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벨기에 서부전선의 차가운 참호 위로 낯선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독일군 진지에서 울려 퍼진 것은 'Stille Nacht'.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다. 총성과 포성이 일상이던 전장에, 성가의 선율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영국군 병사들은 총을 잠시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그 노래에 화답했다.
그 순간, 두 참호 사이를 가르던 '노 맨스 랜드'는 더 이상 죽음만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음식을 건넸으며,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전우들의 시신을 함께 묻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공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전 용사 어니 윌리엄스는 훗날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축구공이었어. 팀을 나눠서 하는 경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다 같이 공을 찼어요. 모두가."
잠시나마 전쟁마저 멈춰 세운 것은 거창한 선언도, 정치도, 무기가 아니었다. 작은 축구공 하나였다.
2,000년 전에도 누군가는 공을 찼다
공을 차고 싶다는 인간의 충동은, 어쩌면 문명만큼이나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3세기 중국 한나라에는 '축구(蹴鞠, 쭈주)'가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공을 발로 차 그물 안에 넣는 경기였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이를 오늘날 축구의 가장 오래된 조상 격인 경기로 인정하고 있다. 한나라 군사들은 전투 훈련의 일부로 쭈주를 익혔고, 황궁에서는 귀족들의 오락으로 즐겨졌다. 시인들은 그 경기를 노래했고, 역사가들은 그 풍경을 기록으로 남겼다.
바다 건너 일본에는 '케마리'가 있었다. 7세기 아스카 시대에 대륙에서 전해진 이 놀이는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여러 사람이 함께 이어 차는 것이 핵심이었다. 승패를 겨루기보다 호흡을 맞추는 데 의미가 있었고, 경쟁보다 협력을 즐기는 놀이였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교토의 몇몇 신사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케마리 시연이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오래된 공놀이들과 오늘날 우리가 아는 축구 사이에 뚜렷한 계보가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리고 다른 여러 문명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을 차는 놀이를 만들어 냈다. 서로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공을 손에 쥐고 발앞에 두었을 때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올린 놀이였다.
공을 차고 싶다는 마음은 시대를 초월했고, 국경을 넘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오랜 충동이 처음으로 하나의 규칙과 질서를 갖춘 스포츠로 모습을 갖추게 된 곳은, 의외에도 전쟁터도 왕궁도 아닌 영국의 학교 운동장이었다.
명나라 선덕제(재위 1425~1435)가 궁중 환관들이 쭈주(蹴鞠)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출처: Unknown author - Palace Museum, Beijing, Public Domain
영국의 학교들, 저마다의 규칙을 정립하다
19세기 초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에는 '축구'라는 이름만 같을 뿐, 사실상 전혀 다른 경기들이 존재했다.
이튼 칼리지는 이튼만의 방식으로, 해로우는 또 해로우만의 방식으로 공을 찼다. 같은 공을 가지고도 규칙은 학교마다 달랐고, 어떤 학교에서는 영웅이던 플레이가 다른 학교에서는 반칙이 되곤 했다.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어떤 학교에서는 공을 손으로 들고 달릴 수 있었지만, 어떤 학교에서는 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상대의 정강이를 발로 차는 이른바 '해킹(hacking)'이 허용되는 곳도 있었고, 엄격히 금지되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학교 담장을 이용해 공을 튕겨 패스하는 것까지 인정하는 규칙도 있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학교 출신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경기가 아니라 협상이었다.
"오늘은 어느 학교 규칙으로 할 것인가."
그 짧은 질문 하나가 때로는 언성을 높이는 논쟁이 되었고, 결국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모두가 축구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누구도 같은 축구를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혼란을 끝내려는 첫 시도는 1848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사립학교 출신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두가 함께 따를 수 있는 공통 규칙을 만들었다. 이것이 훗날 '케임브리지 룰즈(Cambridge Rules)'로 불리게 된 규칙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축구를 하나의 스포츠로 통일하려는 최초의 진지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 규칙은 케임브리지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학생들이 졸업과 함께 흩어지자 규칙도 함께 흩어졌고, 영국 곳곳에서는 여전히 학교마다 서로 다른 축구가 이어졌다.
축구는 여전히 하나의 스포츠가 아니라, 같은 이름 아래 공존하는 수많은 경기들의 집합이었다.
1854년 초상화. 1856년 '케임브리지 룰즈' 제정에 참여한 H. M. 러콕(왼쪽 위)과 E. L. 혼(오른쪽 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출처: Unknown author - Here, Public Domain
선술집 뒷방에서 역사가 바뀐 밤
1863년 10월 26일 월요일 저녁.
런던 링컨스 인 필즈에 있는 프리메이슨스 태번(Freemasons' Tavern)의 한 뒷방에는 열한 개 런던 클럽의 대표들이 하나둘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학교와 클럽마다 제각기 사용하던 규칙집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날 그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수많은 '축구'를 하나의 축구로 만드는 것.
그러나 하나의 규칙을 만든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밤이 깊어질수록 논쟁은 더욱 거세졌고, 모든 의견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였다.
'해킹(hacking)을 허용할 것인가.'
