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었다.
남해 끝자락, 전라남도 여수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거문도는 아직 깊은 잠에 잠겨 있었다. 봄 안개가 바다 위에 낮게 내려앉아 섬과 바다의 경계를 지워버린 듯했고, 부두에는 밤새 고기를 잡고 돌아온 어선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고요를 깨는 것은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바다 쪽에서 낯선 소리를 들었다. 파도와는 다른, 바람과도 다른 소리였다. 쇳덩이가 서로 부딪히는 둔탁하고 차가운 울림.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안개를 밀어내듯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1885년 4월 15일 새벽.
안개 속에서 거대한 형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철로 만든 선체, 마치 떠 있는 요새처럼 보이는 군함 세 척이었다. 돛대 위에는 낯선 깃발이 걸려 있었다. 붉고 푸른 십자가 문양이 겹쳐진 깃발, 오늘날 영국 국기로 알려진 유니언잭이었다. 그 무렵 영국은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하던 해양 제국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만큼 식민지와 군사 기지를 곳곳에 두고 있었다.
군함들은 말없이 만 안으로 들어와 닻을 내렸다. 포구 전체가 갑자기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다. 섬사람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 해변으로 몰려나왔을 때, 이미 작은 보트들이 내려지고 있었고, 제복을 입은 수병들이 줄지어 상륙하고 있었다. 그들의 어깨에는 총이 걸려 있었고, 발걸음은 일정한 박자를 유지한 채 단단하고 규칙적으로 모래사장을 밟았다.
어부들과 주민들은 그 광경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들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당시 조선은 외세와의 접촉이 많지 않았고, 특히 남해의 작은 섬 주민들에게 서양 군함은 거의 상상 속 존재에 가까웠다.
선전포고도, 사전에 전달된 통보도, 조선 정부와의 상의도 없었다. 그날, 세계 최강의 해군은 그렇게 조선의 작은 섬 하나를 조용히 점령했다.
그리고 거문도는 영국의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 되었다.
거문도에 정박하는 영국의 HMS 센츄리온과 HMS 이피게네이아. 출처: After Charles de Lacy - The Illustrated London News, 퍼블릭 도메인
체스판 위의 섬
런던에서 거문도까지는 참으로 먼 거리였다. 증기선으로도 수 주에서 두 달 가까이 걸리던 거리,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닿는 바다 끝의 작은 섬. 그러나 영국 해군성의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에서는 그 거리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바다 위에 찍힌 점 하나, 전략적 가치로만 환산된 좌표 하나에 불과했고, 그 점은 오래전부터 영국의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었다.
이 작은 조선의 섬이 영국 지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85년 봄, 세계는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총성이 들리지 않는 전쟁, 그러나 언제든 실제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대치가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평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긴장 속에서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며 아시아 곳곳에서 경쟁하고 있었다. 후세대에 의해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 불리게 될 힘싸움이다. 당시 인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영국에게 북쪽에서 내려오는 러시아는 가장 두려운 존재였고, 러시아 역시 따뜻한 바다로 나갈 항로를 확보하려 했다.
그 긴장은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작은 오아시스, 판제(Panjdeh)에서 폭발했다. 1885년 3월, 러시아군이 영국의 보호 아래 있던 아프가니스탄 병력을 공격해 점령한 것이다. 이 사건은 영국에서 전쟁 위기 수준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런던의 신문들은 연일 러시아를 규탄했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군비 증강과 병력 동원을 논의했으며, 내각은 밤늦도록 회의를 이어갔다.
문제는 전쟁이 벌어진다면 어디서, 어떻게 러시아를 압박할 것인가였다. 육지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병참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당시 영국 해군은 세계 최강이었고, 러시아는 태평양 함대를 극동의 항구 블라디보스토크에 두고 있었다. 그 함대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목을 죄면, 전쟁의 주도권은 영국이 쥘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지도 위의 한 점을 가리켰다.
바로 거문도였다.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거문도는 한반도 남쪽 끝에서 조금 떨어진 섬이지만, 바다의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동쪽으로는 일본과 마주 보는 대한해협, 서쪽으로는 중국 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동중국해가 만나는 길목이다. 부산에서 상하이로 오가는 항로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열린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러시아 함대가 남쪽으로 내려와 따뜻한 바다로 진출하려면 대한해협 일대를 지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항로 중 하나였다. 당시의 군함은 보급과 석탄 공급을 위해 일정한 항로와 기항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바다 위라고 해서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거문도 인근 해역은 극동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관문 중 하나였다.
거문도를 장악한다는 것은 단순히 섬 하나를 점령하는 일이 아니었다.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필요하면 차단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바다의 숨통을 쥐는 일이었다.
영국의 계산은 거기까지였다.
그 섬에 누가 살고 있는지,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그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당시 조선은 국제 정치에서 거의 발언권이 없는 약소국이었고, 청나라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서구 열강과의 외교 경험이 부족했다. 유럽의 제국들이 벌이는 거대한 전략 게임 속에서 조선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였고, 강대국들이 국제 질서를 설계해 나가는 데 조선의 입장 따위는 애당초 처음부터 계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도상에서 거문도의 위치. 구글 지도엔 여전히 Port Hamilton이란 영문명과 함께 표시된다.
