건을 저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지난주에 누구를 만났는지, 10년 전 어디서 살았는지와 같은 종류의 의식적 기억(explicit memory)은 해마를 통해 처리된다. 크리스틴이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밤새 해마가 처리한 하루치의 기억이 아침이 되면 사라진다.
그런데 편도체(amygdala)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편도체는 감정과 감각에 관련된 기억을 처리한다.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갑자기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 특정 음악을 들었을 때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것 등. 이것은 해마가 아니라 편도체의 영역이다. 그리고 편도체가 저장하는 감정 기억(emotional memory)은 해마의 의식적 기억보다 훨씬 강하고, 훨씬 오래 남으며, 훨씬 지우기 어렵다.
올리버 색스는 이 사실을 환자들을 통해 반복해서 목격했다. 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제 간호사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간호사가 자신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다면, 다음 날 그 간호사를 보았을 때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왜 불편한지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싫었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감정은 남았다.
음악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환자들도 있었다. 알츠하이머 말기에 접어들어 가족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환자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노래를 들으면 입술을 움직이며 따라 불렀다. 색스는 이것을 두고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도 음악은 남는다고 기록했다. 뇌의 가장 원초적인 층위에, 언어와 논리가 닿지 못하는 깊은 곳에.
그렇다면 크리스틴은 어떤가. 그녀가 벤 옆에서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 혹은 어떤 날 아침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 이것은 어디서 오는가. 그녀에게 기억이란 건 없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편도체가 저장해둔 감각이 있다. 크리스틴의 직감은 단순한 직감이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해마가 지우지 못한 감정의 잔향일 수 있다.

올리버 색스의 Musicophilia. Musicophilia는 색스가 음악이 인간의 뇌와 감정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다양한 환자 사례를 통해 탐구한 책이다. 음악이 기억을 되살리거나, 신경 질환 환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음악과 인간 정체성의 깊은 연결을 설명한다.
영국 문학 속 사랑과 기억
기억 속에서 잊혀져도 사랑은 남는가? 영국 문학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과 씨름해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는 1609년 출간된 소네트 모음집의 116번째 시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은 변화가 찾아올 때 변하는 것이 아니며, 굽힐 수 있는 것에 굽히는 것도 아니라고. 사랑은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등대이며, 시간이라는 낫도 그 가치를 베지 못한다고. 셰익스피어가 이 시를 쓴 것은 400년 전이지만, 그 핵심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진정한 사랑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기억에도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는 이 명제를 더 현실적이고 더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탐구했다. 하디는 첫 번째 아내 엠마와 오랫동안 불화 속에서 살다가, 엠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극심한 죄책감과 그리움에 빠졌다. 1912년부터 1913년 사이에 쓴 시 연작 『엠마를 위한 시들(Poems of 1912–13)』은 그 감정의 산물이다. 그 중 「목소리(The Voice)」는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 시인의 이야기다. 바람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젊었던 시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의 목소리가. 하디는 그 목소리가 실제인지 환청인지 알지 못한 채, 그래도 듣는다.
하디가 이 시에서 포착한 것은 기억이 왜곡되어도 사랑이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실제의 엠마가 아니었다. 오랜 불화로 이미 변해버린 엠마가 아니라, 처음 만났던 젊은 엠마였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왜곡된 기억이 만들어낸 사랑도 사랑이다.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일지 모른다.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 1919–1999)의 이야기는 더 직접적이다. 아이리스 머독은 20세기 영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가이자 철학자 중 하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26편의 소설을 썼으며, 언어와 도덕과 인간 조건에 관한 깊은 사유를 평생의 작업으로 삼았다. 그 아이리스 머독이 1990년대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 언어를 잃어가고, 기억을 사유한 사람이 기억을 잃어갔다.
그녀의 남편 존 베일리(John Bayley, 1925–2015)는 옥스퍼드의 문학 교수였다. 그는 아내가 병으로 무너져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회고록 『아이리스(Iris: A Memoir)』를 썼다. 1998년 출간된 이 책은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가장 솔직하고 가장 아름다운 기록 중 하나로 꼽힌다. 베일리는 썼다. 아이리스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 옆에 있을 때 그녀는 안심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충분하다. 기억이 없어도. 이름을 몰라도. 함께한 40년의 세월을 기억하지 못해도. 옆에 있을 때 안심한다는 것으로. 베일리의 이 문장은 기억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어떤 철학적 논증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사랑은 기억의 산물이 아닐 수 있다. 사랑은 기억보다 더 원초적인 층위에 새겨지는 것일 수 있다.

