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문학으로 읽는 영국

영국 여성 고딕 작품은 계급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어떻게 집요하게 파고드는가?

레베카와 가스라이트의 후예들: 함께 읽는 영국 추리소설 『리틀 페이스』두번째 이야기

2026.02.08 | 조회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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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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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의 어느 날, 한 젊은 여성이 거대한 저택의 문지방을 조심스럽게 넘어섰다. 맨덜리. 바다를 굽어보며 서 있는 영국 콘월의 장엄한 저택은 마치 시간마저 붙잡아 둔 듯 고요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겼다. 이제 그녀는 이 집의 안주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공허하게 느껴졌다. 하인들은 그녀의 눈을 피했고, 시선이 마주칠 듯하면 미묘하게 고개를 돌렸다. 가정부 댄버스 부인은 노골적으로 냉담했다. 환대받아야 할 집주인이라기보다, 허락 없이 들어온 침입자를 대하듯 그녀를 대했다. 그리고 집 안 공기 속에는 하나의 이름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레베카. 죽은 첫 번째 부인. 누구에게나 완벽했던 여자, 레베카.

레베카의 존재감은 죽음 이후에도 집 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너무도 짙어서, 새로운 안주인은 자신의 이름조차 온전히 가질 수 없었다. 소설 내내 그녀는 단지 “나”로만 불린다. 그녀는 남편 맥심 드 윈터를 사랑했지만, 그가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혹시 그는 여전히 레베카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맨덜리의 시간은 어딘가에서 멈춰 있었다. 레베카의 방은 마치 그녀가 방금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존되어 있었고, 옷장에는 여전히 그녀의 옷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집 안 곳곳에는 레베카의 필적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마치 그녀가 여전히 이 집을 지배하고 있다는 조용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댄버스 부인은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속삭인다. “레베카 부인은 항상 이렇게 하셨어요. 레베카 부인은 완벽했죠. 당신은 결코 그녀처럼 될 수 없어요.”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는 여성 고딕 문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불과 2년 뒤 알프레드 히치콕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작품은 하나의 원형이 되었다. 거대한 저택에 갇힌 여성,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압력, 그리고 끝내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남편. 이 요소들은 여성 고딕이라는 장르를 구성하는 문법이 되었고,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고 변주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68년이 흐른 뒤, 영국의 시인이자 추리소설 작가이며 애거사 크리스티의 계승자로 불리는 소피 해나가, 같은 문법 위에 또 다른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 결과물이 바로 소설 『리틀 페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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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를 1940년에 영화화한 작품에 등장하는 댄버스 부인(Mrs. Danvers). By 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s - Rebecca's trailer, Public Domain

 

고딕의 계보 – 『제인 에어』에서 『레베카』까지

 

여성 고딕의 뿌리는 18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젊은 가정교사 제인은 손필드 홀의 주인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저택의 가장 높은 곳,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다락방에는 숨겨진 진실이 존재한다. 로체스터의 첫 번째 아내, 버사 메이슨. 미쳤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격리된 채, 어둠 속에 갇혀 살아가는 여자다.

버사는 소설 속에서 거의 괴물처럼 묘사된다. 웃음은 비명처럼 울리고, 분노는 으르렁거림으로 표현되며, 결국 불을 지르는 파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인간이라기보다 본능에 지배되는 짐승에 가까운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과연 그녀는 정말로 미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미쳤다고 규정당한 것뿐이었을까. 식민지 출신의 여성, 재산 문제로 인해 결혼이라는 거래 속에 묶인 여성, 낯선 나라의 저택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여성. 그런 상황 속에서 그녀가 분노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까.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1979년, 저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그들은 버사를 단순한 광인이 아니라, 제인의 어두운 분신으로 읽어낸다. 제인이 사회 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욕망을, 버사가 대신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제인은 순종적이고 이성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버사와 같은 분노와 저항의 감정이 잠들어 있다.

