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빅토리아부터 앤드루까지, 수 백년간 이어진 영국 왕실의 이미지 전쟁

앤드루 전 왕자의 엡스타인 스캔들로 가장 바빠진 사람들

2026.02.07 | 조회 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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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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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NT

영국 인문교양 뉴스레터 | 매주 여러분의 시야를 영국이 전세계에 미친 광활한 영향력만큼 넓고 깊게 확장해드립니다.

2019년 11월 16일, BBC 뉴스나이트 스튜디오에서 영국의 앤드루 왕자는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관계를 직접 해명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약 50분간 이어진 인터뷰는 해명이라기보다, 공개된 자리에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 가까웠다. 발언은 길었지만 설득력은 약했고, 설명을 이어갈수록 의문은 오히려 늘어났다. 시청자들은 한 왕족이 자신의 신뢰를 지키려다 오히려 그것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방송이 나간 지 사흘 만에 그는 왕실 공식 직무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25년 1월, 미국 법원이 엡스타인 관련 추가 문서를 공개하면서 그의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법적으로 새로운 혐의가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BBC는 이를 주요 뉴스로 다뤘고, 《더 타임스》는 1면에 실었으며, 소셜미디어에서는 ‘#PrinceAndrew’라는 해시태그가 다시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한데 영국 왕실에서 이 스캔들로 가장 바빠진 사람들은 변호사도, 검사도 아니었다. 바로 왕실 커뮤니케이션팀이었다.

영국 왕실은 정치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법을 만들지 못하고, 예산을 결정하지 못하며, 전쟁을 선포할 수도 없다. 1689년 명예혁명 이후 군주는 ‘통치하지만 지배하지는 않는’ 존재가 됐다. 그렇다면 왕실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상징으로 존재한다.이미지로 존재한다.그리고 국민의 기억 속에 오랜 시간 쌓여온 이야기로 존재한다.

그래서 앤드루의 스캔들은 단순한 개인의 추문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왕실이라는 거대한 이미지 체계 전체에 생긴 균열에 가깝다. 만약 왕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처럼 보인다면, 특권층이 법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들이 국민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영국 사회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된다.

왜 우리는 그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가? 왜 우리는 그들을 여전히 국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2025년 영국 여론조사에서 18~24세의 51%가 군주제 폐지를 지지했다. 왕실 스캔들은 결국 숫자로 환산된다. 지지율, 호감도, 세대별 인식 변화. 왕실 커뮤니케이션팀이 싸우는 전쟁은 바로 이 숫자 위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이것이 현시대에 들어 생긴 어떤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국 왕실은 200년 넘게 같은 방식으로 생존해왔다. 혈통과 전통만으로 권위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서사를 통해 존재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 생존 전략은 언제 어떻게시작됐을까. 왕실은 언제부터 이미지를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이 이야기는 약 180년 전, 한 여왕이 카메라 앞에 섰던 순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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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앤드루 전 왕자가 바닥에 누운 여성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장면이 담긴 사진. 이 사진은 지난달 30일 미국 워싱턴DC에서 미국 법무부가 공개한 자료로, 금융가이자 유죄 판결을 받은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수사에서 새로 확보된 문서 묶음의 일부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이 발견한 것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은 왕실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이해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그녀는 왕실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진으로 기록된 군주가 되었고, 1840년대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수백 장의 사진을 남겼다. 그중에는 전통적인 개인 초상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가장 널리 퍼진 이미지는 가족과 함께한 사진들이었다. 앨버트 공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 아홉 명의 자녀와 함께한 장면, 손주를 품에 안고 있는 순간들은 단순한 왕실 기록을 넘어 하나의 메시지가 되었다.

