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세계는 트럼프의 그린란드 인수 요구를 두고 숨을 죽였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는 그린란드를 가질 것이다.” 이 발언은 NATO 동맹국인 덴마크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돼 온 서구 안보 질서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월 21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트럼프는 돌연 태도를 바꿨다. NATO 사무총장 마크 뤼터와의 회담 이후, 그는 “그린란드에 관한 미래 협정의 틀(framework)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군사적 압박은 거둬들였고, 유럽 8개국을 상대로 예고했던 관세 위협도 일단은 사라졌다. 그“협정”이 무엇인지, 정작 당사자인 그린란드와 덴마크는 전혀 들은 바 없다고 말했지만.
혼란 속에서 한 가지 해법이 조용히 떠올랐다. 영국의 텔레그래프 지는 사이프러스[1]의 영국 주권 기지 모델을 제안했다. 뉴욕타임스도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같은 방안을 보도했다.
그린란드 내 작은 지역들의 주권을 미국에 넘기되, 나머지는 덴마크-그린란드가 유지하는 것. 1960년 사이프러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영국이 두 개의 군사 기지 지역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 의 주권을 보유하기로 합의했던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국 독자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나라 사이프러스에, 왜 지금도 영국의 영토가 남아 있는가? 1960년에 독립했다면, 어떻게 영국이 여전히 그 땅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세기 말, 제국들의 게임이 한창이던 그 시절로.

사이프러스 위치. 출처: 구글 지도
사이프러스, 제국들의 판도에 오르다
지중해 동쪽 끝, 터키 남쪽에서 불과 6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 사이프러스. 하지만 바로 그 지리적 위치가 이 섬의 운명을 결정했다.
1571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사이프러스를 정복했다. 이후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섬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병자’라 불릴 만큼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러시아는 남하를 노렸고, 영국은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19세기 영국 제국주의 정책의 핵심은 인도로 향하는 해상로를 보호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팽창하는 러시아에 맞서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이어진 크림 전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1875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의 핵심 지분을 매입하면서 사이프러스는 갑자기 “매우 편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러시아-터키 전쟁이 발발했고, 러시아가 승리를 거두면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오늘날의 이스탄불이 위협에 처했다. 이에 영국이 개입했다. 그리고 1878년 6월 4일, 이른바 ‘사이프러스 협약(Cyprus Convention)’이 체결된다.
영국은 러시아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보호하는 대가로 사이프러스를 임대받았다. 영국의 목적은 분명했다. “동지중해에서 기지를 확보해, 카프카스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작전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사이프러스가 처음부터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고, 영국은 매년 93,000파운드를 오스만 술탄에게 지불했다. 이는 섬 인구의 약 24%를 차지하던 무슬림 주민들의 반발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통치 권한은 영국 고등판무관의 손에 있었다.
1573년 사이프러스 지도, 요하네스 판 도이테쿰 제작. 출처: By Abraham Ortelius, Public Domain
제1차 세계대전과 완전한 합병
1914년, 역사의 바퀴가 다시 한 번 돌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 편에 섰다. 이에 영국은 1914년 11월 5일, 1878년 체결된 협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하며 사이프러스를 완전히 합병했다.
1915년이 되자, 영국은 그리스에 사이프러스를 넘기겠다는 제안을 했다. 대신 불가리아를 공격해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스는 이를 거절했다. 이는 그리스계 사이프러스인들이 오랫동안 갈망해 온 ‘에노시스(enosis)’, 즉 그리스와의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역사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1923년, 로잔 조약을 통해 새로 탄생한 터키 공화국은 영국의 사이프러스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어 1925년, 사이프러스는 영국의 왕실 직할 식민지, 이른바 크라운 콜로니(Crown Colony)가 됐다.
그러나 사이프러스인들에게는 비극적인 역설이 있었다. 다수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처음에는 영국의 통치를 환영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보다는 나을 것이라 기대했고, 언젠가는 그리스와의 통합이 이뤄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에노시스를 단호히 거부했다. 사이프러스는 영국에게 너무나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881–1922

1922–1960
영국령 사이프러스 국기
피의 독립 투쟁, EOKA와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 질서는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유엔이 등장하고 ‘민족 자결’과 ‘탈식민화’가 국제사회의 핵심 가치로 떠오르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곳곳에서 식민지들이 하나둘 독립을 선언했다. 사이프러스 역시 이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섬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그리스계 사이프러스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리스와 하나가 되자는 에노시스 운동이 공개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50년, 훗날 사이프러스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마카리오스 대주교가 주도한 비공식 국민투표에서, 그리스계 사이프러스인의 약 96%가 그리스와의 통합에 찬성 의사를 밝혔다. 이는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섬 안팎에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에 충분했다.