여성 고딕은 바로 이 억눌린 감정의 문학이다. 표면적으로는 낭만적인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다. 아름다운 저택, 신비로운 남자,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서사. 그러나 그 아래에는 전혀 다른 층위가 존재한다. 가부장제의 구조적 폭력, 사회 속에서 무력해지는 여성의 위치, 그리고 쉽게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분노가 그 바탕을 이룬다.

1938년, 대프니 듀 모리에는 『제인 에어』의 구조를 다시 호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선을 완전히 바꾼다. 『레베카』에서 첫 번째 아내는 다락방에 갇힌 광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존재다. 레베카는 지나치게 완벽한 여자였다. 아름다움도, 지성도, 매혹도 모두 극단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는 죽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 이후에 더욱 강력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은 『제인 에어』의 제인처럼 강인하지 못하다. 그녀는 자신감이 부족하고, 서툴고, 끊임없이 레베카와 자신을 비교한다. 맨덜리는 그녀를 집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저택 자체가 여전히 레베카의 것이기 때문이다. 집의 공기, 가구의 배치, 하인들의 태도, 심지어 침묵마저도 레베카의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레베카』의 진정한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고딕 로맨스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정교하게 비틀어 놓는다. 맥심은 과연 레베카를 사랑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녀를 증오했다. 그렇다면 왜 그녀의 방을 그대로 보존했을까. 그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세상의 시선이었다. 완벽한 결혼, 완벽한 아내, 완벽한 상류층 삶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레베카는 죽었다. 그러나 그녀의 유령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유령의 정체는 단순한 한 여성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완벽한 여성’이라는 신화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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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인 에어』에서 세인트 존 리버스가 제인을 무어 하우스에 받아들이는 장면, F. H. 타운젠드의 삽화. 출처: By F. H. Townsend, 1868-1920 - http://www.gutenberg.org/files/1260/1260-h/images/, Public Domain

 

가스라이트 – 심리적 학대에 이름을 붙이다

 

1938년, 『레베카』가 세상에 나온 바로 그해, 영국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은 『가스 라이트』라는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무대는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젊은 여성 벨라 매닝햄은 남편 잭과 함께 런던의 한 타운하우스에서 살아간다. 겉으로 보면 단정하고 안정된 중산층의 삶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집 안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스등의 불빛이 이유 없이 흐려졌다가 다시 밝아지고, 분명 제자리에 두었던 물건들이 사라진다. 불안해진 벨라는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가스등이 이상하게 어두워졌다고.

그러나 남편은 태연하게 부정한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당신이 착각한 것이라고. 벨라가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해도, 그는 차분하고 단호하게 그녀의 인식을 무너뜨린다. 요즘 당신이 이상해 보인다고, 자꾸 없는 일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의사를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꺼낸다. 그의 말은 겉으로는 걱정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현실 감각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칼날과도 같다.

하지만 벨라는 미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본 것은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 남편은 다락방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켜둔 가스등 때문에 아래층의 불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부정한다. 당신이 본 것이 아니라고, 당신이 착각한 것이라고, 결국에는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목적은 단순하다. 벨라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려 정신병원에 보내고, 그녀의 재산을 마음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집 안 어딘가에 숨겨진 보석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1944년, 조지 큐커 감독은 이 희곡을 영화로 옮겼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벨라, 영화에서는 폴라로 이름이 바뀐 인물을 연기했고, 찰스 보이어가 남편 그레고리 역을 맡았다.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버그만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남긴 가장 오래된 흔적은 영화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단어였다.