사진은 ‘카르트 드 비지트(carte de visite)’라는 작은 카드 형태로 제작됐고, 일반 시민들이 돈을 내고 구매할 수 있도록 판매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당연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그 이전까지 왕의 얼굴은 대부분 초상화 속에서만 존재했다. 몇 달,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완성된 유화는 궁전 벽에 걸렸고, 평범한 시민이 왕의 얼굴을 실제로 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대관식이나 왕실 행렬에서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유럽 전역에는 혁명의 기류가 확산되고 있었고, 군주제는 더 이상 신이 부여한 절대적 권위로만 유지될 수 없는 체제로 변해가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이어졌고, 1848년에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전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왕권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라,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는 제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빅토리아가 선택한 전략은 분명했다. 왕실을 멀리 떨어진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상적인 가정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진을 판매했고, 그 결과 중산층 가정의 거실 벽에 왕실 가족사진이 걸리기 시작했다. 왕실은 더 이상 궁전 안에만 존재하지 않았고, 일상의 공간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당시 런던의 한 신문은 여왕의 가정생활을 모든 국민이 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묘사하며, 그녀 역시 자녀를 사랑하고 남편을 아끼는 평범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 서사는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왕실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왕실은 그렇게 하늘 위에서 내려와, 국민과 같은 높이에서 존재하는 기관으로 재탄생했다. 신성함 대신 친근함으로, 거리감 대신 공감으로 권위를 유지하는 방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순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국 왕실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왕실이 베르사유 궁전의 황금빛 회랑 속에서 대중과 점점 더 멀어지다가 결국 단두대로 향했던 것과 달리, 영국 왕실은 스스로를 대중의 시야 속으로 끌어들이며 생존의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단순한 이미지 전략이 아니라, 왕실이라는 제도가 근대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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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가 1846년에 그린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 왼쪽부터: 알프레드 왕자와 웨일스 공; 여왕과 앨버트 공; 앨리스 공주, 헬레나 공주, 빅토리아 공주 . 출처: Franz Xaver Winterhalter - Royal Collection RCIN 405413, Public Domain

 

1953년, 텔레비전이 만든 기적

 

1953년, 텔레비전은 영국 왕실에 새로운 생존 방식을 한가지 더 제공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권력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1953년 6월 2일,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은 왕실 의례가 지닌 신성함이 가정의 거실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강하게 경계했고, 캔터베리 대주교 역시 성유를 바르는 가장 신성한 순간을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당시 많은 이들에게 왕실은 단순한 국가 기관이 아니라, 전통과 신성함이 결합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왕은 다른 시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왕실이 더 이상 거리와 신비로만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고, 국민이 의식의 일부가 되어야만 왕실이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대관식을 국민이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BBC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부와 주변에 21대의 카메라를 설치했고, 이 장면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규모로 전 세계에 전달됐다. 대관식 당일, 약 2천7백만 명이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봤고, 영국에서만 약 2천만 명이 시청했다. 당시 영국 인구가 약 5천만 명이었음을 고려하면 국민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같은 순간을 공유한 셈이었다.

많은 가정은 이 날을 위해 생애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구입했고, 텔레비전이 없는 가정에서는 이웃집 거실이 공동 관람실이 되었다. 런던 이스트엔드의 펍에서는 술잔 소리 사이로 화면을 향한 시선이 모였고, 요크셔 탄광촌에서는 노동자들이 하루 일을 마친 뒤 조용히 화면 앞에 모였다. 웨일스의 작은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의자 위에 올라 화면을 바라보며, 왕관이 여왕의 머리에 놓이는 순간을 숨죽여 지켜봤다. 그 순간, 영국 전역에서 자연스럽게 환호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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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이후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왕실 가족. 출처: BiblioArchives / LibraryArchives from Canada - Coronation of Queen Elizabeth II / Couronnement de la Reine Elizabeth II, CC BY 2.0

BBC 아나운서 리처드 딤블비는 경건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그 장면을 전달했고, 젊은 여왕이 국가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라는 설명은 단순한 방송 문장을 넘어 하나의 집단 기억으로 남았다. 그날 이후 BBC는 단순한 방송사가 아니라 왕실과 국민 사이를 연결하는 상징적 통로가 되었다.

이후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여왕은 같은 방식으로 국민 앞에 등장했다. 책상 앞에 앉아 안경을 쓰고 조용한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하는 그 장면은 점차 하나의 전통이 되었고, 그녀가 국민을 ‘여러분’이 아니라 ‘나의 가족 여러분’이라고 부르는 방식은 왕실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언어가 되었다. 왕실이 추구한 이미지는 위엄을 유지하면서도 친근함을 잃지 않는 존재였고, 전통을 대표하면서도 현대 사회 속에 함께 살아가는 기관이라는 인상이었다. BBC는 이 이미지를 꾸준히 전달했고, 영국 사회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왕실이 국민에게 더 가까워질수록, 동시에 그들은 더 또렷하게 관찰되는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은 왕실을 인간적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들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창이 되었다. 친근함은 공감을 가져왔지만, 투명성은 평가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왕실은 단순히 존경받는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석되고 판단되는 대상이 되었다.