물론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이미 이집트에서 철수를 압박받고 있었고, 수에즈 운하 인근의 군사 거점을 잃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사이프러스는 중동과 동지중해를 관할하는 영국 중동 사령부의 핵심 거점으로 떠올랐다. 수에즈 운하, 중동 지역,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전략적 가치가 커진 석유 수송로까지, 사이프러스는 영국의 군사·외교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중심지나 다름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치적 요구는 점차 무장 투쟁으로 변했다. 1955년 4월 1일, 그리스 출신 장교 게오르기오스 그리바스 중령, 일명 ‘디게니스’가 이끄는 EOKA(사이프러스 투쟁 민족조직)가 에노시스를 목표로 영국 통치에 맞선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폭탄이 공공건물을 강타했고, 영국 병사들과 영국에 협력한 현지인들이 공격의 대상이 됐다. 같은 해 11월 26일, 영국 총독은 섬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마카리오스 대주교는 EOKA와 연계됐다는 혐의로 체포돼, 인도양의 세이셸로 추방됐다. 그러나 이는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충돌과 보복이 이어졌고, 사이프러스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국군을 포함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인구의 약 18%를 차지하던 터키계 사이프러스인들의 시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에노시스가 실현될 경우, 자신들이 소수 민족으로 전락해 정치적·문화적 권리를 잃을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내세운 대안이 바로 ‘탁심(taksim)’, 즉 섬의 분할이었다. 사이프러스를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각각 통치하는 두 지역으로 나누자는 주장으로, 이는 이후 그리스와 터키라는 두 ‘본국’이 이 분쟁에 직접 개입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56년 니코시아 병원 전투 당시, 시위대 및 군중과 대치중인 영국군. 출처: By British Colonial Government - http://www.nam.ac.uk/exhibitions/online-exhibitions/cyprus-1954-2008, Public Domain
런던-취리히 협정, 독립의 대가
195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사이프러스 이슈는 단순한 식민지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영국이 모두 얽힌 국제 분쟁으로 번져 있었다.
그리스는 그리스계 주민들의 뜻에 따라 에노시스를 지지했고 터키는 섬에 살고 있던 터키계 주민들의 안전과 권리를 명분으로 탁심을 주장했다. 영국은 식민지 통치를 유지하기보다는, 최소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 거점만이라도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1959년, 상황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장 충돌로 인한 사망자는 계속 증가했고, 국제 여론도 급속히 악화됐다. 그해 2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그리스와 터키 정부가 먼저 원칙적 합의에 도달했다. 핵심은 사이프러스를 그리스에도, 터키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 국가로 만들고, 두 공동체가 권력을 나누는 체제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같은 달 런던에서는 영국 정부와 그리스계·터키계 사이프러스 대표들이 이 합의안을 공식적으로 수락했다. 이른바 ‘런던-취리히 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 그리스, 터키는 사이프러스의 독립과 헌법 질서를 보장하는 ‘보증국’이 됐다. 다시 말해, 세 나라는 사이프러스의 정치적 균형이 깨질 경우 개입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60년 8월 16일, 사이프러스는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완전한 이별은 아니었다. 협정의 조건에 따라 영국은 섬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 두 지역에 대한 주권을 유지했다. 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립국 영토 안에 외국의 ‘주권 기지 지역(Sovereign Base Areas)’이 남게 된 사례였다.
두 지역의 총면적은 98제곱마일로(254제곱킬로미터) 사이프러스 전체 면적의 약 3%에 불과하다. 아크로티리는 47.5제곱마일, 데켈리아는 50.5제곱마일이다. 크지 않은 땅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영국이 이 지역들의 주권을 끝까지 고수한 이유는 분명했다. 아크로티리 왕립 공군 기지를 포함한 군사 기지의 사용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지중해 동쪽 끝, 수에즈 운하와 중동에 가까운 사이프러스의 위치는 냉전이 막 시작되던 시기, 영국과 서방 진영에게 중동과 동지중해를 잇는 핵심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왼쪽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협상에서 그리스 총리 카라만리스, 터키 외무장관 조를루, 터키 총리 멘데레스, 그리고 그리스 외무장관 아베로프. 출처: By Nationaal Archief, CC BY 4.0
국가 속의 국가
사이프러스의 주권 기지 지역(Sovereign Base Areas)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형태다. 완전한 식민지도 아니고, 단순한 군사 기지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일종의 ‘주권이 남아 있는 군사 영토’에 가깝다.
