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인도와 스리랑카의 하늘 아래에서는 작은 공 하나가 쉼 없이 날아오르고 있다. 2026년 2월 7일 막을 올린 국제크리켓평의회(ICC) 남자 T20 크리켓 월드컵은 3월 8일까지 두 나라의 여덟 개 경기장을 돌며 총 55경기를 치른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그라운드 위의 승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치열한 이야기들이 경기장 밖에서 먼저 펼쳐졌다. 방글라데시의 대회 퇴출, 파키스탄의 인도전 보이콧 선언과 번복, 그리고 스리랑카의 중재 시도까지. 개막 전부터 이어진 이 일련의 사건들은 스포츠 뉴스라기보다 국제 정치 기사에 가까운 긴장감을 띠며 세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크리켓이 낯선 한국 독자에게는 이 소동이 다소 기이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야구와 비슷하다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규칙도 다르고 경기의 호흡도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이 경기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으키는 파문은 단순한 승패를 넘어선다. 한 경기가 끝나면 도시 전체가 숨을 내쉬고, 한 번의 패배가 국가적 상처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한국에서 월드컵 축구가 불러일으키는 열기와도 비슷하지만, 그 감정의 깊이와 역사적 무게는 또 다른 차원에 있다.
크리켓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한때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대영제국이 남긴 가장 오래 지속되는 문화적 흔적이며, 동시에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그 제국을 상대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해 온 무대이기도 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맞붙는 경기는 단순한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의 기억이 응축된 역사적 순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작은 섬나라 스리랑카의 승리는 식민지 경험을 공유한 국민들에게 깊은 자부심을 안겨 준다. 그래서 크리켓 경기장은 때로는 외교의 연장선이 되고, 때로는 민족 감정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분출되는 공간이 된다.
전 세계 약 25억 명이 이 스포츠를 지켜본다. 한국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인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이야기다. 크리켓은 공과 배트로 이루어진 경기이면서 동시에 역사와 정치, 기억과 정체성이 서로 부딪히는 거대한 서사다. 그래서 이 작은 공이 날아가는 궤적 속에는 단순한 점수 이상의 의미가 실려 있다. 그것은 제국의 그림자와 독립의 기억, 경쟁과 화해의 가능성,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존심이 함께 날아가는 궤적이기도 하다. 오늘, 그 궤적을 함께 따라가 보자.
2022 남자 T20 크리켓 월드컵 결승전. 잉글랜드 vs 파키스탄. 출처: Storm machine - Own work, CC BY-SA 4.0
야구의 아주 먼 친척, 크리켓
크리켓의 열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경기가 어떤 모습인지부터 그려 볼 필요가 있다. 야구와 마찬가지로 배트로 공을 쳐 점수를 얻는 스포츠이지만, 실제로는 닮은 듯 전혀 다른 리듬과 철학을 지닌 경기다. 두 스포츠가 먼 친척이라면, 함께 자라지 못한 사촌쯤에 가깝다.
크리켓은 11명으로 이루어진 두 팀이 맞붙는다. 넓은 타원형 잔디 한가운데에는 ‘피치’라고 불리는 길고 좁은 직사각형 구역이 있고, 그 양 끝에는 세 개의 나무 기둥으로 된 ‘위켓’이 서 있다. 공격 팀이 타격을 하는 동안, 수비 팀의 투수 역할을 하는 ‘볼러’는 공을 던져 이 위켓을 맞히거나 타자를 아웃시키려 한다.
타자는 공을 쳐 위켓을 지키면서 득점을 노린다. 공을 친 뒤 피치의 반대편까지 뛰어가면 1점, 공이 땅을 굴러 경계선을 넘으면 4점, 공중으로 곧바로 넘기면 6점이 주어진다. 열 명의 타자가 모두 아웃되거나 정해진 투구 수가 끝나면 공수는 교대된다. 야구의 ‘이닝’과 비슷한 개념이 존재하지만, 크리켓의 이닝은 훨씬 더 길고 묵직하다. 한 이닝이 하루를 통째로 삼키기도 한다.
크리켓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서로 성격이 완전히 다른 세 가지 경기 형식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의 스포츠 안에 세 개의 다른 시간 감각이 공존하는 듯하다.
