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판코트는 출산 이후 처음으로 집 밖의 공기를 마셨다. 겨우 두 시간, 머리카락을 다듬기 위한 소소한 이유에서였다. 문을 나설 때, 그녀는 남편 데이비드의 품에 갓 태어난 딸 플로렌스를 맡겼다. 그리고 시계 바늘이 두 번의 원을 그리기도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요람 앞에 선 순간, 그녀의 심장은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을 느꼈다.
누워 있는 아기가… 낯설었다.
눈썹의 곡선이 달랐다. 코의 선이 다르고, 입술의 윤곽도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아주 정교하게,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게 흉내 낸 얼굴처럼. 앨리스의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문장이 울렸다.
‘이 아이는 내 딸이 아니다.’
엄마는 안다. 엄마는 자기 아이를 안다. 심장이 먼저 알아보고, 몸의 감각이 먼저 기억한다.
앨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이 아기는 누구예요? 플로렌스는 어디 있어요?”
데이비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이게 플로렌스잖아.”
“아니에요.” 앨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우리 딸이 아니에요.”
“여보, 왜 그래? 진정해.”
“누가 우리 딸을 데려갔어요. 누가 다른 아기로 바꿔치기했어요!”
그녀는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경찰 역시 앨리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데이비드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아내가 출산 후 예민해졌다고, 산후우울증을 걱정하고 있다고. 아기를 단 한 순간도 혼자 두지 않았으며, 그 사이 집에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곧 시어머니 비비안이 휴가를 접고 급히 돌아왔다. 그녀 역시 앨리스를 바라보는 눈빛에 의심이 담겨 있었다.
“자기 딸을 못 알아보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2006년, 바로 이 기묘하고도 섬뜩한 전제에서 시작된 한 권의 소설이 영국 문단을 뒤흔들었다. 소피 해나의 데뷔작, 『리틀 페이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엄마의 믿음과 세계의 의심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을, 조용하지만 잔인하게 독자의 마음속에 새겨 넣는다.

시인이 쓴 추리소설
소피 해나.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영국의 독자들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시인 소피 해나? 그 소피 해나가 추리소설을 썼다고? 시와 피, 은유와 범죄, 종이 위의 고요한 언어와 페이지를 넘길수록 빨라지는 심장 박동. 서로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두 세계가, 그 이름 앞에서 갑자기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1995년, 스물네 살의 소피 해나는 첫 시집 『영웅과 옆집 소녀』로 문단의 문을 두드렸다. 평단의 반응은 뜨거웠고, 시인 캐슬린 제이미는 그녀를 “창의적 영리함의 보석”이라 불렀다. 웬디 코프, 루이스 캐럴의 이름이 그녀의 이름 곁에 나란히 놓였다. 경쾌하면서도 날카롭고, 가벼운 농담처럼 시작해 어느새 독자의 발밑을 흔드는 언어. 형식을 다루는 손길에는 놀라울 만큼의 정확함과 통제력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시는 거창한 진리보다 일상의 틈을 응시했다. 실패로 끝난 연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낯선 이웃,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서툰 사람들. 사소한 불만과 말해지지 못한 분노, 웃음 뒤에 숨은 은밀한 악의. 읽다 보면 미소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 미소의 그림자에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마치 부드럽게 웃으며, 조용히 칼날을 겨누는 사람처럼.
2004년, 그녀는 영국 시 협회의 ‘차세대 시인’으로 선정되었다. 다섯 번째 시집 『초보자를 위한 비관주의』는 2007년 T.S. 엘리엇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윽고 그녀의 시는 교과서 속으로 들어가 영국 전역의 교실에 놓였다. GCSE와 A-Level 시험을 준비하는 십대들이, 그녀의 문장을 외우며 밤을 보냈다. 시는 이제 무대와 책장을 넘어, 시험지 위의 잉크가 되었다.
그런 성공한 시인이, 2006년. 갑자기 추리소설을 들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물었다. 왜 하필 추리소설이냐고. 이미 시로 충분히 유명하지 않느냐고. 소피 해나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자신은 늘 범죄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다만 시가 먼저 세상에 나왔을 뿐이라고. 추리소설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그러나 그녀의 데뷔작『리틀 페이스』를 펼친 독자들은 곧 알아차렸다. 이것은 단지 시인이 한 번쯤궁금해서 써본 결과가 아니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감정의 결을 다루는 섬세함과, 불안을 조율하는 리듬 등이 버무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독자들은 깨달았다. 시와 범죄는 그렇게 멀리 떨어진 세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둘 다 결국, 인간의 마음속 가장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이라는 것을.
소피 해나 작가. 출처: The Bookseller
케임브리지에서 배운 것들
소피 해나는 1971년, 안개와 붉은 벽돌의 도시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작가 아델 게라스, 아버지는 정치이론가 노먼 게라스. 그 집의 식탁 위에서는 빵과 차만 오르내린 것이 아니었다. 문장과 사상, 이야기와 논쟁이 함께 놓였다. 아이였던 소피 해는 그 사이에서, 언어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들을 보고 자랐다.