1960년대 이후, 심리학자들은 이 작품의 제목에서 개념을 빌려왔다. 바로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 되었다. 가스라이팅은 누군가의 현실 인식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심리적 학대를 의미한다. 상대가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반복적으로 부정하면서, 결국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일까. 피해자는 결국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이 개념은 198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 심리학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로빈 스턴 박사는 2007년 『가스라이트 효과』에서 이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는 부정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네가 착각한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방어와 자기 의심이다. 피해자는 처음에는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방어하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우울과 무력감이다. 결국 피해자는 자신의 판단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가스라이팅은 특히 친밀한 관계에서 자주 발생한다. 부부, 연인, 부모와 자녀처럼 감정적으로 깊이 연결된 관계 속에서 더욱 쉽게 작동한다. 가해자는 흔히 사랑과 보호라는 언어를 사용해 통제를 정당화한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에는 상대를 약화시키고 지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더 복잡한 문제는 주변 환경이다. 많은 경우, 주변 사람들은 가해자 편에 선다. 가해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친절하고, 매력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피해자는 점점 불안정하고 감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피해자는 사회적으로도 고립된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MeToo 운동 속에서, 정치적 담론 속에서, 그리고 SNS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논쟁 속에서 이 단어는 빠르게 일상 언어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단순한 거짓말이나 조작을 넘어,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권력 구조를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시작은 1938년, 런던의 무대 위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던 가스등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미묘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현실을 흔들던 그 빛의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보게 된다. 누군가의 현실을 부정하는 행위는, 때로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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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연극 Angel Street에서 매닝햄 부인(Mrs. Manningham) 역을 맡은 주디스 에블린의 사진. 출처: By Sheperd Traube, producer; no photographer is credited but it is likely to be Talbot - SourceImmediate sourcePostcard dates to 1942–1943, while John Emery was in the cast. No copyright notice appears., Public Domain

 

『리틀 페이스』 속의 레베카와 가스라이트

 

이제 시선을 『리틀 페이스』로 옮겨 보자. 소피 해나는 여성 고딕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레베카』와 『가스 라이트』의 정서를 섬세하게 흡수해, 완전히 현대적인 서사 속에 다시 배치한다. 고전의 구조와 감정은 그대로 살아 있지만, 그것은 더 일상적이고, 더 현실적인 형태로 변주된다.

소설의 무대는 거대한 빅토리아식 저택, ‘더 엘름스’다. 이 집은 데이비드의 어머니 비비안이 소유하고 있으며, 신혼부부인 앨리스와 데이비드는 독립된 공간을 갖지 못한 채 이 집에 얹혀 산다. 그들은 단순히 한 지붕 아래 사는 것이 아니라, 비비안이 정해 놓은 질서와 규칙 속에서 살아간다. 저택은 크고 장엄하며, 방은 끝없이 이어지고 복도는 길게 뻗어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앨리스가 진심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집 안의 모든 것은 비비안의 취향과 기억, 그리고 비비안의 세계관으로 채워져 있다. 앨리스는 늘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마치 이 집의 주인이 아니라, 언제든 떠나야 할 손님처럼.

이 감각은 『레베카』 속 두 번째 부인이 맨덜리에서 느꼈던 감정과 정확히 겹친다. 그 역시 집 안에 살고 있었지만, 결코 그 집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 레베카의 집에서 살아가는 침입자처럼 존재했을 뿐이다.

데이비드에게는 과거가 있다. 전처 로라. 그녀는 살해당했고, 범인은 이미 잡혀 감옥에 있다. 사건은 법적으로 끝났지만, 감정적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로라의 그림자는 여전히 집 안에 남아 있다. 특히 비비안에게는 더욱 그렇다. 비비안은 로라를 완벽한 며느리였다고 회상하며, 끊임없이 앨리스와 비교한다. 로라는 이렇게 행동했는데, 로라는 저렇게 했는데, 로라는 더 우아했고, 더 이해심이 깊었고, 더 적절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레베카가 죽은 뒤에도 두 번째 부인을 짓눌렀던 것처럼, 로라는 앨리스를 짓누른다. 죽은 여성은 산 여성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완벽한 상태로 남는다.

『레베카』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남편 맥심이 아니라 가정부 댄버스 부인이었다. 그녀는 레베카를 거의 숭배에 가까운 방식으로 기억했고, 레베카의 방을 일종의 성소처럼 관리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비비안은 21세기식 댄버스 부인이다. 더 세련되고, 더 교양 있으며, 더 사회적으로 세련된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본질은 동일하다. 그녀는 며느리 앨리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들을 온전히 자신의 세계 안에 붙잡아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적인 공격 대신, 미묘하고 우아한 방식으로 앨리스를 끊임없이 낮춘다.