가장 오래된 형식인 테스트 크리켓은 최대 5일 동안 이어진다. 각 팀은 두 번씩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하며, 투구 수에도 제한이 없다. 경기가 며칠 동안 계속되다가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그대로 무승부로 끝난다. 승리보다 인내와 균형, 전략과 집중력이 더 중요하게 평가되는 경기다. 크리켓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 형식을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형태’로 여긴다. 시간 자체를 경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원데이 인터내셔널(ODI)은 하루 안에 끝나는 형식이다. 각 팀은 50오버, 즉 300개의 공 동안 공격한다. 여기서 ‘오버’란 한 볼러가 연속으로 6개의 공을 던지는 단위다. 경기 시간은 7~8시간에 이르러 결코 짧지 않지만, 테스트처럼 며칠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전략과 긴장감, 체력과 집중력이 균형을 이루는 형식으로, 4년마다 열리는 크리켓 월드컵이 바로 이 방식으로 치러진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등장한 T20는 전혀 다른 얼굴의 크리켓이다. 각 팀이 단 20오버, 즉 120개의 공만 공격하며 경기는 약 3~4시간 만에 끝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질주 하듯 이어지는 경기로, 거대한 홈런에 해당하는 장타와 예측 불가능한 반전이 끊임없이 터진다. 지금 열리고 있는 2026년 월드컵도 이 형식이다. 2000년대 초 도입된 이후 젊은 관중을 끌어들이며 크리켓의 세계를 단숨에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인도의 인도 프리미어리그(IPL)은 천문학적인 중계권료와 스타 선수들을 앞세워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스포츠 리그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한국의 야구에 빗대어 보자면, 테스트 크리켓은 시간이 넉넉하던 시절의 느긋한 경기, ODI는 오늘날의 정규 시즌, T20는 화려한 이벤트 경기나 올스타전 같은 축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야구 한 경기가 외교 갈등이나 국가 간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지만, 크리켓에서는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진다.
그 이유는 이 경기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국가의 자존심이 응축된 무대이기 때문이다. 크리켓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때로 단순히 점수를 많이 냈다는 의미를 넘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어떤 이야기에서 한 줄의 결론을 얻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스포츠는 공 하나로 시작되지만, 끝날 때는 종종 한 나라의 감정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마이클 허시가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 대 남아프리카공화국 박싱데이 테스트 경기 둘째 날, 숀 폴록의 투구를 받아 치고 있다. (2005년 12월 26일) 출처: Prescott Pym on Flickr - https://www.flickr.com/photos/ppym1/87330394/, CC BY 2.0
콜롬보의 밤, 정치가 그라운드에 서다
이번 T20 대회를 뒤흔든 갈등의 뿌리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오래도록 켜켜이 쌓여 온 정치적 적대에 있다. 두 나라는 분단과 전쟁, 종교와 영토 문제를 둘러싼 충돌을 수십 년째 이어 오고 있으며, 그 긴장은 스포츠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크리켓에서는 그 감정이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2024년 12월, ICC의 중재 아래 양국은 하나의 기묘한 타협에 도달했다. 2024년부터 2027년까지 어느 한쪽이 ICC 대회를 개최하더라도, 상대국은 그 나라 땅을 밟지 않고 제3국의 중립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른다는 내용이었다. 외교적 단절을 유지하면서도 스포츠 경쟁은 이어 가겠다는, 냉전 시기의 체스 경기처럼 묘하게 절충된 합의였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서도 파키스탄의 모든 경기는 공동 개최국인 스리랑카에서 열리도록 배치되었다.
그러나 개막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인도 프리미어리그 소속 구단 콜카타 나이트라이더스가 방글라데시 대표 선수 무스타피주르 라흐만과의 계약을 돌연 해지한 것이다. 방글라데시 크리켓위원회는 이를 단순한 계약 문제가 아니라 자국 선수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결국 인도에서 치러지는 경기에 출전을 거부했다. ICC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대신 스코틀랜드를 긴급 초청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남자 T20 월드컵 역사상 방글라데시가 불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아시아의 거대한 감정 지도에서 또 하나의 균열이 생긴 셈이었다.
파키스탄은 이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인도와의 경기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러나 스포츠는 정치와 달리 계산이 분명하다. ICC의 경고, 개최국 스리랑카 대통령의 설득, 그리고 보이콧 시 승점 몰수와 향후 제재라는 현실적인 대가 앞에서 파키스탄은 결국 입장을 바꾸었다. 국가의 자존심과 국제 스포츠 질서 사이에서 내려진, 조용하지만 무거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2월 15일 밤, 스리랑카 콜롬보의 R. 프레마다사 스타디움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기는 예정대로 열렸다. 3만 5천 석의 관중석은 일찌감치 매진되었고, 도시는 갑작스러운 축제와 긴장 속에 들끓었다. 평소 100달러 정도이던 호텔 객실 요금은 660달러까지 치솟았고, 인도 첸나이에서 출발하는 항공권 가격은 세 배 이상 뛰었다. 국경을 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어려워도, 크리켓을 향한 열정만큼은 어떤 장벽도 쉽게 넘는다.