그녀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9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향했다.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창작 분야 펠로우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두 해 동안, 그녀는 케임브리지의 오래된 돌담과 잔디밭 사이에서 시를 썼다. 고요한 도서관의 창가에서, 강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이후 그녀는 옥스퍼드 대학교로 옮겨 울프슨 칼리지에서 주니어 리서치 펠로우로 2년을 보냈다.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무게감 있는 두 이름. 그러나 그곳에서 소피 해나가 배운 것은 학문의 규율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하나의 사회를 보았다. 말투 하나, 몸짓 하나에 스며든 계급의 감각. 예의 바른 미소 뒤에 숨겨진 거리감과, 침묵 속에 쌓이는 서열의 질서.
큰 저택과 오래된 가문, 겉으로는 우아하고 교양 있어 보이지만, 그 안쪽에는 비밀과 거짓말이 겹겹이 쌓인 세계. 그녀는 그 세계를 관찰했다.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그리고 그 시선은 소설 속으로 스며들었다.
『리틀 페이스』에 등장하는 거대한 저택 ‘더 엘름스’. 그곳을 장악한 시어머니 비비안, 완벽해 보이지만 어딘가 금이 간 남편 데이비드. 이 인물들과 공간은, 그녀가 케임브리지의 복도와 정원, 응접실과 만찬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의 그림자였다. 현실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다시 현실을 비추는 방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전경. 출처: 더 펀트
애거서 크리스티의 후계자
2014년 9월, 한 줄의 소식이 문단을 가로질러 파문처럼 번졌다. 소피 해나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남긴 명탐정 에르큘 푸아로 시리즈를 이어 쓴다는 소식이었다.
애거 크리스티는 1976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그녀의 캐릭터 푸아로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거의 40년 동안, 그의 콧수염과 회색 양복, 날카로운 눈빛은 책장 속에 잠들어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세계는 달라졌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남아 있었다.
이 탐정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크리스티의 가족과 유산 관리단은 오래 고민했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다. 크리스티의 스타일을 이해하고, 그 세계의 숨결을 존중하며, 동시에 21세기의 독자들에게도 심장을 뛰게 할 작가. 과거를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전통을 이어갈 사람.
그리고 그들이 고른 이름이, 바로 소피 해나였다.
『모노그램 살인』, 『클로즈드 캐스킷』, 『미스터리 오브 쓰리 쿼터스』, 『킹피셔 힐의 살인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에르큘 푸아로의 고요한 밤』까지. 그녀가 쓴 다섯 권의 푸아로 소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낡은 세계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고, 독자들은 또다시 페이지를 넘기며 추리를 시작했다.
소피 해나는 이 작업을 단순한 모방이 아닌, 계승이라고 불렀다. 크리스티가 만들어 놓은 집에, 새로운 방을 하나 더 짓는 일. 벽의 색은 바뀌어도, 집의 기둥은 그대로 두는 일.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크리스티를 읽으며 자랐다고. 퍼즐처럼 맞물리는 플롯, 예기치 못한 반전,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진실의 섬광. 자신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그녀의 소설 속에는 마음의 미로가 있다. 인간관계가 만들어내는 얽힘, 거짓말 위에 덧붙여지는 또 다른 거짓말,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 범인은 단지 범죄의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이 된다.
그래서 그녀의 푸아로는, 단지 단서를 모으는 탐정이 아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 독자들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추리 게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소피 해나가 집필한 푸아로 시리즈들
시와 범죄의 교차점
시인이 범죄소설을 쓴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시는 함축과 여백의 예술이고, 범죄소설은 명확한 플롯과 해답을 요구하는 장르다. 하나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고, 다른 하나는 끝내 밝혀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서로 다른 세계, 서로 다른 호흡.
그러나 소피 해나는 그 사이에 숨겨진 닮은 얼굴을 본다.그녀는 말한다. 시와 범죄소설, 둘 다 긴장감 위에 서 있다고. 시는 짧은 공간 안에 최대한의 의미를 압축해야 하고, 모든 단어가 무게를 가져야 한다. 범죄소설도 마찬가지다. 모든 단서가 의미를 품고 있어야 하며,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문장 하나, 장면 하나가 허공에 떠 있으면, 이야기는 무너진다.
그녀의 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안에는 언제나 반전이 숨어 있다. 처음에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처럼 보인다. 실패한 연애, 사소한 대화, 별것 아닌 순간들. 그러나 마지막 연에 이르면, 의미가 뒤집힌다. 독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이 놓쳤던 말의 그림자를 찾는다. “아, 그래서 이 문장이 저 자리에 있었구나”하고 말이다.
그 구조는, 범죄소설과 닮아 있다. 모든 단서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라는 사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앞의 모든 장면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소피 해나의 시와 소설은 같은 심장을 공유한다. 인간관계의 어두운 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통제. 가족이라는 말로 포장된 폭력과 침묵.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세계를 품고 있는 사람들.
그녀의 시 중 하나인 『간통에 서툰』을 떠올려 보자. 불륜을 저지르고 싶어 하지만, 너무 양심적이고 너무 서툴러서 끝내 실패하는 화자의 이야기다.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웃음은 금세 씁쓸해진다. 우리는 모두 나쁜 생각을 한다. 다만,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조용히 드러난다.