통보를 받은 나라
한성, 오늘의 서울에 있던 조선의 왕실과 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자국 영토 한복판에서 외국 군대가 상륙해 막사를 세우고, 군기를 게양하고, 포대를 설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조선은 어떤 공식 통보도 받지 못한 채, 뒤늦은 보고를 통해서야 전해 들었다. 먼 남해의 작은 섬에서 벌어진 일이 왕의 귀에 닿기까지는 시간도, 거리도, 그리고 권력의 벽도 너무 높았다.
고종은 곧바로 항의 공문을 보냈다. 조선은 이미 서양 열강과 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형식상으로는 주권 국가였다. 자국 영토에 대한 무단 점령은 분명 국제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반응은 냉정했다. 외교 문서의 형식을 갖춘, 정중하지만 조금의 틈도 없는 답신이었다.
요지는 단순했다. 영국은 전략적 필요에 따라 그 섬을 점유했으며, 이는 자국의 판단으로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설명도, 사과도 없었다. 단지 통보에 가까운 답변뿐이었다.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사실상 없었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조선은 명목상 독립국이었지만, 오랫동안 청과의 조공 관계 속에서 외교와 군사 문제에서 강한 영향력을 받고 있었다. 특히 대외 문제에서는 청의 승인이나 중재 없이는 움직이기 어려운 구조였다.
결국 영국과의 협상 테이블엔 조선의 대표가 아닌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이 앉았다.
그는 당시 조선의 외교를 실질적으로 좌우하던 청나라의 실력자로 북양대신으로서 외교·군사·경제를 총괄하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인물이었다.
이 장면이 품고 있는 잔인함을 생각해 보라. 자국의 섬을 되찾기 위해, 그 나라의 왕과 정부가 다른 나라의 대신에게 대신 말해 달라고 부탁해야하는 그 상황을 말이다. 이름은 독립국이었지만, 독립국처럼 행동할 수 없는 나라. 주권은 있었으되 행사할 힘은 없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한편 일본 역시 공식적으로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그 반대가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히 근대화하며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러시아의 남하를 가장 두려워하던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런 일본에게 러시아를 견제하는 영국의 해군 기지는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결국 거문도라는 작은 섬을 둘러싸고 네 개의 제국 (영국, 러시아, 청, 일본) 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누구는 해상 패권을 위해, 누구는 국경 방어를 위해, 누구는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누구는 미래의 확장을 위해.
그 한가운데에 조선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협상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조선은 논의의 대상이었고,문제의 일부였으며, 계산식 속의 변수였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에 가까웠다.
영국 수로국에서 제작한 거문도 지도. 출처: 영국 수로국 - Scan of original Admiralty Chart, 퍼블릭 도메인
섬에서 일어난 일들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으로 만든 영국의 수병들과 공병들은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측량을 시작했다. 낯선 기구로 거리와 높이를 재고, 바위와 해안선의 모양을 종이에 옮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는 이후 영국 해군의 항해와 군사 계획에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막사가 세워지고, 포대가 들어설 자리가 정해졌으며, 병사들이 이동하기 쉽도록 길이 닦였다. 바다와 바람밖에 없던 언덕에는 채소밭까지 만들어졌다. 먼 바다에서 온 군인들이 오래 버티기 위한 생활 기반이었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바다 밑에서 일어났다. 당시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던 새로운 기술, 해저 전신선 공사가 진행된 것이다. 19세기 후반 전신선은 오늘날의 인터넷과 같은 역할을 했다. 전쟁과 외교, 무역의 정보를 며칠이 아니라 몇 시간 안에 전달할 수 있게 만드는 혁명이었다. 영국은 이미 전 세계 식민지와 군사 기지를 전신망으로 연결하고 있었고, 상하이와 일본 나가사키를 잇는 해저 케이블이 거문도를 경유하도록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작은 섬은 어느새 세계 제국의 통신망 속 한 지점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섬 주민들에게 그 모든 것은 설명되지 않은 채 벌어진 일이었다.저것이 무엇인지, 왜 만들어지는지, 언제 끝날지, 그리고 언제 떠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낯선 군인들이 바꾸어 놓는 풍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섬에는 사실상 군사 기지이자 식민지와 다름없는 기반 시설이 구축되었다.
