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가 잠들기 전에』의 주인공 크리스틴의 일기에는 날짜가 적혀 있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일기를 펼쳐 어제의 자신이 써놓은 문장을 읽는다. 남편인 벤이 말했다고 기록된 어떤 사실이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벤이 같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걸 보며, 세부 사항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장소가 다르다거나, 혹은 시점이 다르다거나, 혹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람이 다르다거나. 여기서 크리스틴은 혼란에 빠진다. 어제의 일기가 틀린 것인가, 오늘의 벤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일기를 잘못 쓴 것인가.
그녀에게 답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이 장면은 소설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지나간다. 폭발적인 충돌도, 극적인 발견도 없다. 그저 작은 어긋남 하나. 하지만 독자는 이 순간에서 알아챈다. 무언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무언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크리스틴과 함께 이미 읽은 페이지들을 머릿속에서 되감기 시작한다.
저자 왓슨은 이 균열을 의도적으로 사소하게 만들었다. 독자가 처음에는 그냥 넘길 만큼. 하지만 사소한 균열이 쌓이면, 어느 순간 벽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벽이 무너지는 순간, 독자는 처음 페이지로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우리가 믿고 읽어온 이 서술이, 처음부터 얼마나 흔들리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누가 이야기를 통제하는가
소설은 언제나 누군가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그 목소리가 우리에게 그 소설에 담긴 세계를 보여준다. 어떤 장면을 보여줄지, 어떤 장면을 생략할지, 어떤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그 목소리를 내는 서술자다. 우리는 그 선택들을 통해 이야기를 경험한다. 대부분의 경우, 독자는 이 서술자를 암묵적으로 신뢰한다. 설령 서술자가 악당이라 해도, 적어도 그가 독자에게만큼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소설 읽기의 기본적인 계약이다.
영국 문학은 오래전부터 이 계약을 의심해왔다. 서술자가 독자에게도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서술자 스스로가 진실을 모른다면. 혹은 서술자가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추고 있다면.
이것이 ‘믿을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가장 대담하게, 가장 체계적으로 탐구해온 장르가 바로 영국 추리소설이다.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가 그린 ‘뮌히하우젠 남작이 고래에게 삼켜지는 이야기’를 묘사한 삽화. 뮌히하우젠 남작의 이야기와 같은 허풍담(tall tales)에는 종종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가 등장한다. 출처: http://gravures.ru/photo/gjustav_dore/prikljuchenija_barona_mjunkhgauzena/115-1-0-0-2, Public Domain
애거사 크리스티 – 가장 믿었던 목소리의 배신
1926년, 영국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The Murder of Roger Ackroyd)』이 출간되었다. 크리스티는 이미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이 소설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충격을 안겼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는 화자, 독자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범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결정적인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독자는 화자가 선택한 정보만을 받아 읽었고, 그 선택의 공백 속에 진실이 숨어 있었다.
출간 당시 영국 독서계의 반응은 격렬했다. 일부 독자들은 배신당했다고 항의했다. 추리소설에는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데, 서술자 자신이 범인이라는 설정은 그 규칙을 근본적으로 위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독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추리소설의 진화라고 반겼다. 범인을 찾는 게임이 아니라, 서술 자체를 의심하는 더 깊은 게임으로 이끌었다는 거다.
크리스티는 이 소설 이후에도 서술의 신뢰성을 가지고 노는 실험을 계속했다. 그녀가 탐구한 핵심 질문은 언제나 같았다. 우리가 읽는 이야기는 진실인가, 아니면 누군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버전의 진실인가.

1910년대 애거사 크리스티. 출처: The Christie Archive Trust, Public Domain
대프네 듀 모리에 – 이름 없는 화자의 세계
크리스티가 서술자의 정체를 문제 삼았다면, 다프네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 1907–1989)는 서술자의 인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
1938년 출간된 『레베카(Rebecca)』의 화자는 이름조차 없다. 그녀는 갓 결혼한 맨덜리 저택의 새 안주인이지만, 저택 전체가 전처 레베카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화자는 레베카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녀가 아는 레베카는 오직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저택 곳곳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재구성된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완벽하고 아름답고 압도적이다. 그래서 화자는 점점 더 위축된다.