그리고 남편 데이비드. 겉으로 보면 완벽에 가까운 남편이다. 잘생겼고, 부유하며, 사회적으로도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앨리스가 “이 아기는 플로렌스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균열이 생긴다.

데이비드는 격분하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게 대응한다. 이것이 더 무섭다. 그는 아내가 피곤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출산 이후 예민해졌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하라고 말하고, 지금은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그는 걱정하는 남편처럼 보인다.

반면 앨리스는 점점 감정적으로 보인다. 목소리는 높아지고, 울음을 터뜨리고, 결국 경찰까지 부른다.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데이비드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아내가 출산 이후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자신은 아기를 단 한 순간도 혼자 둔 적이 없다고, 외부인이 집에 들어온 적도 없다고. 그의 말은 논리적이고 일관되며, 사회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앨리스의 말은 어떨까. 그녀에게는 증거가 없다. 그녀는 단지 엄마이기 때문에 안다고 말할 뿐이다. 자신의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느낀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리틀 페이스』는 가스라이팅의 구조를 거의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 가해자는 이성적이고 침착해 보인다. 피해자는 점점 불안정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주변 사람들은 누구를 믿게 될까. 거의 언제나, 더 차분하고 더 논리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믿게 된다.

소설 속에서 앨리스는 점점 고립된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경찰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녀 자신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출산 이후 정신이 흐려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시 내가 정말로 내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순간, 가스라이팅은 완성된다.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을 믿는 능력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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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1847)에 나오는 제인의 황야(무어)를 가로지르는 시련의 여정. 출처: By Edward A. Wilson - http://janeeyreillustrated.com/Jane_Eyre_wilson.htm, Public Domain

 

왜 여성 고딕은 늘 큰 저택을 무대로 하는가

 

빅토리아 시대, 그러니까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이어진 영국 사회에서 거대한 저택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와 혈통, 사회적 지위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된 상징이었다. 방이 많을수록, 하인이 많을수록,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정원이 넓을수록 그 집은 더 높은 계층에 속해 있었다. 중상류층 가정이 꿈꾸던 이상적인 삶의 풍경은 언제나 이런 집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이 화려한 공간은 동시에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여성에게는 일종의 감옥이 될 수도 있는 공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이데올로기는 ‘가정의 천사’라는 이미지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내세웠다. 여성은 집 안에 있어야 했고, 남편을 보살피고, 아이를 키우며, 가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사회와 정치, 경제가 움직이는 공적 영역은 남성의 세계였고, 집 안이라는 사적 영역은 여성의 세계로 구분되었다.

하지만 그 사적 영역이 거대한 저택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여성은 그 공간 속에서 오히려 자신을 잃기 쉽다. 방은 끝없이 이어지고, 복도는 방향 감각을 흐릴 만큼 길게 뻗어 있다. 집은 분명 그녀가 살아야 할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낯설고 차가운 미로처럼 느껴진다. 특히 그 집이 남편의 집일 때, 그리고 그 안에 남편의 가족과 역사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때, 그 감각은 더 강해진다. 여기에 남편의 첫 번째 아내가 살았던 공간이라는 조건이 더해지면, 집은 더 이상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과거와 비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가득 찬 장소가 된다.

문학 비평가 엘렌 모어스는 이런 서사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여성 고딕’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녀는 고딕 소설이 단순한 공포 이야기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공간 속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억압과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보았다. 남성 고딕이 외부의 괴물을 다룬다면, 예를 들어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존재를 통해 낯선 세계의 공포를 표현한다면, 여성 고딕은 내부의 공포를 다룬다. 집 안에서 발생하는 공포,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통제.

여성 고딕의 저택은 그래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 구조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된 공간이다. 계단의 위치, 방의 배치, 누가 어느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지, 누가 문을 잠글 수 있는지, 누가 집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이 이야기 속 권력의 흐름을 결정한다.