『아이리스(Iris: A Memoir)』 표지
크리스틴과 벤, 사랑인가 감금인가?
하지만 소설은 이 아름다운 명제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벤은 매일 아침 크리스틴 옆에 있다. 그는 친절하다. 인내심이 있다. 같은 설명을 매일 반복하면서도 지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는 존 베일리와 같다. 기억을 잃은 아내 곁을 지키는 헌신적인 남편으로. 하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독자는 불편한 질문을 갖게 된다. 벤의 친절은 사랑의 표현인가, 아니면 통제의 도구인가.
이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그 두 가지가 외형상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인 배우자를 매일 아침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고, 같은 방식으로 안심시키고, 같은 루틴 안에서 돌보는 것. 이것은 명백한 헌신의 행위다. 동시에, 그 루틴이 배우자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것이라면? 이것은 감금의 구조다. 사랑과 통제는 같은 행동 안에 공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의도인데, 크리스틴은 벤의 의도를 확인할 기억이 없다.
현실에서도 이 문제는 논의된다. 치매나 기억상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이 직면하는 윤리적 딜레마가 있다. 환자에게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혼란을 줄이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할 것인가. 환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배우자를 찾을 때, “돌아가셨어요”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곧 올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의료 윤리학자들은 이것을 ‘치료적 기만(therapeutic deception)’이라는 개념으로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선의로 행해지는 거짓말이 있다. 하지만 그 선의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기억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판단하는가.
크리스틴은 결국 선택한다. 스포일러를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기억에서 온 것이 아니다. 매일 밤 지워지면서도 몸 어딘가에 새겨진 감각에서, 편도체가 해마보다 더 오래 붙들고 있던 무언가에서 온다.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안다. 논리가 아니라 몸으로. 사실이 아니라 감정으로.
한 달 후의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3월이 시작될 때 우리는 욕실 거울 앞에 섰다.
크리스틴이 낯선 얼굴을 마주하는 그 장면 앞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내일 아침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만약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의 실이 끊긴다면. 그 질문이 처음에는 이론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네 편의 칼럼을 함께 읽고 난 지금, 그 질문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어제를, 작년을, 어린 시절을. 이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크리스틴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을. 아침에 눈을 뜨고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일인지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것도 알게 되었다. 기억이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다. 어제를 조금 다르게 기억해도, 10년 전 일을 잘못 기억해도, 중요한 순간들을 흐릿하게만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기억의 연속성만이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편도체가 저장한 감각들이, 몸이 기억하는 감정들이, 기억보다 더 깊은 곳에 새겨진 무언가가 우리를 우리이게 한다.
크리스틴이 마지막에 일기에 남기는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그녀가 쓰는 마지막 문장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기록이다. 기억이 없어도 알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도 지워지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독자는 크리스틴이 결국 무엇을 붙들었는지를 안다. 그리고 그것이 기억이 아니라는 것도.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
S. J. 왓슨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기억상실 스릴러로 기획하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말한 바있다. 그가 처음 품었던 질문은 스릴러의 질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사랑은 기억에 의존하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잃을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잃는가.
NHS 청각학자로 일하면서 그는 기억과 인식의 문제를 가진 환자들을 간접적으로 접했다. 그 경험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쓰면서 그가 진정으로 탐구하게 된 것은 의학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적 조건이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크리스틴과 같은 처지에 있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신뢰는 불확실하며, 우리가 읽는 서술은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을 통과한다. 크리스틴의 이야기는 극단적이지만, 그 방향은 우리 모두가 향하고 있는 곳이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크리스틴은 일기를 썼다. 내일 아침의 자신에게.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행위 자체가, 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다는 증거였는지 모른다. 기억하고 싶다는 의지.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 사랑받았다는 것을, 사랑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기억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말이다.
한 달 동안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틴과 함께 걸어온 이 여정이, 오늘 아침 눈을 뜰 때 여러분을 조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기를 바랍니다. 더 감사하고, 더 의심하고, 더 조심스러우면서도 더 용감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것으로 『내가 잠들기 전에』 시리즈를 마칩니다. 3월 29일 일요일 레터 ‘장르 문학으로 읽는 영국’은 휴재합니다.
4월에 함께 읽을 책은 마이클 로보텀(Michael Robotham)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Shatter)』입니다.

누군가 전화 한 통을 받고, 그 전화에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해결해야할까요?
피해자들은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스스로 다리 위에 올라갔고, 스스로 난간을 넘었습니다. 강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흔적도 없습니다. 증거도 없습니다. 단지 그저 누군가 전화 한 통을 통해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입니다.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건 것은 사람들의 정신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법을 아는 한 남자입니다. 그는 협박도, 폭력도 없이. 오직 말로. 오직 심리적 기술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는 군대에서 훈련받은,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기술을 전문적으로 연마했고, 사람의 마음속 가장 취약한 지점을 찾아내고, 그곳을 정확하게 누르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맞은편에는 주인공 임상심리학자 조 오로클린이 있습니다. 그 역시 인간의 정신을 읽는 것이 직업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치료실 안의 대화가 아닙니다. 한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훈련받았고, 다른 한쪽은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훈련받았습니다. 소설은 같은 언어를, 같은 심리학적 도구를, 정반대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두 사람의 치열한 대결을 다루고 있습니다.
3월 내내 우리는 기억을 잃는 공포를 크리스틴과 함께 걸었습니다. 4월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포 앞에 서게 됩니다. 기억도 있고, 의지도 있고, 모든 것이 온전합니다. 하지만 그 온전한 정신이 조용히, 정교하게,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과연 그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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