한 인도 관중은 경기장 밖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키스탄을 이기는 그 기분은 돈으로도 살 수 없어요. 이건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거든요.” 그 말 속에는 경쟁심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었다. 역사, 기억, 상처, 그리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묶인 감정의 덩어리였다.
실제로 이 두 나라의 경기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스포츠 이벤트 가운데 하나다. ICC에 따르면, 2025년 챔피언스 트로피에서 열린 인도-파키스탄전은 텔레비전 시청 시간만 260억 분을 기록하며 원데이 인터내셔널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숫자로 환산하면 지구상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같은 장면을 바라본 것과 비슷한 규모다.
그날 밤 콜롬보에서는 두 팀이 경기를 치렀지만, 실제로는 두 나라의 기억과 감정이 서로를 향해 서 있었다. 크리켓 공은 피치를 따라 오갔지만, 그 궤적 위에는 정치와 역사,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래서 그 경기는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라기보다, 전쟁 대신 치르는 또 하나의 전투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2023년 크리켓 월드컵에서 열린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기. 출처: Pantman2 - Own work, CC BY-SA 4.0
제국의 놀이에서 저항의 무대로
크리켓이 왜 이토록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면, 그 공이 처음 굴러가기 시작한 자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크리켓의 역사는 곧 대영제국의 팽창과 몰락,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나라들의 정체성 투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크리켓은 16세기 잉글랜드 남동부의 한적한 농촌에서 태어나 점차 귀족과 상류층의 여가 문화로 자리 잡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영국다움’을 상징하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신사도, 절제, 규율, 공정한 경쟁 등, 제국을 지탱한다고 믿어졌던 가치들이 크리켓의 규칙과 예법 속에 녹아 있었다. 선수들이 입는 눈부시게 흰 유니폼조차 청교도적 순결과 도덕성을 드러내는 표식처럼 여겨졌다.
로저 펜턴이 1857년 7월 25일에 촬영한, 크리켓 경기 중 최초로 기록된 사진. 출처: Desertarun1 - Own work, Public Domain
19세기 말 잉글랜드 대표 선수였던 펠럼 워너는 “크리켓은 스포츠 경기 이상의 것이 되었다. 하나의 제도이자 열정이며, 종교라 해도 좋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이 스포츠는 영국 본토를 넘어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런던의 로즈 구장에서 시작된 경기는 시드니, 홍콩, 카리브해의 섬들까지 이어졌고, 영국의 깃발이 꽂힌 곳마다 크리켓도 함께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확산은 결코 중립적인 문화 교류가 아니었다. 제국은 크리켓을 통해 식민지 사람들에게 규율과 복종, 충성이라는 질서를 학습시키려 했다. 공을 기다리고 차례를 지키며 규칙을 준수하는 경기 방식은, 제국이 바랐던 ‘문명화된 신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장치였다.
18세기 초 동인도회사 상인과 선원들이 인도에서 경기를 시작했고, 1792년에는 캘커타 크리켓 클럽이 설립되었다. 호주 시드니에서도,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도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특히 서인도제도에서는 백인 농장주 계층이 크리켓을 통해 아프리카계 노동자들과의 위계와 경계를 재확인하는 의식처럼 이 스포츠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지점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스포츠의 특성상, 사람들은 경기를 ‘관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방’하기 시작했고, 모방은 곧 숙달로 이어졌다. 그리고 숙달은 결국 전복으로 나아갔다. 식민지 출신 선수들이 종주국의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크리켓은 더 이상 제국의 권위를 재현하는 무대가 아니라 그것을 흔드는 공간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수 공동체인 파르시들이 가장 먼저 크리켓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영국 문화와 인도 사회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며 스포츠를 확산시켰고, 이후 크리켓은 카스트와 계급의 장벽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859년 북아메리카로 향하는 배 위에서. 최초로 해외 투어에 나선 잉글랜드 크리켓 팀. 출처: Unknown author – possibly Fred Lillywhite (1829–1866) - en:Fred Lillywhite, Shutup !!, Lillywhite, 1860, Public Domain
카리브해에서는 더욱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트리니다드 출신 사상가 C. L. R. 제임스는 『경계 너머로』라는 책에서, 크리켓이 식민 지배의 도구에서 반식민 저항의 상징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정밀하게 기록했다. 1970~80년대 세계 최강이었던 서인도제도 팀의 압도적 승리는 단순한 스포츠 성취를 넘어, 과거의 피지배 민족이 지배자를 그들의 방식으로 압도한 역사적 사건처럼 받아들여졌다. 비비안 리처즈 같은 선수는 영웅이자 해방의 상징이 되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은 크리켓에도 깊은 균열을 남겼다. 두 나라의 경쟁은 단순한 스포츠 라이벌 관계를 넘어 분단의 기억과 종교 갈등, 카슈미르 분쟁, 세 차례의 전쟁, 그리고 테러와 보복의 역사 위에 놓여 있다.
