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윈던(Swindon)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swine dun’, 말 그대로 ‘돼지의 언덕’이라는 말에 닿아 있다. 중세 영어에서 건너온 이 투박한 이름에는 도시의 보잘것없던 시작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잉글랜드 남서부 윌트셔(Wiltshire)의 완만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스윈던은 1086년 『둠스데이 북(Domesday Book)』에 ‘수인두네(Suindune)’라는 이름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이곳은 주변 농촌의 필요를 채우는 작은 시장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1801년 인구는 고작 1,198명. 런던도 아니고, 브리스틀도 아니며, 버밍엄은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찾아갈 이유도, 오래 기억할 까닭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1841년, 단 하나의 결정이 이 마을의 운명을 바꿨다.
마크 해던의 소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의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바로 이 스윈던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소설에서 스윈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크리스토퍼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이자, 처음으로 벗어나야 하는 장소이며, 긴 여정 끝에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이다.
스윈던을 이해하면 크리스토퍼의 여정이 조금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윈던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한 소년의 이야기를 넘어, 영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로 갈라졌는지도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도 위의 스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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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2월 25일,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Great Western Railway·GWR) 이사회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런던과 브리스틀을 잇는 철도의 기관차 정비 공장을 스윈던에 짓기로 한 것이다.
결정의 배경에는 수석 기관차 감독관 다니엘 구치(Daniel Gooch)의 권고가 있었다. 스윈던은 런던과 브리스틀 사이에 놓여 있었고, 글로스터로 향하는 지선이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가까운 운하를 통해 석탄을 공급받기도 쉬웠다. 철도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은 뜻밖에도 완벽한 장소였다.
훗날 이 결정을 둘러싼 작은 전설 하나가 생겨났다. 구치와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이 스윈던 역에서 햄 샌드위치를 먹다가 문득 이곳이야말로 공장을 지을 완벽한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 이야기를 꽤 즐겨 반복한다. 거대한 산업 도시의 탄생이 햄 샌드위치 하나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어쩐지 영국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843년 1월, 스윈던 공장은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처음 이곳에서 일한 노동자는 200명 남짓이었다. 공장에서 처음 만들어진 기관차에는 ‘그레이트 웨스턴(Great Western)’, 즉 ‘대서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스윈던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스틀에서, 런던에서, 잉글랜드 북부에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까지. 스윈던에는 중공업의 전통도, 숙련된 산업 노동자도 없었다. 필요한 사람을 모두 바깥에서 데려와야 했다.
GWR은 그들이 머물 도시까지 함께 지었다. 공장 곁에 ‘철도 마을(Railway Village)’이 들어섰다. 석회암으로 지은 테라스 하우스가 가지런히 늘어섰고, 그 사이로 목욕탕과 도서관, 교회와 학교가 자리 잡았다. 영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체계적으로 조성된 노동자 주거 단지 가운데 하나였다.
회사는 노동자에게 집만 제공한 것도 아니었다. 직원들이 일정 금액을 함께 납부하고 필요할 때 의료비를 지원받는 GWR 의료기금(GWR Medical Fund)이 만들어졌다. 이 제도는 훗날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참고한 모델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철도 회사가 세운 작은 산업 도시 안에서, 훗날 영국 복지국가를 상징하게 될 제도의 희미한 원형이 자라고 있었던 셈이다.
20세기 중반이 되자 스윈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1만4,000명을 넘어섰다. 1841년 2,459명에 불과했던 도시의 인구는 불과 수십 년 사이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스윈던은 더 이상 ‘돼지의 언덕’ 위에 놓인 작은 시장 마을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철도 공학 단지 가운데 하나를 품은 산업 도시였다. 철도가 도시를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철도가 도시를 만들었다.
