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광둥성 순더.
열두 살 소년은 숨소리조차 삼킨 채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밀항선 화물칸 아래, 바닷물에 젖은 나무판 사이로 생선 냄새와 기름 냄새가 눅진하게 스며드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수십 명 더 있었다.
서로의 어깨와 무릎이 닿을 만큼 비좁은 자리에서,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몸이 서로 부딪혔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살아남는 것.
소년의 이름은 라이 지잉. 훗날 세계는 그를 지미 라이(Jimmy Lai)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그날 밤 이 소년은 그저 배고픔과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희망 사이에서 버티고 있는 한 인간이었다.
그가 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중국을 들여다봐야 한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대약진운동은 중국 전역을 거대한 기근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공식 통계로만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비공식 추산에서는 그 수가 훨씬 더 늘어난다.
광둥성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밥상 위에는 음식이 점점 줄어들었고, 마을에는 침묵이 늘어갔다. 소년의 가족 역시 매일같이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하루를 버티는 것 자체가 전쟁과 같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불과 강 하나 건너편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존재했다.
주장강 삼각주 너머, 홍콩. 영국 식민지였던 그곳은, 적어도 그들이 듣기에는, 굶어 죽지 않는 곳이었다. 밤이 되어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곳, 사람들이 일하고, 돈을 벌고, 살아갈 수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노력하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던 곳이었다.
그래서 어린 소년은 배에 올랐다. 어머니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 선택은 잔인할 만큼 현실적이었다. 바다에서 죽는 것이, 집에서 천천히 굶어 죽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그 시대 많은 가족들이 내려야 했던 결정이었다.
사흘 밤낮 동안, 바다는 끝없이 이어졌다. 파도는 배를 흔들었고, 공기는 축축했고,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결국, 배는 도착했다.
그렇게 소년은 홍콩 땅을 밟았다. 주머니에는 단 한 푼의 돈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꺼지지 않는 빛이 있었다. 그는 이 도시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것이라고,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현실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12세의 지미 라이는 오로지 생존과 자유를 위해 홀로 홍콩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불가능한 도시의 탄생
홍콩이라는 도시는 기적,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역사적 ‘사고’에 가깝다. 의도적으로 설계된 이상향이 아니라, 전쟁과 탐욕, 우연과 계산이 뒤엉킨 결과로 태어난 공간. 그 탄생의 배경에는 아편과 전쟁, 그리고 불평등 조약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이야기는 18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영제국은 심각한 무역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영국은 중국산 차와 비단, 도자기를 대량으로 수입했지만, 중국은 영국 제품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청나라는 대금을 은으로만 받았고, 그 결과 영국의 은은 끊임없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결국 하나의 해답을 찾아낸다. 아편이었다. 인도에서 재배한 양귀비를 가공해 중국에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진행된 거래였지만, 곧 거대한 산업으로 팽창했다. 1839년 무렵에는 연간 약 4만 상자, 무게로는 약 2,500톤에 달하는 아편이 중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관료들이 중독되었고, 군인들이 중독되었으며, 평범한 백성들까지 아편에 잠식되었다. 이제는 상황이 뒤집혔다. 은이 중국에서 영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청나라 조정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839년 3월, 흠차대신 임칙서가 광둥에 도착한다. 그는 외국 상인들에게 모든 아편을 제출하라는 단호한 최후통첩을 보낸다. 거부한다면 무역 자체를 중단하겠다고 선언과 함께.
영국 상인들은 반발했다. 그러나 임칙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2만 상자가 넘는 아편을 압수해 바다에 투기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마약을 단숨에 파괴한 것이다.
영국의 대응은 빠르고 냉혹했다. 1840년 6월, 영국 함대가 중국 연안에 나타났다. 16척의 군함과 4,000명의 병력이었다. 청나라 군대는 구식 무기로 맞섰지만, 기술력과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쟁은 2년 동안 이어졌고, 결국 1842년 8월 29일, 난징에서 조약이 체결된다.
난징조약. 중국 역사상 최초의 불평등 조약. 그 조약에는 한 문장이 담겨 있었다.
‘중국 황제는 홍콩섬을 영국 국왕에게 영구히 양도한다.’
1842년 7월 21일 진강부(鎭江府, 전장) 공격 당시 제98 보병연대. 이 전투는 만주(청) 정부의 패배로 이어졌다. 군사 일러스트레이터 리처드 심킨(1840–1926)이 그린 수채화.
출처: Richard Simkin - Anne S.K. Brown Military Collection, Public Domain
영국이 홍콩을 선택한 이유는 철저히 전략적이었다. 깊은 수심을 가진 항구였고, 중국 남부 해안을 통제하기에 이상적인 위치였다. 그러나 당시 홍콩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섬이었다. 바위와 언덕뿐인 땅, 인구는 약 7,500명 정도였고, 대부분이 어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내부에서도 이 선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팔머스턴 경은 협상 결과를 보고 분노했다. 그는 협상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홍콩 같은 쓸모없는 바위를 얻는 대신, 제대로 된 배상금을 받았어야 했다고 썼다.