인도가 마지막으로 파키스탄을 방문해 경기를 치른 것은 2006년이었고, 양국 간 양자 시리즈는 2012~13년 이후 사실상 중단되었다. 오늘날 두 팀이 맞붙는 장면은 오직 국제 대회에서만 볼 수 있으며, 그것마저도 정치적 긴장 속에서 어렵게 성사된다.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기는 크리켓 세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이벤트가 되었다. 국제크리켓평의회조차 두 팀이 같은 조에 편성되도록 대진을 조정해 왔음을 인정한 바 있다. 이 한 경기에서 발생하는 시청률과 광고 수익이 크리켓 산업 전체를 떠받칠 만큼 막대하기 때문이다.
결국 크리켓은 제국이 만든 놀이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 제국을 넘어선 나라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자존심을 표현하는 무대가 되었다. 한때는 충성을 가르치기 위해 보급된 스포츠가 이제는 독립과 정체성을 선언하는 언어가 된 것이다. 그래서 크리켓 공이 날아갈 때마다, 그 궤적 속에는 과거의 그림자와 현재의 열망이 함께 흔들린다. 이는 단순한 경기의 움직임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자체의 진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99년 이전에 사용된 서인도 제도 크리켓 위원회(현재의 크리켓 웨스트인디스)의 깃발로, 서인도 제도 크리켓 대표팀을 식별하는 데 사용되었다. 출처: SVG created by uploader, and is represenatation of original created by West Indies Cricket Board - Cricket West Indies. SVG created by uploader, Public Domain
라호르의 총성, 크리켓이 테러의 표적이 된 날
크리켓과 정치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가장 처절하게 보여 준 사건은 2009년 3월 3일, 파키스탄 라호르의 아침에 벌어졌다. 그날 총성과 폭발음은 경기장의 함성이 아니라 전쟁의 소리처럼 도시를 뒤흔들었다. 스리랑카 대표팀을 태운 버스가 가다피 스타디움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무장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리버티 광장 근처에서 매복해 있던 12명의 공격자들은 로켓추진유탄과 수류탄,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채 버스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평범한 출근 시간의 거리 한복판이 순식간에 전장이 되었다. 이 공격으로 파키스탄 경찰과 경호원 6명, 민간인 2명이 목숨을 잃었고, 스리랑카 대표팀의 주장 마헬라 자야와르데네와 부주장 쿠마르 상가카라를 포함한 선수 여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 스포츠 선수들이 테러의 직접적인 표적이 된 사건으로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이후 가장 충격적인 사례였다.
이 비극 역시 남아시아의 정치적 긴장과 무관하지 않았다. 원래 스리랑카 대표팀은 파키스탄 원정을 계획하고 있지 않았다. 2008년 인도 뭄바이에서 발생한 대규모 테러 이후, 인도 팀이 파키스탄 방문을 취소하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스리랑카가 대신 방문한 것이었다. 일종의 외교적 호의였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파키스탄 정부는 최고 수준의 경호를 약속했지만, 실제 현장의 보호는 그 약속에 미치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 버스 운전사 메하르 무하마드 칼릴은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도 멈추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는 몸을 낮춘 채 차량을 경기장까지 몰았고, 그 짧은 몇 분이 선수들의 생사를 갈랐다. 자야와르데네 주장은 훗날 “우리의 목숨을 구한 것은 그의 용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날 경기장에 도착한 선수들은 이미 선수라기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에 가까웠다.