법적으로 이 지역들은 영국 해외 영토(British Overseas Territory)에 속한다. 다시 말해, 콘월이나 서섹스처럼 영국의 완전한 주권이 미치는 땅이다. 유니언 잭이 게양되고, 영국 국왕이 국가 원수이며, 행정과 국방 관할은 영국 국방부가 맡는다. 형식만 놓고 보면, 이곳은 분명히 ‘영국 땅’이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전체 토지의 약 60%는 개인 소유지로, 영국인뿐 아니라 사이프러스 시민들도 땅을 갖고 있다. 영국 국방부가 직접 소유한 땅은 약 20%에 불과하다. 나머지 20%는 숲, 도로, 강, 염호(소금 호수) 같은 공공 국유지다. 즉, 영국의 주권 아래 있지만, 실제로는 사이프러스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공간이 크게 겹쳐 있는 셈이다.
인구 구성도 이를 잘 보여준다. 2020년 기준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은 약 1만 8,195명이다. 이 가운데 약 1만 1,000명은 사이프러스 시민이고, 영국군과 군 관련 계약직 인력, 그리고 그 가족은 약 7,195명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주민의 다수는 영국인이 아니라 사이프러스인이다.
법 체계 역시 이중적이다. 기본 틀은 1960년 8월, 사이프러스가 독립하던 시기의 식민지 법을 바탕으로 한다. 다만 시대 변화에 맞춰 필요할 때마다 개정되며, 가능한 한 사이프러스 공화국의 법과 동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치안은 주권 기지 경찰이 담당하고, 비군사 범죄는 주권 기지 법원이 관할한다. 군사 문제만이 영국 군사 당국의 직접 통제 아래 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서 사용하는 화폐는 영국 파운드가 아니라 유로화라는 거다. 2008년 1월 1일, 사이프러스 공화국이 자국 통화를 사이프러스 파운드에서 유로로 전환하자, 주권 기지 지역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영국 해외 영토 가운데 유로화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이 모든 행정과 운영을 관통하는 정책 목표는 세 가지다. 첫째, 군사 기지로서의 효과적인 기능을 보장할 것. 둘째, 사이프러스 공화국과 완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할 것. 셋째, 그곳에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안전을 보호할 것.
이처럼 사이프러스 주권 기지 지역은, 지도 위에서는 분명 ‘영국 영토’로 표시되지만, 실제로는 영국과 사이프러스의 역사, 안보, 일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특별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키프로스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아크로티리와 남동쪽에 위치한 데켈리아. 분홍색으로 표시. 출처: By CIA, Hoshie - CIA World Factbook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dx.html, Public Domain
서방 진영의 핵심 연결 고리
사이프러스 주권 기지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보다도 그 전략적 위치에 있다. 지중해 동쪽 끝에 자리한 이 섬은 유럽, 중동, 러시아 남부를 잇는 정보와 군사 활동의 교차점에 놓여 있다. 냉전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단순한 군사 주둔지를 넘어 서방 정보망의 중요한 ‘눈과 귀’ 역할을 해왔다.
1970년대 초, 미국은 데켈리아에 ‘코브라 슈(Cobra Shoe)’로 알려진 수평선 너머 레이더(Over-the-Horizon Radar)를 설치했다. 이 시설은 소련의 항공기 운용과 미사일 시험을 장거리에서 감시할 수 있는 장비로, 냉전기 미·소 간 군사적 긴장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데켈리아 인근 아요스 니콜라오스 지역은 또 다른 이유로 주목받았다. 이곳은 서방 정보기관들이 운영하는 글로벌 감청 네트워크, 이른바 ‘에셜론(ECHELON)’ 체계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영국 정보기관 GCHQ의 핵심 도청 시설이 위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동과 러시아, 북아프리카를 오가는 통신을 감시하기에 지리적으로 매우 유리한 자리다.
1974년, 터키가 사이프러스를 침공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 사건 이후 미국과 터키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고, 미국은 터키 영토에 있던 여러 정보 기지에 대한 접근 권한을 잃게 됐다. 그 결과, 사이프러스에 있는 영국 기지의 중요성은 미국에게도 급격히 커졌다. 미국 정부는 영국이 이 지역에서 철수할 경우, 자국이 GCHQ를 통해 접근하던 핵심 정보망을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미국이 기지 운영 비용을 분담하기로 하면서, 영국의 철수 계획은 철회됐다.