그러나 역사는 종종 인간의 판단을 비웃는다. 그 바위투성이 섬은 결국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홍콩의 영토는 이후 세 번의 조약을 통해 확장된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섬이 넘어왔고,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구룡반도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1898년, 제2차 베이징조약을 통해 신계 지역이 99년 조차 형식으로 영국에 넘어간다.
특히 1898년의 99년 조차는 결정적이었다. 이 기간이 1997년 6월 30일 만료되면서, 홍콩 전체가 중국에 반환되는 법적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홍콩 신계를 임대하는 조약에는 이홍장이 서명했다. 이 사진은 1900년 1월 15일 촬영된 것으로, 양광총독 이홍장이 배를 타고 홍콩을 지나며 홍콩 총독 블레이크와 함께 찍은 사진. 출처: 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1997년까지, 홍콩은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라 독특한 실험장이 된다. 영국은 이 섬에 자신들만의 시스템을 구축한다.
첫째는 법치였다. 영국식 보통법 체계가 도입되었고, 법원은 비교적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계약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고, 재산권은 강하게 보호되었다.
둘째는 자유항 체제였다. 무관세 정책이 시행되었고, 누구나 비교적 자유롭게 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다.
셋째는 최소한의 정부 개입이었다. 이른바 ‘적극적 불간섭’ 정책 아래, 정부는 시장에 대한 직접 개입을 최소화했다.
넷째는 능력주의였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출신 배경보다는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하게 평가되는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네 가지 원칙은 하나의 도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바로 그 도시가, 한 때 밀항선 화물칸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한 소년이 활약하는 무대가 된다.
1980년대의 홍콩 전경. 출처: By Ion Tichy - Own work, CC BY-SA 3.0
공장 소년에서 패션 재벌까지
열두 살 소년 지미 라이가 홍콩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그는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주머니는 비어 있었고, 영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며 정규 교육 역시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가지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의지, 그리고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후 그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는 곧 의류 공장에서 일을 구했다. 하루 열두 시간, 일주일 내내 쉬지 않는 노동이었다. 한 달 임금은 8 홍콩달러 (당시 약 1달러 수준)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광둥에서라면,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굶주리지 않고,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변화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단순히 노동에만 몰두 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주도 면밀하게 관찰했다. 누가 승진하는지, 어떤 기술을 가진 사람이 더 오래 살아남는지, 돈은 어디에서 흘러들어와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그는 산업의 구조를, 그리고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을 동시에 배워 나갔다.
밤이 되면 그는 또 다른 일을 시작했다. 영어를 독학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리의 간판을 더듬더듬 읽으며 발음 연습을 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방송을 반복해서 들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영국인 감독자의 발음을 흉내 내며 소리를 입에 붙였다. 언어는 그에게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넓히는 도구였다.
운명의 전환점은 1975년에 찾아온다. 스물일곱 살이 된 그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작은 의류 사업을 시작한다. 초기 자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나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홍콩의 젊은 세대가 원하는 것은 비싼 명품이 아니라, 합리적인 가격에 세련된 스타일을 가진 옷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1981년, 그는 ‘지오다노(Giordano)’라는 브랜드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름은 이탈리아식이었지만, 브랜드의 본질은 완전히 홍콩적이었다. 그의 전략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다. 고급 이미지를 차용하되, 가격은 대중적으로 유지하는 것. 훗날 글로벌 패션 시장에서 성공하게 되는 모델을, 그는 이미 그 시점에서 구현하고 있었다. 저렴하면서도 깔끔하고,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캐주얼웨어가 홍콩에서 지미 라이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
지오다노는 빠르게 성장했다. 1980년대 말이 되자 지오다노 매장은 홍콩을 넘어 대만, 싱가포르, 한국으로 확장되었다. 이 의류 브랜드는 단순한 의류 회사가 아니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지미 라이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밀항선 화물칸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소년이, 30년 만에 패션 제국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여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89년,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 전환은 돈이나 사업이 아니라, 신념과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가 이후 어떤 인물로 기억될지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한국에서 지오다노가 홍콩 브랜드인 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다. 필자 역시 홍콩에 처음 갔을 때 지오다노 매장을 보고 ‘한국 브랜드가 홍콩에 진출했네’라며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출처: The Standard
천안문 사태
1989년 6월 4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
새벽의 공기는 아직 차가웠고, 도시는 완전히 잠들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가르며, 탱크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어떤 미래를 믿고 있었던 젊은 사람들이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약 200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외부에서는 수천 명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숫자는 다르지만, 그날의 충격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홍콩 사회 역시 당시 그 소식을 듣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며칠도 안돼, 도시는 집단적인 불안과 슬픔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거리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중국 정부를 규탄했다. 당시 홍콩 인구가 약 550만 명이었으니, 거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거리 위에 서 있었던 셈이다. 그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집단적인 공포와 분노,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동시에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그 군중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흔한 살의 사업가, 지미 라이였다.