이 사건 이후 국제 크리켓은 파키스탄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어느 나라도 자국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파키스탄은 국제 무대에서 고립되었다. 해외에서 홈 경기를 치르는 기묘한 상황이 이어졌고, 정상적인 국제 경기가 파키스탄 땅에서 다시 열리기까지는 6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완전한 회복은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국제 대회에서 반복되는 ‘중립 경기장’ 논란의 뿌리는 바로 이 사건에 있다.
2025년 ICC 챔피언스 트로피는 파키스탄이 약 30년 만에 개최한 국제 크리켓 대회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인도는 안전 문제를 이유로 파키스탄 방문을 거부했고, 결국 인도의 모든 경기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치러지는 ‘하이브리드 개최’ 방식이 채택되었다. 하나의 대회가 두 개의 지리적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정상적이라기보다 타협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 대회에서 인도는 결승에서 뉴질랜드를 꺾고 사상 최초로 챔피언스 트로피 3회 우승을 차지했지만, 트로피의 빛 뒤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긴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라호르의 총성은 단순히 한 번의 테러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포츠조차 안전한 중립 지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순간이었다. 경기장은 원래 경쟁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날 이후 남아시아에서 크리켓 경기장은 때때로 국가 간 갈등과 불안의 바로미터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이 같은 경기장에서 맞붙을 때, 사람들은 단순히 승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상처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총성이 아닌 함성이 도시를 채우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 바람 속에는 스포츠가 다시 스포츠로만 남을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 어쩌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평화에 대한 희망이 함께 담겨 있다.
당시 사건이 일어났던 라호르 지역의 지도. 검정/회색은 팀 차량 행렬의 이동 경로를 나타내며, 파란색은 범인들의 도주 경로. 출처: OpenStreetMap edited by Yousaf465 - http://www.openstreetmap.org/export/?lat=31.51152&lon=74.33645&zoom=16Map based on the free editable OSM map http://www.openstreetmap.org/index.html. Content is available under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2.0 license., CC BY-SA 2.0
크리켓 세계의 ‘스위스’, 스리랑카
이번 2026년 T20 월드컵에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를 꼽으라면, 의외로 스리랑카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우승 후보도, 가장 큰 시장을 가진 강대국도 아니지만, 이 작은 섬나라는 경기장 안팎에서 대회의 흐름을 조용히 떠받치고 있다. 때로는 무대 뒤에서 줄을 당기는 보이지 않는 손처럼, 때로는 갈등하는 나라들 사이에 놓인 완충재처럼.
스리랑카는 공동 개최국으로서 파키스탄의 모든 경기를 자국에서 치르도록 받아들였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직접 맞붙는 경기를 위한 중립 무대가 되어 주었다. 대회 직전 파키스탄이 보이콧을 선언했을 때는 아누라 쿠마라 디사나야케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설득에 나섰다. 스포츠 외교가 국가 정상의 역할이 되는 순간이었다.
스리랑카 관광청장 부디카 헤와와삼은 “인도든 파키스탄이든 방글라데시든, 모든 남아시아 국가가 스리랑카에서 크리켓을 할 수 있다는 환영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단순한 홍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갈등으로 갈라진 지역에서 ‘모두가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라운드 위에서도 스리랑카의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2월 16일 캔디의 팔레켈레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스리랑카는 강호 호주를 8위켓 차로 완파하며 슈퍼 8 진출을 확정했다. 파툼 닛상카는 52개의 공으로 100점을 기록해 이번 대회 첫 센추리를 만들어 냈고, 호주는 탈락 위기로 몰렸다.
관중석은 축제처럼 들끓었고, 경기장은 한동안 함성으로 흔들렸다. 2009년 라호르에서 총격을 당했던 바로 그 나라가, 17년이 지난 지금 자국 경기장에서 세계 최강 팀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리켓이 가진 서사적 힘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이 스포츠에서는 시간조차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스리랑카가 크리켓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오래전부터 특별했다. 19세기 초 콜롬보의 신문에 처음 크리켓이 언급된 이후, 당시 실론이라 불리던 이 섬은 영국 제국 크리켓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기착지 역할을 했다. 인도와 호주를 잇는 항로의 중간 지점이자, 제국의 문화가 잠시 머물렀다 다시 떠나는 정거장 같은 곳이었다. 이후 스리랑카는 단순한 통과 지점을 넘어 강력한 크리켓 국가로 성장했다. 2002년 ICC 챔피언스 트로피에서는 인도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고, 아시아컵에서도 여섯 차례나 정상에 오른 전통의 강호다.
