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오늘 아침 가장 먼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연인이나 배우자였을 수도 있고, 가족이었을 수도 있고, 출근길에 마주친 카페 직원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당신은 그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제 어떤 말을 나눴는지, 그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를. 이 모든 판단은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기억이 그 판단의 토대를 미리 깔아두었기 때문이다.
소설 『내가 잠들기 전에』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처음 본다. 그는 스스로를 벤, 크리스틴의 남편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달리 방법이 없는 크리스틴은 그 말을 받아들인다. 믿어서가 아니라, 믿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어서.
하지만 어느 날 아침, 그녀의 손에 일기장이 쥐어진다. 비밀리에 연락해온 의사가 건네준 것이다. 일기장을 펼치면 어제의 크리스틴이 써놓은 문장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의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믿을 수 없는 화자,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세계
영국 추리문학에는 ‘믿을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오래된 전통이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신뢰할 수 없다는 설정이다. 독자는 화자가 전달하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행간을 읽고, 모순을 찾고, 진실을 스스로 재구성해야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는 이 기법의 역사에서 가장 대담한 실험을 감행한 작가로 꼽힌다. 1926년 출간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The Murder of Roger Ackroyd)』에서 그녀는 독자가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던 바로 그 목소리를 범인으로 만들었다. 출간 당시 영국 문단은 큰 충격에 빠졌다. 배신당한 느낌이라는 불만도 있었고, 천재적인 도약이라는 찬사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날 이후 영국 추리소설의 독자들은 화자를 쉽게 믿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이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기서 믿을 수 없는 화자는 크리스틴 자신이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녀가 전달하는 정보 자체가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독자는 크리스틴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지만, 동시에 그 눈이 얼마나 흐릿한지를 안다. 이 이중적인 긴장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적 엔진이다.
더 섬뜩한 것은 크리스틴을 둘러싼 세계도 믿을 수 없다는 점이다. 남편 벤은 매일 같은 설명을 반복한다. 의사는 남몰래 전화를 걸어온다. 어제의 일기는 오늘의 현실과 어긋나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크리스틴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판단할 기억이 없다.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도구는, 매일 밤 자신이 써놓은 일기뿐이다.
1926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The Murder of Roger Ackroyd)』 초판 커버. 출처: PD-US
신뢰의 토대, 데이비드 흄과 반복의 철학
신뢰는 어디서 오는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18세기에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흄은 1739년 출간한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se of Human Nature)』에서 인간의 믿음이란 이성적 추론이 아니라 반복된 경험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태양이 내일도 뜰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매일 그래왔기 때문이다. 믿음은 습관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신뢰할 만한 존재임을 이성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반복적으로, 일관되게,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해왔다는 경험의 축적이 신뢰를 만든다. 오래된 친구를 믿는 것은 그와 함께한 수많은 시간들이 증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에게는 이 축적이 없다. 벤이 아무리 매일 아침 친절하게 행동한다 해도, 그것은 크리스틴에게 반복으로 쌓이지 않는다. 어제의 친절은 밤새 지워진다. 오늘 아침의 벤은 언제나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이다. 흄의 언어로 말하자면, 크리스틴은 신뢰의 습관을 형성할 수 없다. 그녀는 매일 아침, 아무런 경험적 근거 없이, 신뢰를 처음부터 다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단지 불편함의 문제가 아님을 소설은 서서히 드러낸다. 근거 없는 신뢰는 취약하다. 그리고 취약한 신뢰는 조작될 수 있다.