이후 미국의 기지 활용은 더욱 늘어났다. 한때는 시리아 상공을 감시하기 위한 록히드 U-2 고고도 정찰기 비행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현지의 불필요한 관심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비행은 주로 야간에만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에는 약 3,000명의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RAF 아크로티리는 영국이 보유한 해외 기지 가운데 가장 분주한 곳으로 꼽힌다. 중동 지역 작전의 핵심 전초기지 역할을 하며, 매년 영국 공군 곡예비행단 ‘레드 애로우스(Red Arrows)’가 시즌을 앞두고 최종 훈련을 진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이프러스 주권 기지는 지도 위의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정보전과 군사 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동지중해와 중동을 잇는 서방 진영의 핵심 연결 고리라 할 수 있다.
데켈리아 국경에 설치된 경고문. 영어, 그리스어, 터키어로 작성되어있다. 출처: By Dickelbers - Own work, CC BY-SA 3.0
그린란드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
이제 다시 그린란드로 돌아가 보자.
트럼프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상은 비교적 명확하다. 피투피크(Pituffik) 우주기지, 냉전 시기 건설된 캠프 센추리(Camp Century) 터널, 그리고 과거 17곳에 달하던 군사·감시 시설의 부지 등 현재 그린란드에 있는 미군 시설들을 미국의 ‘주권 영토’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이프러스의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처럼, 독립국 영토 안에 외국의 주권 기지가 존재하는 형태를 그린란드에서도 재현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그린란드는 면적이 약 83만 6,000제곱마일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섬이며, 인구는 약 5만 6,000명에 불과하다. 수백, 심지어 수천 제곱마일에 이르는 얼음으로 덮인 무인 지역을 미국의 주권 영토로 지정하더라도, 당장의 일상에 직접적인 변화를 겪는 사람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사이프러스의 주권 기지는, 1960년 독립을 둘러싼 협상의 산물이었다. 그리스계와 터키계 사이프러스인 모두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영국은 섬 전체를 유지하는 대신 최소한의 전략 거점만이라도 지키기를 원했다.
EOKA의 무장 투쟁으로 수백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국제 여론도 악화되면서 영국 역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결국 양측은 고통스러운 타협을 통해, 사이프러스는 독립을 얻고, 영국은 두 곳의 주권 기지를 유지하는 절충안을 받아들였다.
그린란드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린란드는 덴마크로부터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해 왔지만, 미국에 주권을 넘기려는 움직임은 없다. 그린란드 정부가 반복해서 강조해 왔듯, “주권 포기는 레드라인”이다. 독립을 위한 대가로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도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미국은 이미 1951년 덴마크와 체결한 협정을 통해 그린란드 내에서 군사 기지를 운영할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 사이프러스에서 영국이 주권 기지를 고집했던 이유는, 독립 이후 새 정부가 기지 사용을 제한하거나 철수 요구를 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린란드에서는 그런 위험이 상대적으로 작다. 덴마크는 미국과 같은 NATO 동맹국이며, 군사 협력의 법적 틀도 이미 마련돼 있다.
아크로티리 시내. 출처: By A.Savin - Own work, FAL
어두운 유산
1878년 영국이 사이프러스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임대’했을 때, 정작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1960년 독립 협상에서도, 사이프러스인들 다수는 주권 기지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권은 거의 없었다. 영국은 그것이 없이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린란드에서 목격하는 장면은, 21세기판 같은 게임일지도 모른다. 무대는 바뀌었고, 주인공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지만, 강대국이 작은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려는 권력의 논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이프러스 주권 기지의 역사는, 타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 타협이 언제나 공정하거나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점도 일깨운다. 제국주의 시대가 끝난 지 오래된 지금도, 그 유산은 여전히 지도 위에 남아 있고, 주권의 경계선에 새겨져 있으며, 작은 섬의 하늘을 가르는 유니언 잭과 함께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린란드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프레임워크’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지중해의 작은 기지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주권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언제나 누군가가 치른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대체로, 선택권이 가장 적은 사람들이다.
[1] 한국에서는 ‘키프로스’라는 표기가 더 널리 사용된다. 다만 영어권에서는 Cyprus를 ‘사이프러스’에 가깝게 발음하며, 이 글에서는 두 표기가 같은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을 전제로, 개인적으로 익숙한 ‘사이프러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린란드와 관련해 영국령 인도양 지역에 속한 차고스 제도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글은 오호츠크 리포트 기고글 ‘차고스 제도, 대영제국의 마지막 그림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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