그때까지, 정치란 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돈을 벌었고, 사업을 키웠으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유는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는 그에게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자유가 없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돈도, 사업도, 심지어 생명조차도, 보호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 그의 세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그리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결코 영원히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는 물론 홍콩의 역사를 바꿀 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1989년 7월 북경 미 외교 공관에서 촬영한 중국 탱크들이 이동하는 모습. 출처: By Pete Campolongo - "Best Photos of 1989," State, US Department of States. January 1990, no. 329. p. 27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mdp.39015057712914, Public Domain
애플 데일리의 탄생
1990년 어느 날, 지미 라이는 가까운 동료들을 모아 놓고 새롭지만 다른 이들이 봤을 때 황당한 계획을 꺼내 놓는다. 신문을 만들겠다는 이야기였다. 방 안의 공기는 잠시 멈춘 듯 조용해졌고, 곧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그는 이미 성공한 패션 사업가였고, 지오다노는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하필 신문이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사람들은 솔직했다. 당신은 패션 사업가인데 신문 사업 대해 무엇을 아느냐고 물었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이 불과 몇 년 남지 않았는데, 지금 중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신문을 만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했다. 신문 산업은 자본이 끝없이 들어가는 사업이고, 수익성도 불확실하니 왜 이미 성공한 사업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려 하느냐는 우려도 이어졌다.
그러나 지미 라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 질문들이 자신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1997년이 오기 전에, 지금 이 시점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반환 이후에는,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95년 6월 20일, 『애플 데일리(蘋果日報)』 창간호가 세상에 나왔다. 타블로이드 판형, 강렬한 컬러 사진, 눈길을 사로잡는 헤드라인. 그것은 단순한 신문의 등장이라기보다, 홍콩 신문 시장 한가운데에 던져진 충격에 가까웠다.
창간호 1면에는 도발적인 문장이 실렸다. 홍콩은 중국의 것이 아니라, 홍콩 사람들의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그 문장은 당시 홍콩 사회가 느끼고 있던 불안과 열망을 동시에 건드렸다.
당시 대부분의 홍콩 신문은 비교적 보수적이고 정제된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 뉴스는 엄격한 형식을 따랐고, 감정적인 언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애플 데일리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연예 가십과 범죄 뉴스, 그리고 중국 공산당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한 지면 안에 함께 배치했다. 그것은 고급 신문과 대중 신문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무는 시도였다.
그러나 진짜 핵심은 형식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애플 데일리는 세 가지 원칙을 분명히 내세웠다. 홍콩의 자치권을 지키는 것,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것,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편집 방향이 아니라, 일종의 선언에 가까웠다.
사업적으로 보면, 그것은 거의 자해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중국 시장에서 지오다노가 압박을 받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94년 무렵부터 중국 정부는 지오다노에 다양한 방식으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미 라이는 지오다노 지분을 모두 매각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사업적 기반을 사실상 포기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 데일리는 빠르게 성장했다. 창간 1년 만에 홍콩에서 두 번째로 많이 읽히는 신문이 되었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홍콩 시민들이 그 신문을 원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뉴스를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감정과 두려움, 그리고 희망을 대신 말해 줄 목소리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 홍콩은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무엇인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애플 데일리는, 바로 그 불안과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신문이었다.
젊은 시절의 지미 라이. 촬영 연도 미상. 미디어 배포 사진
반환의 밤
반환의 날은 갑자기 찾아온 사건이라기보다,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운명처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도 그 날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6월 30일이라는 날짜는 현실이라기보다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홍콩에는 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거세지 않았지만, 도시 전체를 얇은 막처럼 덮고 있었다. 유리창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은 마치 시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고, 도로 위의 불빛은 물 위에서 흔들리며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번졌다. 도시 전체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조용했고, 그 고요함 속에서 홍콩 컨벤션 센터 안에서는 하나의 역사적 장면이 준비되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영국 국가가 울려 퍼졌다.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유니언 잭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은 놀라울 만큼 느리게 느껴졌다.
찰스 왕세자와 홍콩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은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외교적 의례라고 설명했지만, 그 장면에는 분명 인간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다. 156년에 걸친 식민 통치가 끝나는 순간은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 시대가 조용히 막을 내리는 장면이기도 했다.