그리고 지금, 스리랑카는 남아시아 크리켓 세계에서 일종의 ‘스위스’ 같은 위치를 자처하고 있다. 직접적인 갈등의 당사자는 아니면서도 모든 당사자가 신뢰할 수 있는 공간.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이런 중립 지대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경기장은 단순한 스포츠 시설이 아니라, 정치적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는 안전한 공간이 된다.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섬이지만, 그 안에는 서로 등을 돌린 나라들이 잠시 마주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총 대신 배트를 들고, 국경 대신 경계선을 넘나드는 공을 바라보며,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같은 규칙 아래 경쟁할 수 있는 자리. 어쩌면 스리랑카가 제공하는 것은 경기장이 아니라, 갈등이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월드컵에서 스리랑카의 진짜 역할은 승패를 넘어선다. 이 나라는 단순한 개최국이 아니라, 분열된 지역을 이어 붙이는 조용한 접착제처럼 기능하고 있다. 크리켓이라는 언어로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나라들이, 잠시나마 같은 문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 지정학의 균열이 깊어질수록, 그 작은 섬이 쥐고 있는 카드의 무게는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2012년 스리랑카 원정에서 열린 첫 번째 테스트 경기. 출처: By Shehanw - Own work, CC BY-SA 3.0
왜 크리켓을 알아야 하는가
한국에서 크리켓에 대해 잘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크리켓을 모른다는 것은 지도에서 거대한 대륙 하나를 비워 두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이 스포츠는 전 세계 약 25억 명이 열광하는, 축구 다음으로 큰 규모의 문화 현상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 같은 남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영국,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카리브해 여러 섬나라가 연합해 구성한 서인도제도 팀까지 수많은 나라가 국제 크리켓 무대에 참여하고 있다.
국제크리켓평의회(ICC)의 회원국만 해도 100개가 넘는다. 경기 방식에 따라 최고 수준의 지위를 가진 나라가 따로 정해져 있지만, 가장 짧은 형식인 T20 경기는 거의 모든 회원국이 참여할 수 있어 크리켓은 사실상 전 지구적 스포츠가 되었다.
하지만 크리켓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점수판 이상의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라이벌리는 단순한 스포츠 경쟁이 아니라 카슈미르 분쟁과 핵무장을 둘러싼 긴장의 온도를 반영하는 지표처럼 작동한다. 카리브해 국가들의 연합팀인 서인도제도는 식민지 경험을 공유한 섬들이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국제 크리켓에서 추방되었다가 복귀한 역사 역시 스포츠 제재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전쟁과 혼란 속에서 성장한 아프가니스탄 대표팀의 이야기는, 폐허 속에서도 새로운 서사가 태어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크리켓은 영연방이라는 느슨한 공동체를 이어 주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연결 고리 가운데 하나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 중 상당수는 축구보다 크리켓을 통해 영국의 영향력을 받아들였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스포츠를 이해하면 ‘탈식민지화’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다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2008년 출범한 인도 프리미어리그는 크리켓 세계의 중심축이 영국에서 인도로 이동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한때 영국 귀족들의 정원에서 즐기던 스포츠가 이제는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가장 큰 돈과 관심을 끌어들이는 산업이 된 것이다. 막대한 중계권료와 광고 시장, 스타 선수들의 이동은 문화 권력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오늘날 국제 크리켓 대회는 인도의 참여 없이는 상업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울 정도이며, 이는 인도가 단순한 강팀을 넘어 크리켓 경제 전체를 좌우하는 중심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독자가 크리켓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스포츠를 알게 되면 남아시아 관련 뉴스가 전혀 다른 깊이로 읽히고, 영연방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역사 용어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네트워크로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번에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긴장이 국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 그 기사 옆에 크리켓 경기 결과가 함께 실려 있다면 놀라지 않아도 된다. 두 이야기는 오랫동안 서로의 그림자처럼 함께 움직여 왔으니까. 공 하나가 날아가는 궤적 속에서, 때로는 한 지역의 역사와 미래가 동시에 흔들리기도 한다.
2025년 기준 ICC 회원국들. (최상위 수준인) 테스트 경기를 치르는 국가들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준회원국들은 주황색으로 표시되어 있고 그중 ODI 지위를 가진 국가는 더 진한 색으로 나타나있다. 자격이 정지되었거나 이전 회원국은 짙은 회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국도 보인다.
출처: Olasyar - File:International Cricket Council members (by status).svg,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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