브루넬이 설계한 템플 미즈역 열차 승강장 내부. GWR의 첫 브리스틀 종착역으로, J. C. 본의 판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 출처: John Cooke Bourne - photograph of original print from engraving. From the Brunel University art collection.,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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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번영은 처음부터 하나의 위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스윈던의 경제는 GWR에 의존했다. 거의 전적으로, 오직 하나의 회사에 말이다. 공장이 번성하면 도시도 번성했고, 공장이 흔들리면 도시 전체가 함께 흔들리는 구조였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마침내 그 진동이 시작됐다.
쇠퇴의 상징적인 순간은 1960년에 찾아왔다. 그해 스윈던 공장은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제작된 증기 기관차 ‘이브닝 스타(Evening Star)’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름부터가 어쩐지 하나의 종말처럼 들린다. 저녁의 별. 하루가 저물 때 마지막으로 빛나는 별처럼.
그 이후 공장은 기관차를 만드는 역할을 잃고 차량을 수리하고 유지하는 기지로 밀려났다. 1948년 철도 국유화 이후 영국철도(British Rail)의 거대한 통합 체계 속에서 스윈던은 크루(Crewe)와 더비(Derby)의 공장들과 일감을 놓고 경쟁해야 했다. 주문은 줄었고, 역할은 축소됐다. 한때 세계의 철도를 만들던 공장은 조금씩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갔다.
그리고 1986년 3월 26일, 스윈던 철도 공장이 문을 닫았다. 145년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자 스윈던의 심장이 멈춘 날이었다. 한 도시가 오랫동안 믿어온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날이었다.
1986년이라는 해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스윈던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영국은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 아래 거대한 경제적 재편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하 있었다. 제조업과 광업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오래된 산업 도시들이 쇠퇴하는 동안, 금융과 서비스업을 축으로 한 새로운 경제가 런던과 잉글랜드 남부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북부와 남부의 차이는 이 시기 비로소 날카로운 정치적 균열로 모습을 드러냈다. 북부 산업 지역의 공장은 문을 닫고 실업률은 치솟았다. 동시에 남부에서는 새로운 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스윈던은 지도 위에서는 남부 잉글랜드에 속한다. 그러나 도시의 경제적 DNA는 북부의 탄광 마을이나 조선소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산업에 기대고, 숙련 노동자들의 손으로 움직이며, 공장의 리듬에 따라 도시 전체가 살아가는 곳이었다.
탈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은 스윈던도 비껴가지 않았다. 철도 공장이 문을 닫은 1986년, 도시의 실업률은 급격히 치솟았다.
그나마 스윈던은 일부 탄광 도시처럼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새로운 산업이 빈자리를 찾아왔다. 1985년 혼다(Honda)가 자동차 생산 거점을 마련했고, 1990년대부터는 내셔널와이드(Nationwide)와 같은 금융기관들이 도시로 들어왔다. 버려진 철도 공장 부지는 다시 단장돼 디자이너 아울렛과 증기 기관차 박물관(STEAM Museum)으로 변했다.
스윈던은 스스로를 재발명해야 했다. 그리고 적어도 경제 지표만 놓고 보면,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적인 재발명과 잃어버린 정체성 사이에는 언제나 설명하기 어려운 간격이 남는다.
새로 생긴 유통센터와 콜센터의 일자리는 GWR 공장에서 기관차를 만들던 숙련 노동자들의 자부심을 온전히 대신하지 못했다. 스윈던은 다시 번영했지만, 번영하는 방식은 이전과 달랐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던 도시에서, 무언가를 유통하고 처리하는 도시로.
도시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까지 온전히 지켜낸 것은 아니었다.
1960년 3월 20일, 명명식을 마친 직후 스윈던 철도 공장에 서 있는 증기기관차 92220호 ‘이브닝 스타(Evening Star)’. 출처: RuthAS - Own work, CC BY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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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의 아버지 에드는 보일러 수리공이다.