겉으로 보면 저택은 안정과 번영의 상징이다. 그러나 여성 고딕 속에서 저택은 기억이 쌓인 장소이며, 비교가 반복되는 장소이고, 침묵이 강요되는 장소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여성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이 집은 과연 나의 집인가, 아니면 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타인의 세계인가.

결국 여성 고딕에서 저택은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의 심리 구조다. 아름답고 장엄하지만, 동시에 방향을 잃게 만들고,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며, 때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감각을 남긴다. 그래서 여성 고딕은 늘 큰 집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집 안에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공포가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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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남서부에 있는 스트로베리 힐. 고딕 작가 호레이스 월폴이 지은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val)’ 양식의 영국식 빌라. 출처: Public Domain

 

영국 고딕 vs 미국 고딕

 

여성 고딕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결은 영국 고딕과 분명히 다르다. 같은 장르에 속해 있으면서도,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그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여성 고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샬럿 퍼킨스 길먼의 단편 『노란 벽지』(1892)다. 출산 이후 건강이 약해졌다는 이유로 ‘휴식 요법’을 처방받은 여성은 방 안에 사실상 격리된다. 남편은 의사이며, 그는 아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직 쉬기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도 쓰지 말고, 생각도 깊이 하지 말고, 바깥 세상과도 접촉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그녀의 정신은 서서히 무너진다. 그녀는 방의 노란 벽지 속에서 또 다른 여자의 형상을 보기 시작한다. 벽지 속에 갇혀 있는 여자. 그리고 결국, 그 여자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게 된다.

미국 고딕은 종종 더 내면적이고, 더 심리적이며, 때로는 초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이나 조이스 캐럴 오츠의 작품들 역시, 현실과 환각, 자아와 광기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을 탐구한다. 미국 고딕의 공포는 종종 외부 세계보다, 인간의 정신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현실이 서서히 균열되고, 개인의 인식 자체가 신뢰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해 가는 과정이 핵심이 된다.

반면 영국 고딕은 보다 사회적이다. 개인의 정신보다, 개인을 둘러싼 구조에 더 큰 관심을 둔다. 계급, 재산, 가문, 그리고 사회적 체면 같은 요소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다. 영국 고딕의 저택들은 초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장소처럼 그려진다. 콘월 해안의 바람 부는 저택, 요크셔 황무지 위에 서 있는 오래된 집. 독자는 그 장소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고, 그래서 공포는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영국 고딕의 공포는 종종 사회적 위선에서 비롯된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가정, 우아한 예절, 교양 있는 대화.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부패와 폭력, 그리고 숨겨진 진실이 존재한다.

『레베카』의 맥심은 명망 있는 귀족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며, 누구나 신뢰할 법한 남자다. 그러나 그는 살인을 저질렀다. 『리틀 페이스』의 데이비드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매력적인 남편이다. 잘 교육받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호감형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는, 독자가 직접 확인해야 할 영역으로 남겨 두는 편이 좋겠다.

영국 고딕은 계급 사회가 가진 어두운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상류층일수록, 중상류층일수록 비밀을 감추기 쉽다. 재산이 있고, 명성이 있고, ‘좋은 가문’ 출신이라는 평판이 있다면, 사람들은 쉽게 의심하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는 때로 방패가 된다.

그래서 『리틀 페이스』 속에서 앨리스가 경찰에게 자신의 아기가 바뀌었다고 말했을 때, 경찰은 그녀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데이비드는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유하고, 교육받았고, 감정적으로 안정되어 보인다. 비비안 역시 존경받는 여성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저지를 리 없다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고딕 소설은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가. 완벽해 보이는 삶은, 정말 완벽한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장소와 사람들 속에서, 진짜 공포가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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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고딕 패러디 소설 『노생거 사원』(1818)의 순진한 주인공 캐서린 몰랜드. 출처: Public Domain

 