해킹은 상대 선수의 정강이를 발로 차 넘어뜨리는 행위였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반칙이지만, 당시에는 일부 학교에서 용기와 투지를 증명하는 정당한 플레이로 여겨졌다.
블랙히스 FC의 대표 F. W. 캠벨은 단호하게 맞섰다.
"해킹이야말로 진정한 축구입니다. 해킹을 금지한다면 이 스포츠는 용기와 인내를 잃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할지 몰라도, 영국인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해킹을 금지한다는 것은 단지 거친 태클 하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었다. 공을 손에 들고 달리는 것까지 함께 금지하는 선택이었다. 블랙히스는 끝내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떠났고, 그들의 발걸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순간, 하나의 스포츠는 둘로 갈라졌다.
블랙히스가 선택한 길은 훗날 럭비가 되었고, 회의장에 남은 이들이 선택한 길은 축구가 되었다.
남은 대표들은 마침내 하나의 합의에 도달했다. 공은 손으로 들고 달릴 수 없다.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차서도 안 된다. 오직 발로 공을 다루는 경기.
1863년 12월, 영국 축구협회(FA)는 모두의 합의가 담긴 13개 경기 규칙(Laws of the Game)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함께할 수 있는 축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800년경 존 닉슨이 그린 프리메이슨스 태번의 수채화. 1863년 이곳에서 축구협회(FA)가 창립되고 세계 최초의 통일된 축구 규칙이 제정됐다. 출처: John Nixon (c.1750-1818) - http://www.freemasonry.london.museum/resources/history-of-freemasons-hall/, Public Domain
Football vs soccer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는 이 스포츠를 '축구(蹴球)' 혹은 각자의 언어로 부른다. 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지금도 '풋볼(football)'과 '사커(soccer)'라는 두 이름이 함께 쓰인다. 그렇다면 '사커'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뜻밖에도 그 시작은 미국이 아니라 19세기 영국 대학가였다.
당시 옥스퍼드 학생들 사이에서는 단어를 줄인 뒤 '-er'를 붙여 부르는 속어가 유행했다. Breakfast는 '브레커(brekker)'가 되었고, Rugby football은 '러거(rugger)'가 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Association Football은 먼저 'Assoc.'으로 줄어들었고, 여기에 '-er'가 붙으면서 'Soccer'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커'를 미국식 영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름은 영국에서 태어났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에서는 점차 '풋볼'이라는 이름만 남았고, 미국은 '사커'를 그대로 사용했다.
영국이 만들어 낸 단어를 미국이 가장 오래 간직한 셈이다.
국경을 넘어 세상으로
1863년 영국 축구협회(FA)가 통일된 규칙을 제정한 뒤, 축구는 더 이상 영국만의 스포츠가 아니게 되었다. 공이 바다를 건너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길은 크게 두 갈래였다.
첫 번째는 대영제국이었다.
영국의 군인과 선원, 상인, 철도 기사, 식민지 행정관들은 새로운 땅으로 향할 때마다 축구공도 함께 가져갔다. 인도와 호주, 남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제국의 항로가 닿는 곳마다 자연스럽게 운동장이 생겼고, 낯선 땅의 아이들이 처음으로 공을 차기 시작했다.
두 번째 길은 조금 더 흥미롭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은 철도와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남미로 향했다. 그들의 짐 속에는 공구와 설계도뿐 아니라 축구공도 들어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867년 영국 이민자들이 축구를 시작했고, 브라질에서는 1894년 영국 유학을 마친 샤를 밀러가 가방 속 축구공 두 개를 들고 귀국하며 이 스포츠를 소개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세계 축구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축구를 발명한 영국은 월드컵에서 단 한 번, 1966년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만 정상에 올랐다.
역사는 때때로 씨앗을 뿌린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 정성껏 키운 사람이 열매를 거두는 법이다.
1866년 멜버른 리치먼드 패덕에서 열린 호 풋볼 경기의 모습을 담은 목판화.출처: Robert Bruce (c.1839-1918) - The Town & Country Journal, January-June 1871., Public Domain
다시, 1914년 크리스마스의 참호로
다시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914년 크리스마스이브. 벨기에 서부전선의 노 맨스 랜드.
어디선가 공 하나가 굴러왔다.
규칙도 없었다. 심판도 없었다. 유니폼도, 팀도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던 병사들은 그 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함께 달리고, 함께 웃었다.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그날의 경기가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놓고 토론한다. 정식으로 팀을 나누어 치른 경기였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남아 있는 기록 대부분도 전쟁이 끝난 뒤의 회고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떠올리는 축구 경기와는 달랐을 것이다. 누군가 공을 차면 모두가 따라 달려가고, 다시 공이 굴러가면 또 함께 쫓아가는, 그저 웃음과 함성이 뒤섞인 난장판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난장판이 축구의 가장 오래된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공 하나가 있고,
그 공을 찰 두 발이 있고,
그리고 공을 차고 싶다는 마음.
축구를 영국이 발명했다라고 하지만 축구를 발명하게 만든 충동은, 훨씬 오래전부터 인류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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