소설 속에서 그는 흰색 밴을 몰고 일터를 오간다. 손으로 일하는 사람. 고장 난 것을 찾아내고, 뜯어보고,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이다. 스윈던의 오랜 노동자 계층을 떠올리게 하는 직업이다.
그는 집에서 홀로 크리스토퍼를 키운다. 일을 하고, 청구서를 처리하고, 아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세계와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 사이에서 어떻게든 하루를 버텨낸다. 그의 삶에는 화려한 것이 없다. 런던의 비싼 커피와 세련된 레스토랑, 문화와 금융의 언어로 설명되는 영국과는 거리가 먼 삶이다.
마크 해던이 크리스토퍼의 아버지를 이런 인물로 설정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에드의 삶은 스윈던이라는 도시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화려하지 않고, 좀처럼 주목받지 않는다. 그러나 고장 난 것을 고치고, 주어진 일을 해내며, 다음 날이면 다시 아침에 일어나 밴의 시동을 거는 사람들.
한때 기관차를 만들었던 도시의 아버지는 이제 보일러를 고친다.
그리고 소설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크리스토퍼가 처음으로 스윈던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다.
그는 런던으로 가야 한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크리스토퍼는 스윈던역에 가본 적은 있지만 런던행 기차를 혼자 타본 적은 없다. 그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공간을 견디기 어렵고, 낯선 환경에서는 쉽게 압도된다. 그러나 크리스토퍼에게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지도가 있고, 정해진 노선이 있다. 역과 역은 연결돼 있다. 하나의 거대한 여정도 충분히 작은 단계로 나누면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단계를 분석하고, 하나씩 실행하면 된다.
크리스토퍼가 스윈던역에서 패딩턴역(Paddington)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스윈던이라는 도시의 역사를 알고 나면, 이 장면은 단순히 한 소년의 첫 기차 여행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스윈던에서 런던으로 간다는 것은 하나의 영국에서 다른 영국으로 건너가는 일이기도 하다.
런던 패딩턴역은 GWR이 세운 역이다. 브루넬이 설계했고, 스윈던 공장에서 만들어진 기관차들이 수없이 이곳을 오갔다. 스윈던과 런던은 철길로 이어져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한 세기가 넘도록 사람과 물건과 자본이 그 선로 위를 달렸다.
그러나 연결돼 있다는 것이 같은 세계에 속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패딩턴역에 내리는 순간,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와 전혀 다른 곳에 들어왔음을 느낀다. 사람이 너무 많고, 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하며,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인다.
스윈던에서는 이해할 수 있었던 세계의 규칙이, 런던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빅토리아 시대의 패딩턴역. 출처: Period Post Card, P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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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3일, 영국은 유럽연합에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를 국민에게 물었다.
스윈던의 대답은 ‘떠난다’였다. 유권자의 55.4%가 유럽연합 탈퇴, 브렉시트(Brexit)를 선택했다.
스윈던만의 선택은 아니었다. 브렉시트 이후 많은 분석가들은 그 배경 가운데 하나로 긴밀했던 산업 공동체의 해체와 영국 곳곳에 남겨진 옛 산업 지역의 쇠퇴를 지목했다. 런던과 대도시들이 교육과 금융, 새로운 산업을 등에 업고 눈부시게 성장하는 동안, 다른 영국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문제는 앞서간 도시들이 좀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물론 브렉시트를 탈산업화가 남긴 분노 하나로 설명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 브렉시트의 원인은 복합적이었고, 스윈던의 유권자 55.4%가 모두 같은 이유로 투표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맥락만큼은 분명하다.
1986년 공장의 문이 닫힘과 동시 새로 들어온 일자리는 이전과 다른 방식의 삶을 요구했다. 도시는 살아남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 곳인지 설명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런던으로 가는 기차는 여전히 달렸지만, 두 도시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시간 위에서 하나의 선택이 이루어졌다.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이 스윈던에 철도를 놓은 것은 런던과 브리스틀을 연결하기 위해서였다. 그 연결 위에서 스윈던이라는 산업 도시가 태어났다. 철도는 사람을 실어 나르고, 물건을 옮기고, 거리를 줄였다.