2000년대의 가스라이팅 – 왜 지금도 이 이야기를 하는가

 

1938년 『레베카』가 출간되었고, 1944년에는 『가스라이트』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약 60년이 흐른 뒤, 2006년에 『리틀 페이스』가 세상에 나왔다. 시대는 바뀌었고, 사회는 훨씬 더 개방적이고 현대적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쓰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불편하다. 그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정 폭력, 그중에서도 심리적 학대와 정서적 학대는 지금도 여전히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리적인 상처가 남지 않는 경우가 많고,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증거도 없다. 피해자는 상처를 설명해야 하고, 설명하는 순간 오히려 과장하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 쉽다. 그래서 이 폭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지속된다.

영국의 통계 역시 이 현실을 보여준다. 국가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3월까지의 1년 동안,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16세 이상 여성의 약 5.7%가 가정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은 약 3% 수준이었다. 이 수치에는 단순한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고함, 모욕, 통제, 사회적 고립, 그리고 가스라이팅과 같은 심리적 학대가 포함된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폭력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중상류층 가정에서는 이런 폭력이 더 쉽게 숨겨질 수 있다. 사회학자 수전 웨이츠만은 2000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니야』라는 책에서, 부유한 가정 안에서 발생하는 숨겨진 학대를 분석했다. 그녀는 중상류층 여성들이 가정 폭력을 신고하기 어려운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째는 사회적 인식이다. ‘좋은 가문’이나 ‘존경받는 집안’에서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둘째는 경제적 의존이다. 남편이 재정을 통제하는 경우, 피해자는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독립적으로 생활할 기반을 마련하기 어렵다. 심지어 친구나 가족, 사회적 네트워크까지 남편 쪽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셋째는 사회적 지위다. 남편이 의사나 변호사, 사업가처럼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다니거나 자선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좋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 사람이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 자체를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리틀 페이스』 속 앨리스는 바로 이런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데이비드는 겉으로 완벽에 가까운 남편이다. 안정적인 사회적 위치, 세련된 태도, 감정적으로 안정된 모습. 비비안 역시 주변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집은 아름답고, 품격 있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그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까. 고딕 소설이 오랫동안 반복해 온 질문은 바로 여기에서 다시 살아난다.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삶은, 정말로 안전한 삶인가. 그리고 우리가 가장 믿고 싶은 사람들,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공간 속에서야말로, 가장 보이지 않는 형태의 폭력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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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주제에 대한 Google 트렌드 검색은 2016년부터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출처: By RCraig09 - Own work, CC BY-SA 4.0

 

모성과 증거

 

『리틀 페이스』가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엄마는 본능적으로 자기 아기를 알아본다는 믿음이, 과연 범죄 사건에서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앨리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이 아기는 내 딸이 아니라고. 그녀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얼굴이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무엇보다 느낌이 다르다고 말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갓난아기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경찰 역시 냉정하게 묻는다. 객관적인 증거가 있느냐고. 비비안은 더 미묘한 방식으로 의심을 던진다. 출산한 지 겨우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말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우리는 흔히 모성 본능이라는 개념을 믿는다. 엄마는 아기를 본능적으로 알아본다고, 아기가 배고픈지, 아픈지, 두려워하는지 직감적으로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과학적으로 어디까지 설명될 수 있을까. 그리고 법정에서, 객관적 증거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심리학자들은 모성이라는 감각이 완전히 타고나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요소와 학습된 경험이 함께 작용하는 결과에 가깝다. 엄마는 아기와 시간을 보내면서, 울음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배우고, 표정의 변화를 읽고, 몸짓과 리듬을 기억한다. 관계는 그렇게 서서히 형성된다.

그렇다면 만약 그 시간이 단 2주뿐이라면 어떨까. 정말로 아기의 얼굴과 존재를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특히 출산 직후의 극심한 피로, 급격한 호르몬 변화, 그리고 만성적인 수면 부족 속에서라면.