이미지로 살아가는 제도는 이미지에 의해 보호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미지에 의해 무너지기도 한다. 왕실이 선택한 이 새로운 생존 방식은 그들을 국민 곁으로 끌어내렸고, 그 선택은 수십 년 뒤 전혀 다른 형태로 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지라는 것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BBC TV 중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웨스트민스터 사원, 1953년

 

타블로이드가 만든 비극

 

1997년 8월 31일 새벽, 파리 알마 터널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탄 메르세데스 S280이 콘크리트 기둥과 충돌했다. 운전사는 뒤쫓아오던 파파라치 오토바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사고는 단 몇 초 만에 벌어졌다. 다이애나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고, 새벽 4시, 그녀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날 아침, 영국 전체가 집단적인 충격 속에 잠겼다. 켄싱턴궁 앞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꽃다발을 들고 왔고, 누군가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꽃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쌓여 갔고, 오후가 되자 궁 앞은 거대한 추모의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슬픔은 조용히 확산됐지만, 동시에 다른 감정도 빠르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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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망 후 켄싱턴 궁전 밖에 놓인 꽃들. 출처: Maxwell Hamilton from Greater London, England United Kingdom - Flowers for Princess Diana's Funeral, CC BY 2.0

그 분노는 곧 특정한 방향으로 향했다. 《더 선》, 《데일리 미러》, 《데일리 메일》 같은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이 신문들은 다이애나의 삶을 끊임없이 추적했고, 그녀의 사생활을 헤드라인으로 만들었으며, 찰스 왕세자와의 갈등을 연일 1면에 실었다. 체육관에서 나오는 모습, 휴가 중의 사적인 순간, 눈물을 보이는 장면까지, 모든 것이 기사와 사진이 되었다.

켄싱턴궁 앞 꽃다발 사이에는 누군가가 세운 작은 팻말이 놓여 있었다.

“언론이 그녀를 죽였다.”

그 문장은 당시 영국 사회의 감정을 단순하고도 잔혹하게 압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피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했다. 타블로이드는 다이애나를 집요하게 괴롭혔지만, 동시에 그녀를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으로 만든 존재이기도 했다.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결혼한 이후, 다이애나는 거의 매일 신문 1면에 등장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 그녀의 표정, 그녀의 눈물, 그녀가 방문한 병원, 그녀가 만난 아이들, 그리고 새로운 연인에 대한 소문까지, 모든 것이 소비 가능한 이야기로 재구성됐다.

상업적 효과는 분명했다. 《더 선》은 다이애나 관련 기사가 실린 날 평균보다 30만 부를 더 판매했고, 《데일리 메일》은 다이애나가 표지에 등장할 때마다 판매량이 절반 가까이 증가했다. 파파라치가 촬영한 사진 한 장이 10만 파운드에 거래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스캔들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관심이라는 시장에서 작동하는 또 다른 형태의 통화였다. 그리고 왕실은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실은 언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지만, 언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반응하는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대중의 관심은 언제나 이야기와 감정, 그리고 개인적 드라마에 끌린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그 구조 속에서 사랑받았고, 동시에 소모되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 영국 왕실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언론과 대중을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왕실이 이미지로 살아가는 제도라면, 다이애나의 죽음은 그 이미지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왕실은 한 가지를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관심은 권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파괴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스캔들은 관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왕실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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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웨스트미들랜즈 경찰 마약수사대를 방문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모습. 출처: West Midlands Police, CC BY-SA 2.0

 

왕실 기자단의 탄생

 

왕실 기자단, 이른바 ‘로열 로타(Royal Rota)’ 시스템은 다이애나 사망 이후 사실상 지금의 형태로 굳어졌다. 영국의 주요 언론사들, 《더 타임스》와 《텔레그래프》, 《가디언》, 그리고 타블로이드 신문들까지가 순번을 정해 왕실 행사를 취재하고, 그날 확보한 사진과 기사, 영상 자료를 서로 공유하는 구조였다. 겉으로 보면 특정 언론사에 특혜가 돌아가지 않도록 접근권을 균등하게 나누는 장치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왕실과 언론 사이의 미묘한 힘의 균형을 관리하는 장치에 가까웠다.

왕실은 언론에 독점에 가까운 접근 기회를 제공하는 대신, 보도의 톤과 태도에 대한 암묵적인 기대를 형성했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는 다음 공식 행사 취재 명단에서 빠질 수 있었고, 왕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신문은 대변인과의 비공식 소통 창구를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공개적으로는 누구도 이를 ‘통제’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시스템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어냈다.