1754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잉글랜드의 역사(The History of England)』 제1권에 실린 흄의 판화. 출처: Unknown author - Google/LIFE Images, Public Domain
크러치 엔드의 닫힌 문들
런던 북부 크러치 엔드(Crouch End)의 테라스 하우스들은 저마다 작은 정원과 닫힌 문을 갖고 있다. 이 닫힌 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웃들은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영국 중산층의 삶은 오래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조직되어 왔다. 사생활은 신성하고, 개입은 무례하며, 표면의 평온은 유지되어야 한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 영국 사회를 연구한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분리된 영역(separate spheres)’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작동했다고 설명한다. 공적 영역은 남성의 것이고, 사적 영역, 즉 집은 여성의 것이었다. 집은 세상의 혼돈으로부터 보호받는 성역이어야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성역 안에서 여성들은 가장 취약했다.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공간이었으니까.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테라스 하우스에서 벌어지는 크리스틴의 이야기는 이 역사적 맥락 위에 놓인다. 크리스틴은 집 안에 갇혀 있다. 기억이 없기 때문에 혼자 외출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녀의 세계는 매일 아침 그 테라스 하우스 안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신뢰해야 한다고 배운 단 한 사람과 마주한다.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스라이팅, 무대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현실로
1938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의 연극 한 편이 초연되었다. 제목은 『가스등(Gas Light)』이었다. 남편이 아내를 조작하기 위해 가스등의 밝기를 몰래 낮추고, 아내가 “등이 어두워진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당신이 이상한 거야, 등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라고 부정하는 이야기다. 반복된 현실 부정을 통해 아내는 자신의 인식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 연극은 1944년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졌고, 그 제목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이후 심리학 용어로 자리 잡았다.
크리스틴의 상황은 가스라이팅이 작동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다. 그녀는 어제를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 어제의 현실을 다르게 설명해도, 그녀는 반박할 기억이 없다. “당신이 어제 그렇게 말했잖아요”라는 말에 “아니요,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라고 대답할 근거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인식이 맞는지 틀린지를 스스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독자는 조금씩 균열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벤이 설명하는 과거와, 크리스틴이 일기에 기록한 단서들 사이의 어긋남. 이것이 크리스틴의 혼란스러운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불일치인지를 독자는 함께 추적하게 된다. 왓슨은 이 과정을 매우 정교하게 설계했다. 독자 역시 크리스틴처럼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페이지를 넘긴다.
일기,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위태로운 편지
크리스틴은 매일 밤 일기를 쓴다. 내일의 자신에게 남기는 메모처럼. 그러나 이 일기마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의 크리스틴도 혼란스러웠고, 두려웠고, 잘못 판단했을 수 있다. 어제의 그녀가 쓴 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더 나아가 일기가 발견되지 않도록 숨겨져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일기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알리면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기를 쓰는 행위는 인류의 오래된 자기 증언 방식이다. 17세기 영국의 새뮤얼 피프스(Samuel Pepys, 1633–1703)는 1660년부터 1669년까지 9년에 걸쳐 일기를 썼다. 런던 대화재, 페스트의 창궐, 왕정복고의 혼란을 목격한 한 인간의 생생한 기록이다. 피프스의 일기가 역사적으로 귀중한 이유는 그것이 공식 기록이 아니라 한 개인의 내밀한 인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썼다. 기억하기 위해.
크리스틴도 자신을 위해 쓴다. 기억하기 위해. 그러나 피프스와 달리, 그녀의 일기는 공유되어야 한다. 내일의 자신과 말이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가장 사적인 글쓰기가 동시에 타인을 향한 편지가 되는) 정체성의 분열을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연속된 존재인가, 아니면 서로에게 편지를 써야 하는 낯선 사람들인가.
새뮤얼 피프스가 남긴 일기장들. 출처: Samuel Pepys/Wheatley - H.B. Wheatley, ed, The Diary of Samuel Pepys: Pepysiana (London, 1899)., Public Domain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조작될 수 있는가
크리스틴의 이야기는 극단적이다. 하지만 기억에 의존하는 신뢰가 얼마나 취약한지는 우리 일상에서도 드러난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는 미국의 인지심리학자로, 수십 년에 걸쳐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변형되는지를 연구해왔다. 그녀의 실험들은 충격적인 결론을 반복해서 내놓는다. 목격자의 기억은 사후에 주어진 정보에 의해 변형될 수 있고,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의 기억도 심어질 수 있다. ‘잘못된 기억 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이라는 개념도 그녀의 연구를 통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즉, 기억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기억은 녹화된 영상이 아니라, 매번 재구성되는 이야기에 가깝다. 크리스틴은 기억이 없어서 조작에 취약하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이 있으면서도, 그 기억 자체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조금씩 편집되어 있을 가능성을 얼마나 의심하는가.