하지만 독자는 서서히 깨닫는다. 화자가 구성한 레베카의 이미지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가 이야기 전체를 왜곡한다. 듀 모리에는 서술자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인식의 한계만으로도 진실이 얼마나 비틀릴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내가 잠들기 전에』 속 크리스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서술에는 매일 밤 거대한 공백이 생긴다.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벤의 설명이고, 의사의 말이고, 어제의 일기다. 크리스틴은 이 조각들을 모아 하루를 구성하지만, 독자는 그 조각들이 처음부터 온전했는지 알 수 없다.
1930년대 다프네 듀 모리에. 출처: The Chichester Partnership (copyright), University of Exeter (publication), Copyrighted free use
길리언 플린 – 두 개의 목소리, 두 개의 진실
2012년, 미국 작가 길리언 플린(Gillian Flynn)의 『나를 찾아줘(Gone Girl)』가 출간되면서 심리 스릴러의 지형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두 개의 목소리로 구성된다. 아내 에이미의 일기와, 남편 닉의 현재 서술. 독자는 두 목소리를 번갈아 읽으며 실종된 에이미를 찾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런데 두 목소리가 그리는 그림은 점점 어긋난다. 같은 사건을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독자는 어느 쪽이 진실인지 판단해야 하지만, 판단할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두 목소리 모두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플린은 여기서 서술의 게임을 한 단계 더 밀어붙였다. 단순히 화자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상충하는 서술이 동시에 존재할 때 독자는 어떻게 되는가.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 판단을 강요받을 때, 독자는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누구의 말을 먼저 믿는지는 독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플린보다 한 해 앞서 출간되었지만, 같은 시대적 감수성 위에 서 있다. 두 소설 모두 진실이 단일하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서술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서술이 조작될 수 있다면, 진실 자체가 조작될 수 있다.
『나를 찾아줘(Gone Girl)』 초판 커버.
일기라는 형식의 역설
일기는 전통적으로 가장 진실한 글쓰기의 형식으로 여겨진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검열 없이, 그 순간의 인식을 날것으로 적어두는 것. 17세기 새뮤얼 피프스의 일기가 역사적 사료로 귀중한 이유도, 공식 기록이 담지 못한 한 인간의 생생한 내면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일기는 사적이기 때문에 진실하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크리스틴의 일기는 처음부터 독자를 전제로 쓰인다. ‘내일의 자신’이라는 독자를. 이 순간 일기는 사적인 기록에서 타인을 향한 편지로 변한다. 그리고 편지는 언제나 상대방을 의식한다.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그 선택의 과정에서 이미 서술은 순수한 기록이기를 멈춘다.
더 나아가, 크리스틴의 일기는 외부에서 접근 가능하다. 그녀가 얼마나 안전한 곳에 숨기든, 누군가 그것을 읽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누군가 그 읽기를 읽었다면, 혹은 그 내용을 알고 있다면, 크리스틴의 일기는 오히려 그녀를 통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녀가 무엇을 의심하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수단으로.
진실을 붙들기 위해 쓴 일기가, 진실로부터 그녀를 더 멀어지게 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이 소설이 일기라는 형식을 선택한 이유다.
1666년 존 헤일스(John Hayls)가 그린 새뮤얼 피프스(Samuel Pepys). 출처: John Hayls - Walthamstow Weekender (file), Public Domain
서술이 현실을 만드는 과정
우리는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서술을 생산하고 소비한다.
누군가와 다툰 다음 날, 우리는 친구에게 어제의 일을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주인공이고, 상대방은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이다. 우리가 한 말 중 좋지 않은 것들은 생략되거나 맥락 속에 희석된다. 이것은 의도적인 거짓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을 정말로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기억은 이미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을 마쳤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는 인간을 ‘서술하는 존재(narrative being)’로 정의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구성함으로써 정체성을 만든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행위가 곧 자아를 만드는 행위다. 그러나 리쾨르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그 이야기가 고정되고 단단해질수록, 우리는 이야기 바깥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일 밤 사라진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아침 다른 사람들이 제공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신의 삶은 이런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자신의 서술이 없기 때문에, 크리스틴은 타인의 서술 위에 자신을 세울 수밖에 없다.
가장 취약한 존재는 자신의 이야기를 빼앗긴 사람이다.