『리틀 페이스』는 바로 이 불편한 지점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우리는 앨리스를 믿어야 할까.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데이비드의 말이 맞는 것일까. 그녀가 산후 우울이나 혼란 속에서 현실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이 진행될수록, 독자는 점점 더 확신을 잃는다. 소피 해나는 의도적으로 양쪽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둔다. 어떤 장면에서는 앨리스가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감각은 너무 구체적이고, 너무 절박해서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또 다른 장면에서는, 그녀가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가스라이팅 서사의 진짜 힘이 드러난다. 독자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야기 속 인물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읽는 우리 역시 현실을 의심하게 된다. 어느 순간, 독자 자신도 이야기 속 심리적 미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1938년 『레베카』에서 두 번째 부인은 물었다. 맥심은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레베카를 사랑하는 것일까.1944년 『가스라이트』에서 폴라는 물었다. 내가 본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미친 것일까. 2006년 『리틀 페이스』에서 앨리스는 묻는다. 이 아기는 정말 내 딸일까, 아니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8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질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믿고 있던 세계가 잘못된 것인가.

여성 고딕이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말을 쉽게 의심한다. 특히 그녀가 감정적으로 보일 때, 불안정해 보일 때, 이성적이지 못해 보일 때. 반대로 우리는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사람을 쉽게 믿는다. 부유하고, 교육받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집이라는 공간을 안전한 장소로 상상한다. 그러나 통계와 수많은 서사는 반복해서 말한다. 많은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공간은 낯선 골목이 아니라, 바로 집일 수도 있다고.

소피 해나는 80년 전의 이야기를 2006년에 다시 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이다. 무엇이 정말로 달라졌는가. 우리는 정말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귀 기울이게 된다. 앨리스의 목소리에. 레베카의 침묵에. 폴라의 절규에. 그리고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우리는 누구를 믿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생각해볼 질문들

  • 만약 당신이 『리틀 페이스』의 경찰이라면, 앨리스와 데이비드 중 누구를 믿겠나? 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외모, 태도, 계급, 성별 중 무엇이 당신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까?
  •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스라이팅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적이 있나? 그때 주변 사람들은 누구를 믿었나? 왜 가해자가 더 이성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을까?
  • 『레베카』, 『가스라이트』, 『리틀 페이스』는 모두 큰 집에 갇힌 여성을 다룬다. 80년이 흐르는 동안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나? 현대 한국 사회에도 맨덜리더 엘름스 같은 공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 Thomas Newman - Dead Already (아메리칸 뷰티 OST) – 중산층 가정의 표면 아래 감춰진 공허와 폭력

 

다음 주 예고

다음 주에는 앨리스의 직업,  동종요법사homeopath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한국 독자들에겐 조금 의아할 거다. 동종요법? 그거 사이비 의학 아닌가? 물에 설탕 타서 파는 거 아닌가?

맞다. 동종요법은 이미 플라시보 효과 이상의 치료 효과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사이비 의학이다. 2010년 영국 하원 과학기술위원회는 동종요법은 플라시보다라고 공식 선언했고, 2017년 NHS(국민의료서비스)는 동종요법 처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도 영국에서는 여전히 동종요법이 성행 중이다.

런던 메이페어의 고급 클리닉들, 코츠월드의 웰빙 리트릿, 그리고 무엇보다 왕실. 찰스 3세는 평생 동종요법을 옹호해왔다. 엘리자베스 2세도 동종요법 주치의가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도 동종요법을 애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국의 고급 슈퍼마켓인 Waitrose에 가면 동종요법 제품 코너가 있다. 영국 최대 약국 체인인 Boots에서도 구할 수 있으며, 건강식품 체인인 Holland & Barrett도 동종요법 전문 섹션을 운영한다.

대체 왜? 과학이 거짓이라고 증명한 것을 왜 영국 사회는 계속 사용하는 걸까?

그리고 소피 해나는 왜 앨리스를 동종요법사로 설정했을까? 이것이 소설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될까?

다음 주, 설탕알약 속에 숨은 영국 계급사회의 비밀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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