『리틀 페이스』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는 겉으로는 완벽한 남편이다. 잘생기고, 부유하고, 교양 있으며, 다정하다. 그러나 그 완벽함의 뒤편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가. 비비안은 사랑스러운 할머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미소의 방향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시인 소피 해나는 사람들의 표면 아래를 본다. 말과 표정, 예의와 친절 아래에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을.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 때로는 몇 줄의 시로, 때로는 수백 페이지의 범죄소설로.
형식은 달라도, 그녀가 파고드는 곳은 같다.인간의 마음이라는, 가장 조용하고, 가장 위험한 장소.

이번 달, 우리가 읽을 이야기
『리틀 페이스』는 단순한 ‘바뀐 아기’의 이야기가 아니다.이 소설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누구를 믿는가. 무엇을 믿는가. 내가 본 것을 믿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는가. 눈과 귀, 그리고 마음 사이에서, 진실은 어디에 머무는가.
이것은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는 자기 아이를 안다고, 세상은 말한다. 심장이 먼저 알아본다고, 본능이 증거라고. 하지만 정말 그런가. 사랑은 사실이 될 수 있는가. 믿음은 증명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가스라이팅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이 미쳤어”, “당신이 착각한 거야”, “당신이 예민해진 거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당신의 현실을 하나씩 지워갈 때, 당신은 무엇으로 자신을 붙잡을 수 있는가. 기억인가, 감각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확신인가.
이것은 계급에 대한 이야기다. 거대한 저택, 오래된 가문, 완벽해 보이는 가족. 창문 너머로는 잔디가 고요히 펼쳐지고, 식탁 위에는 은빛 식기가 반짝인다. 그러나 그 안쪽, 문이 닫힌 방에서는 무엇이 벌어지는가. 침묵은 어떻게 권력이 되고, 예의는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은 하나인가, 아니면 사람 수만큼 존재하는가.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따라가야 하는가.
앨리스는 미쳐가는 것일까, 아니면 혼자서 진실을 붙들고 있는 것일까. 데이비드는 사랑하는 남편일까, 아니면 가장 가까운 위험일까. 그리고 요람 속의 아기는, 도대체 누구인가.
앞으로 한 달 동안, 우리는 이 질문들 사이를 함께 걸을 것이다. 시인이 쓴 범죄소설.긴장과 서정이 맞닿는 자리, 공포와 아름다움이 동시에 숨 쉬는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어두운 얼굴을 가장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
앨리스의 손을 잡고, 우리도 함께 ‘더 엘름스’의 문을 열어보자. 그 안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해볼 질문들
- 아무도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 직감이라는 건 얼만큼 믿을 수 있는가? 엄마는 정말로 갓 태어난 자기 아기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가? (병원에서 막 태어난 신생아가 실수로 바뀐다면?)
- 시인이 추리소설을 쓰는 것과 전문 추리소설가가 쓰는 추리소설은 어떻게 다를까
- 당신은 언제 누군가를 ‘믿을만하다’라고 결정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 Dario Marianelli - “Dawn” – 영국 빅토리아식 저택의 우아함과 비밀스러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더 엘름스’를 상상하며 듣기 좋습니다.
다음 주 예고
다음 주, 우리는 『리틀 페이스』의 뿌리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38년, 대프니 듀 모리에는 한 권의 소설로 고딕의 문을 열었다. 『레베카』. 죽은 첫 번째 아내의 그림자가 여전히 숨 쉬는 거대한 저택, 맨덜리. 그 안에 들어온 것은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젊은 두 번째 부인. 그리고 그녀를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가정부, 댄버스 부인. 복도는 길고, 방은 넓지만, 그녀가 설 자리는 없다.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무대가 된다.
1944년,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 『가스라이트』세상에 공개됐다. 남편은 아내를 미치게 만들기 위해, 집 안의 가스등을 조금씩 조작한다. 여기서 하나의 단어가 태어난다. 가스라이팅. 현실을 부정하고, 기억을 흔들고, 결국 상대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심리적 폭력. 이후 이 단어는 심리학과 페미니즘의 언어가 되어, 이름 붙일 수 없던 경험들에 이름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리틀 페이스』의 앨리스는, 이 오래된 전통의 후예다. 거대한 빅토리아식 저택 ‘더 엘름스’는 맨덜리의 그림자를 닮았고, 전처 로라의 미스터리한 죽음은 레베카의 유령처럼 집 안을 떠돈다. 강력한 시어머니 비비안의 얼굴엔 댄버스 부인의 모습이 아른거리, “당신이 착각한 거예요”라는 말은, 가스라이팅의 가장 조용하고 가장 잔인한 형태로 울린다.
왜 빅토리아식 저택은 늘 공포의 무대가 되는가.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탄생했고, 왜 지금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1940년대의 고딕 스릴러와 2000년대의 심리 스릴러는 무엇을 공유하고, 무엇을 달리 말하는가. 영국의 여성 고딕은, 미국의 고딕과 어떤 온도와 색을 지니는가.
다음 주, 우리는 80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레베카에서 앨리스로 이어지는 목소리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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