폴 리쾨르. 출처: Juerg Mueller / Scanpix. - https://snl.no/Paul_Ricoeur, CC0
작은 균열들이 쌓이는 방식
크리스틴의 일기에는 벤이 한 말과 어긋나는 내용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날짜가 다르고, 장소가 다르고, 사소한 사실들이 맞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내용 자체 때문이 아니다. 이 불일치가 가리키는 것 때문이다.
만약 벤이 크리스틴에게 진실만을 말해왔다면, 위와 같은 불일치는 없어야 한다. 크리스틴의 기억이 매일 지워지기 때문에, 그녀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도 처음 듣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크리스틴은 반박하지 않는다. 기억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 구성된 것임을 시사한다. 진실은 반복해도 변하지 않지만, 이야기는 반복될수록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크리스틴은 이 균열들을 일기에 기록해둔다. 어제의 크리스틴이 오늘의 크리스틴에게 전달하는 경보처럼. 하지만 오늘의 크리스틴이 그 경보를 읽는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기억이 없으면 균열을 발견해도 전체 그림을 볼 수 없다.
진실을 향해 가는 길 위에서, 크리스틴은 언제나 하루치의 단서만을 손에 쥐고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당신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이야기들을 한 번 의심해보길 권한다. 당신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들. 당신이 누군가에게 들어온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누가 썼는가. 무엇이 생략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야기를 다시 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으려 한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한 문장씩.
생각해볼 질문들
- 당신은 오늘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 그 이야기 안에서 당신이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생략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때, 그것은 이미 편집된 버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생산하는 이야기들 중 순수하게 객관적인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서술이 언제나 선택에 의한 결과라면, 우리는 얼마만큼 이를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타인이 제공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중 상당 부분은 부모나 가족 구성원들이 반복해서 들려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너는 어릴 때 이런 아이였어”, “그때 이런 일이 있었어” 등등.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자신의 기억으로 내면화한다. 당신의 자아 중 얼마만큼이 진정으로 당신 자신의 서술로 만들어졌는가.
- 크리스틴은 일기를 통해 작은 불일치들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균열을 끝까지 추적하는 것은 두렵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것이 지금의 삶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에도 알고 있지만 끝까지 들여다보지 않기로 선택한 균열이 있는가. 진실을 아는 것이 언제나 모르는 것보다 나은가.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 Radiohead – ‘All I Need’ (2007) 라디오헤드의 앨범 『In Rainbows』 수록곡으로, 표면적으로는 사랑 노래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에게 완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불안이 흐른다. 크리스틴이 벤의 서술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의존이 구원인지 함정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잘 표현한 곡이 아닐까 싶다.
다음 주 예고
소설 말미 크리스틴은 끝내 진실에 닿는다. 하지만 그녀가 붙든 것은 진실만이 아니었다.
독자들 역시 소설의 결말 앞에 서면서, 한 달 동안 함께 걸어온 질문들이 하나의 자리로 수렴되는 것을 보게 된다. 기억이 나를 만드는가. 기억 없이 신뢰는 가능한가. 서술은 진실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은 무엇인가.
신경과학은 기억에도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과 사건을 저장하는 의식적 기억과, 감각과 감정을 저장하는 감정 기억은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 새겨진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 환자들도, 슬픈 음악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무엇이 그들을 울게 했는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럼에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인가.
영국 문학은 이 질문을 오래전부터 다른 방식으로 물어왔다. 셰익스피어는 『소네트 116번』에서 사랑은 시간의 광대가 아니라고 썼다. 토머스 하디는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 시를 썼다. 그리고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이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던 시절, 남편 존 베일리는 그녀의 곁을 지키며 회고록을 썼다. 기억을 잃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장 솔직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책이다.
크리스틴과 벤의 이야기도 결국 이 질문 앞에 선다. 벤의 행동은 사랑인가, 통제인가. 같은 행동이 어떤 맥락에서는 헌신으로, 다른 맥락에서는 폭력으로 읽힌다. 기억상실인 배우자를 돌본다는 것의 윤리적 복잡성은 소설 안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오래된 논쟁이다.
마지막 화는 크리스틴의 선택과 함께 끝난다. 그 선택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녀의 마지막 행동은 기억에서 온 것이 아니다. 기억보다 더 깊은 곳에서, 매일 밤 지워지면서도 끝내 지워지지 않았던 무언가에서 온다.
기억한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기억이 없어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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