영국은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되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곳을 자기 세계 안으로 편입시키는 첫 번째 행위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망자도 생겨났다. 열병과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영국 수병들이 고향에서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 한 번도 와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섬의 언덕에 묻혔다. 물론 그들의 매장이 조선 정부의 공식 허락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으며, 군대의 관례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묘지는 지금도 거문도에 남아 있다.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바닷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언덕 위에 영어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이 서 있다. 가족도, 동료도, 조국도 없는 곳에서 긴 시간을 견뎌 온 돌들이다. 섬 주민들 중에서도 그 존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관광 안내서에도 크게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무덤들이야말로 이 사건을 가장 솔직하게 증언하는 유물인지 모른다. 왜 이 사람들이 여기 묻혀 있는가. 무엇을 위해 이 먼 섬까지 왔는가. 그 질문에 대해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만약 영국이 끝내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니다. 불과 수십 년 전, 영국은 비슷한 방식으로 중국의 홍콩을 손에 넣었다. 1841년 아편전쟁 중 영국군이 홍콩섬을 점령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전쟁 중의 군사 거점에 가까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홍콩은 난징조약을 통해 영국에 영구 할양되었고, 이후 주변 지역까지 포함한 ‘신계(新界)’는 1898년 99년 임대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홍콩은 한 세기 반 가까이 영국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거문도 역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전략적 거점으로 점령되고, 국제 협상 속에서 조차지로 굳어지고, 결국 장기 임대나 영구 점유로 이어지는 경로. 당시 제국주의 시대에는 충분한 전례가 있는 낯설지 않은 과정이었다.
거문도에 남아있는 영국인들의 묘지. 출처: JayHyuck Shin from Seoul, Korea — DSCN1901, CC BY-SA 2.0
잊혀진 ‘자주국’
1887년 2월, 영국 해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의 승리도, 정의의 회복도 아니었다. 조선의 항의가 받아들여졌기 때문도 아니었다. 왕이 보낸 문서와 외교적 호소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결정적인 것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약속이었다.
러시아가 외교 채널을 통해 영국에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던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으므로, 그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되는 순간 섬을 유지할 명분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하여 함대는 닻을 올렸다. 왔을 때처럼 조용하게, 설명도 없이, 작별 인사도 없이. 배상은 없었다. 사과도 없었다. 국제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은 2년 동안 타국의 영토를 점령했다가, 전략적 필요가 사라지자 떠났다. 마치 잠시 맡아 두었던 물건을 돌려주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불과 10년 뒤,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주국’임을 명문화한다. 그러나 그 선언은 진정한 독립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의 영향력이 사라진 자리에 일본의 영향력이 들어설 길을 열어 주었다. 조선의 운명은 여전히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의 고위 인사들은 도쿄에서 비공식 회담을 갖고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한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고, 일본은 조선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회담은 훗날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알려지게 된다. 조선은 그 자리에 없었다. 협상 대상이 아니라, 협상 결과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테이블에 앉아 세계의 지도를 나누고, 약소국은 그 결과를 통보받는다.
거문도 사건 역시 같은 구조 속에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합의하자, 조선의 의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섬은 점령될 때도, 반환될 때도 조선의 결정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후 반복될 역사의 예고편 같은 사건이었다. 조선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 나라로 남아 있었고, 세계 질서 속에서 언제든 교환 가능한 공간으로 취급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군사 기지였고, 누군가에게는 완충 지대였으며, 누군가에게는 협상 카드였다.
거문도 사건은 그 긴 악몽의 첫 장면과도 같았다.

청나라 군대와 영국 왕립 해군의 삽화. 출처: Scanned image of newspaper., 퍼블릭 도메인
망각의 구조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 근현대사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개항,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마침내 35년에 이르는 일제강점기까지.
그 압도적인 서사 앞에서, 그보다 조금 앞서 있었던 일들은 마치 해변의 작은 조약돌처럼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거문도 사건 역시 그렇다. 교과서에 등장하더라도 단 한 줄, 많아야 두 줄.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했다가 철수했다”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 뒤에는, 제국들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이미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더 이상 고립된 왕국이 아니었고, 동시에 스스로를 지킬 만큼 강한 나라도 아니었다. 영국, 러시아, 청, 일본 등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나라들이 이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그 경쟁의 결과 중 하나였을 뿐, 시작은 아니었다.
현시대에 영국은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상 ‘다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일 거다. 거문도는 당시 영국 해군에게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지구 곳곳에 기지를 두고 있었고,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거문도는 수많은 작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도 아니었고, 영토 획득도 아니었으며,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사건도 아니었다. 결국 그것은 기록 속 어딘가에 남은 작은 항목, 하나의 각주로 남았다.
역사는 중심과 주변에서 다르게 기억된다. 제국의 중심에서는 사소해서 잊히고, 주변에서는 더 큰 비극에 가려져 사라진다.
이것이 망각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국의 시대가 기억을 처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거문도의 언덕에는 지금도 작은 묘지가 남아 있다. 바다를 향해 열린 경사면 위에, 바람과 염분에 닳은 비석들이 서 있다. 거기에는 영어 이름이 새겨져 있다. 태어난 도시도, 계급도, 사망 연도도 낯선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왜 조선의 남쪽 끝에 묻혀 있는지, 대부분의 한국인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돌들은 말없이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한다. 역사는 정해진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결과만이 유일한 가능성도 아니며, 이 땅의 운명은, 훨씬 더 많은 갈림길과 밤들을 지나왔다는 것을. 안개 속에서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던 그 새벽처럼,조용하고, 예고 없이, 그리고 한번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 돌은 묻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릴 한 장면의 역사가 되어, 남해의 바람 속에서 오래도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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