그래도 믿는다는 것
그렇다면 신뢰는 불가능한가. 기억이 불완전하고, 기억 자체도 조작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가.
20세기 폴란드 출신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은 현대 사회를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로 설명했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어제의 확실성이 오늘의 불확실성이 되는 세계. 그는 이 세계에서도 신뢰는 필요하다고, 아니 더욱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확실성이 없기 때문에 신뢰가 필요한 것이다. 신뢰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내딛는 도약이다.
크리스틴도 매일 아침 이 도약을 한다. 기억 없이, 근거 없이, 그녀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눈앞의 남자를 일단 받아들인다. 이것이 순진함인지, 용기인지, 아니면 함정인지를 그녀는 알지 못한다. 독자도 알지 못한다. 소설은 그 알 수 없음 속에서, 인간이 신뢰라는 것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준다.
기억 없이도 사람은 누군가를 믿으려 한다. 그것이 어쩌면 기억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당신 주변의 신뢰들을 한 번 들여다보길 바란다. 당신이 당연하게 믿어온 것들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그 뿌리가 기억이라면, 그리고 기억이 불완전하다면, 당신의 신뢰는 얼마나 견고한가.
크리스틴은 오늘 밤도 일기를 쓸 것이다. 내일 아침의 자신에게. 제발 이것만은 기억해달라고.
생각해볼 질문들
- 신뢰의 토대에 관하여 당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신뢰의 근거는 무엇인가. 함께 보낸 시간인가, 그가 반복적으로 보여준 행동인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감각인가. 만약 그와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 신뢰는 기억의 산물인가, 아니면 기억보다 더 깊은 무언가인가.
- 기억의 신뢰성에 관하여 당신이 확실하다고 믿는 기억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 기억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형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여러 연구가 보여주듯, 기억은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기억에 기반한 신뢰와, 기억 없이 내리는 신뢰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가.
- 일기와 자아의 연속성에 관하여 크리스틴은 매일 밤 내일의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사실상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10년 전 일기를 읽을 때 그것을 쓴 사람이 ‘나’라고 느끼는가, 아니면 낯선 타인이 쓴 것처럼 느껴지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조용히, 어제의 자신과 단절되는가.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 Portishead – ‘Wandering Star’ (1994) 브리스틀 출신의 트립합 밴드 포티스헤드는 1990년대 영국 음악 특유의 불안과 서늘함을 가장 정교하게 표현한 그룹이다. 이 곡은 낮게 깔리는 베이스와 베스 기번스의 유령 같은 목소리가 뒤섞이며, 무언가를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감각을 정확히 포착한다. 크리스틴이 벤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 이 음악 안에 있다.
다음 주 예고
크리스틴의 일기에는 오늘 벤이 한 말과 어긋나는 문장들이 있다. 사소한 불일치처럼 보인다. 날짜, 장소, 작은 사실들. 하지만 사소한 균열이 쌓이면, 어느 순간 벽이 무너진다.
다음 화에서는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 앞에 선다. 기억이 서술을 만들고, 서술이 진실을 만든다면, 서술이 조작될 때 진실은 어디로 가는가. 영국 문학에서 ‘신뢰할 수 없는 서술’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애거사 크리스티에서 길리언 플린(Gillian Flynn)의 『나를 찾아줘(Gone Girl)』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따라가며, 크리스틴의 일기가 왜 진실의 도구인 동시에 함정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우리가 읽는 이야기는 항상 누군가의 시선을 통과한다. 그 시선이 흐릿할 때,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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