이 구조 속에서 영국 언론은 독특한 이중성을 발전시켰다. BBC나 《타임스》는 왕실을 국가의 상징으로서 품위 있게 다루는 전통을 유지했고, 《더 선》이나 《데일리 메일》은 왕실 내부 갈등과 사생활 스캔들을 거리낌 없이 1면에 올리면서도, 동시에 윌리엄 왕세자의 자녀 사진에는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붙이며 대중적 호감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왕실이 선택한 전략은 단순한 통제가 아니었다. 완전히 억누르는 대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계를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언론을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자유롭게 두지도 않는 방식이었다.

다이애나는 이 구조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때로는 그것을 자신의 무기로 사용했다. 1995년 BBC 〈파노라마〉 인터뷰에서 그녀가 찰스 왕세자의 불륜을 언급하며 “이 결혼에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붐볐죠”라고 말했을 때, 그 한 문장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폭로가 아니라, 왕실 서사에 균열을 내는 순간이었다.

왕실은 분노했지만 정면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이미 대중의 감정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녀를 공격하는 것은 곧 왕실이 국민 감정과 충돌하는 것을 의미했다.

1997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 영국 사회 전체는 집단적 애도 속에 빠졌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발모럴성에 머물며 일주일 가까이 공개적인 메시지를 내지 않았고, 버킹엄 궁전 국기도 즉시 조기로 내려지지 않았다. 그 침묵은 전통적인 왕실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시대는 이미 변해 있었다. 여론은 빠르게 반응했고, 《더 선》은 1면에 “여왕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실었다.

결국 여왕은 런던으로 돌아왔고, 역사상 처음으로 텔레비전 연설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국가의 군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할머니로서 슬픔을 표현했고, 그 순간은 왕실이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됐다.

그 사건 이후 왕실은 분명히 이해하게 됐다. 21세기에는 침묵이 위엄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정을 숨기는 것이 냉정함이 아니라 거리감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은 더 이상 완벽한 상징으로서의 군주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들은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을 원했고, 왕실은 그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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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사망 후《더 선》지의  1면

 

넷플릭스의《더 크라운》

 

2016년 11월, 넷플릭스는 《더 크라운》 시즌 1을 공개했다. 젊은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와 결혼, 권력과 가족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던 초기 군주 시절을 정교하게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왕실은 제작 과정에 어떤 형태로도 참여하지 않았고, 대본 검토도 하지 않았으며, 촬영 장소 역시 제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전 세계 약 7천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았다.

《더 크라운》은 단순한 사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실 내부의 감정과 갈등을 해석하는 하나의 서사였다. 엘리자베스의 대관식은 개인적 희생의 이야기로, 마거릿 공주의 사랑은 계급과 제도의 벽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의 이야기로, 필립 공과의 갈등은 권력과 정체성 사이의 긴장으로, 그리고 훗날 이어질 다이애나의 고독은 왕실이라는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외로움으로 묘사됐다. 사실과 상상은 촘촘히 엮였고, 시청자들은 그것을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보이지 않던 진실의 번역본’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왕실은 공식적으로 선을 그었다. 이것은 허구이며, 실제 역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생각보다 약했다. 넷플릭스는 왕실의 승인 없이도 왕실 서사를 전 세계에 유통할 수 있었고, 시청자들은 공식 성명보다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이야기 쪽에 더 쉽게 마음을 기울였다.

이는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신호였다. 빅토리아 시대 이후 180년 가까이, 왕실은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설계해왔다. 어떤 사진이 배포될지 선택했고, 어떤 인터뷰가 허용될지 결정했으며, BBC를 통해 승인된 버전을 국민에게 전달했다. 왕실은 이야기의 주인인 동시에 편집자였다.

그러나 스트리밍 플랫폼 시대에는 이야기가 중앙에서 통제되지 않는다. 제작사는 왕실의 허가 없이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전 세계 시청자는 국경과 방송 시간표와 상관없이 그 이야기를 동시에 소비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공식 기록보다 감정적으로 더 설득력 있는 서사를 더 오래 기억한다.