그러나 철도는 스윈던을 런던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연결은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런던으로 떠났던 소설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역시 결국 스윈던으로 돌아온다.
런던에서의 긴 여정을 마치고, 자신이 찾아야 했던 것을 발견한 뒤 다시 돌아온다. 소설은 스윈던에서 시작해 스윈던으로 되돌아온다.
크리스토퍼에게 스윈던은 아직 끝나지 않은 곳이다.
철도 공장은 문을 닫았지만 스윈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완전히 재발명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잊히지도 않은 채. 과거의 이름을 품고 새로운 역할을 찾아가면서, 자신이 무엇이었고 이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여전히 묻고 있다.
어쩌면 크리스토퍼가 스윈던에 속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그 역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이해받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되지도 않은 채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규칙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이 자신에게 맞춰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고 스윈던도 그렇게 존재한다.
세상이 돌아보든 돌아보지 않든.
철길은 여전히 런던으로 이어져 있고, 기차는 오늘도 패딩턴을 향해 달린다.
스윈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들
- 스윈던은 GWR 하나에 의존하다가 그것이 사라지면서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당신이 사는 도시나 지역은 어떤 산업이나 기관에 의존하고 있는가. 그것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의 거대한 존재에 의존하는 공동체의 강점과 취약성은 무엇인가.
- 크리스토퍼가 스윈던에서 런던으로 기차를 타는 장면은 두 개의 영국 사이를 건너는 여정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오래된 문제다. 대도시 집중이 만들어내는 이 격차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그 격차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 스윈던은 철도 공장이 사라진 후 금융, 유통, 관광 도시로 스스로를 재발명했다. 이것은 성공적인 적응인가, 아니면 정체성을 잃은 것인가. 개인도, 도시도, 나라도 변해야 살아남는다. 하지만 변하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잃어버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Elbow – ‘One Day Like This’ (2008) 맨체스터 출신의 엘보는 영국 북부와 중부의 산업 도시들이 가진 정서를 음악으로 만드는 밴드다. 이 곡은 평범한 하루의 기적을 노래하는데, 그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취약한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 스윈던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매일 아침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노래다.
다음화 예고
크리스토퍼의 아버지 에드는 거짓말을 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크리스토퍼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에드가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이 아들을 다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묵했다. 침묵을 지키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고, 한 번 만든 이야기를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또 다른 침묵을 쌓았다.
그것이 아들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믿으면서. 어쩌면 그것 역시 사랑의 한 방식이라고 믿으면서.
영국에는 ‘스티프 어퍼 립(stiff upper lip)’이라는 표현이 있다. 문자 그대로는 ‘윗입술을 꼿꼿이 세운다’는 뜻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고통을 말하지 않으며, 어려운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울지 않는 것.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은 얼굴로 하루를 계속 살아가는 것.
영국인들은 오랫동안 이런 태도를 하나의 미덕으로 여겼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절제였고, 침묵은 품위였으며, 견디는 능력은 곧 강함의 증거였다.
그러나 에드의 침묵이 크리스토퍼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보면, 우리는 그 강함이 때로 얼마나 비싼 대가를 요구하는지 알게 된다.
마지막 화에서는 이 침묵의 역사를 따라간다.
빅토리아 시대의 ‘젠틀맨’이라는 이상에서 시작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더욱 단단해진 감정 억제의 문화, 그리고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앞에서 수많은 영국인이 거리로 나와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렸던 순간까지.
그날의 눈물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영국인들은 정말 ‘스티프 어퍼 립’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감정을 대하는 방식만 조금 달라졌을 뿐, 오래된 침묵은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말하지 않는 것은 정말 누군가를 보호하는 일일까.
아니면 침묵 역시, 때로는 또 다른 상처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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