왕실이 처음으로 마주한 위기는 스캔들이 아니라 서사의 통제권 상실이었다. 누가 왕실을 설명할 것인가, 누가 왕실의 감정을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왕실의 인간적인 약점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더 큰 충격은, 불과 몇 년 뒤 훨씬 직접적인 형태로 다가왔다. 2020년, 왕실은 더 이상 드라마 속에서만 재해석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새로운 서사의 주체가 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2020년 1월 8일,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은 인스타그램에 짧지만 파장이 큰 글 하나를 올렸다. 그들은 더 이상 왕실 고위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문장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왕실이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온 커뮤니케이션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는 신호였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발표가 왕실 내부 절차를 완전히 우회했다는 사실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찰스 왕세자도 사전에 내용을 공유받지 못했고, 왕실 커뮤니케이션팀 역시 개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해리와 메건은 더 이상 왕실이 관리하는 서사를 따르지 않았고, 대신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것은 왕실에게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통제력 상실의 신호였다.

그렇게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왕실 이미지 전략은 완전히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게 됐다. 왕실은 더 이상 자신만의 속도로 서사를 조정할 수 없었고, 누구나, 언제든, 전 세계를 상대로 왕실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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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왕실 고위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글

 

2025년, 왕관보다 무거운 것

 

다시 2025년 1월로 돌아와보자. 엡스타인 관련 문서가 추가로 공개되고, 앤드루 왕자의 이름이 뉴스 화면 하단 자막을 따라 조용히 흘러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왕실 커뮤니케이션팀 회의실 안의 공기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무거워진다.

흥미로운 점은 법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2022년 민사 합의로 앤드루를 향한 소송은 종결됐고 형사 기소도 없었다. 하지만 여론은 법정과는 전혀 다른 시간 위에서 움직인다. 문서가 공개될 때마다 영국 언론들은 이를 톱뉴스로 다루고, 소셜미디어는 단 하나의 이름만으로 다시 들끓으며, 왕실 지지율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흔들리지만, 그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그래서 왕실 커뮤니케이션팀은 앤드루를 변호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관리한다. 공식 행사에서는 존재를 최소화하지만, 그렇다고 가족 행사에서 그를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는다. 완전히 배제하면 냉혹한 왕실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완전히 복귀시키면 국민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2024년 크리스마스, 샌드링엄 예배에서 앤드루가 찰스 3세와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을 때, 그것은 단순한 가족의 산책이 아니라 계산된 메시지였다. 왕은 동생을 버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왕실의 얼굴로 다시 세우지도 않았다. 함께 걷게 하되 말은 하지 않게 하고, 존재는 허용하되 영향력은 차단하는 것. 그것이 21세기 왕실 PR이 선택한 균형이었다.

결국 왕실이 싸우는 곳은 법정이 아니라 여론이다. 진실을 입증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무엇을 믿게 되는지가 더 중요해진 세계에서, 왕실의 생존은 사실이 아니라 서사 위에 놓여 있다.

이 구조는 비단 영국 왕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중문화든 기업이든 정치든, 거의 모든 영역에서 권력은 점점 더 물리적 힘이 아니라 이미지로 유지된다. 법적 책임보다 대중의 인식이 더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판결문보다 SNS에서 몇 시간 동안 형성된 여론이 더 오래 기억된다.

빅토리아 여왕이 사진관 앞에서 직감했던 것도 결국 이 사실이었다. 왕관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왕관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권력을 만든다는 것.

앤드루의 2019년 BBC 인터뷰 이후, 한 영국 PR 전문가는 이런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단 50분 만에 왕실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무너뜨렸고, 그 순간 왕실이 실제로 의존하고 있던 것이 금으로 만든 왕관이 아니라, 신중하게 설계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엡스타인 문서가 다시 공개된 뒤, 영국 언론에서도 비슷한 논조가 반복됐다. 왕실은 법적으로 문제없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군주제의 정당성은 법률 문장이 아니라 국민이 마음속에서 허락해 주는 상징성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그 상징이 흔들리는 순간 위기는 법정이 아니라 여론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왕실 커뮤니케이션팀은 오늘도 회의실에 모여 뉴스 방송을 분석하고, 주요 신문의 논조를 예측하며, 온라인 여론의 흐름을 읽는다. 

빅토리아는 사진을 통해 살아남았고, 엘리자베스 2세는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과 연결됐다. 그러나 찰스 3세는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 그리고 누구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와 마주하고 있다. 왕실이 더 이상 서사의 유일한 저자가 될 수 없는 시대와.

언젠가 그 무게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왕실은 소리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역사책 속 사진으로, 드라마 속 장면으로, 박물관 유리 진열장 속 유물로.

첨부 이미지

영국 왕실 커뮤니케이션팀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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