곧이어 중국 국가가 연주되었고, 오성홍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장쩌민 국가주석과 신임 행정장관 동건화는 미소를 지었다. 그 장면은 또 다른 역사적 서사를 상징하고 있었다. 중국에게 그것은 단순한 영토 반환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굴욕의 역사, 외세에 의해 강제로 열렸던 항구와 조약의 기억이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는 순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장면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같은 장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역사와 서로 다른 미래를 떠올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애플 데일리 1면에는 짧지만 강한 문장이 실렸다.
“홍콩, 이제 시작이다.”
그 문장은 단순한 낙관도 아니었고, 노골적인 비관도 아니었다. 오히려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선언에 가까웠다. ‘일국양제’라는 약속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작동할 것인지, 홍콩 시민들이 앞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까웠고, 축하라기보다 준비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반환 이후 초기 몇 년의 시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도시의 금융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법과 제도 역시 큰 변화 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혹은 적어도 변화는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2003년, 국가보안법 제정 시도가 있었을 때, 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법안이 홍콩 사회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정부는 법안을 철회했다. 그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제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고, 시민 사회가 여전히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그 시간 속에서, 애플 데일리는 계속 성장했다. 2000년대 중반이 되자 발행 부수는 40만 부를 넘어섰고, 영향력은 홍콩을 넘어 대만까지 확장되었다. 지미 라이는 단순한 사업가나 언론인을 넘어, 홍콩 사회에서 가장 강한 목소리를 가진 공적 인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는 뉴스의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표면의 안정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은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처음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았고,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결국, 그 균열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홍콩 반환 세레머니 영상
우산 혁명, 그리고 균열의 시작
2014년 9월 28일, 홍콩 중심가 애드미럴티. 그날 아침의 도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출근 시간의 인파는 여전히 지하철역으로 흘러들어갔고, 유리 건물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또렷했다. 그러나 그 평온한 풍경 아래에는 이미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공기처럼 퍼져 있었다. 누구도 그것을 정확히 언어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했다. 연기는 거리 위로 천천히 번져 나갔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눈을 찌르는 연기 속에서, 누군가 우산을 펼쳤다. 처음에는 단순한 반사적인 행동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이 우산을 펼쳤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수많은 우산이 거리 위에서 동시에 펼쳐졌다.
그 장면은 사진으로 기록되었고, 영상으로 퍼졌으며,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우산 혁명’이라 불리게 될 순간이 태어났다.
2014년 10월 28일, 경찰이 87발의 최루탄을 발사한 지 한 달이 지난 뒤의 애드미럴티 시위대 점거 지역. 출처: STUDIO KANU - 31th Day Hong Kong Umbrella Revolution #umbrellarevolution,CC BY-SA 2.0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은 행정장관 선거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중국 정부는 보편적 선거권이라는 약속을 유지하겠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후보자를 사전에 선별하겠다고 발표했다. 형식적으로는 선거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이 승인한 인물만 출마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 발표는 법적 문장 하나에 불과했지만, 홍콩 사회에서는 정치적 미래 전체를 상징하는 사건처럼 받아들여졌다.
특히 젊은 세대는 그 발표를 일종의 배신으로 느꼈다. 학생들이 시위의 중심에 섰고, 그중에서도 열일곱 살의 조슈아 웡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그는 경험 많은 정치인이 아니었고, 세련된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강하게 다가갔다. 그가 보여 준 것은 전략이나 계산이 아니라, 감정과 확신, 그리고 타협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시위는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79일 동안, 시위대는 홍콩 중심가 주요 도로를 점거했다. 거리 위에는 텐트가 세워졌고, 임시 학습 공간이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그 공간을 공동체라고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일종의 축제 같다고 표현했다. 음악이 흘렀고, 공개 토론이 이어졌으며, 사람들은 서로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곳은 단순한 시위 현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실험해 보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공간이 아무리 평화롭고 이상적으로 보였다고 해도, 현실의 권력 구조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정부는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대는 점점 지쳐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2월 15일, 마지막 점거 지역이 해산되면서 우산 혁명은 끝났다. 눈에 보이는 제도적 변화는 거의 없었다. 법은 그대로 남았고, 정치 구조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4년 12월 10일. 시위대들의 모습. 출처: STUDIO KANU - Hong Kong Umbrella Revolution #umbrellarevolution,CC BY 2.0
그러나 보이지 않는 변화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 시위를 거치면서, 홍콩의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홍콩인’이라는 인식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선명해졌다. 그들에게 중국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조국이라기보다, 점점 더 멀고 낯선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미 라이는 우산 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애플 데일리는 매일 1면에 시위 관련 기사를 실었고, 그는 직접 점거 현장을 방문해 시위자들을 격려했다. 그 행동은 단순한 언론인의 역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한 정치적 선택이었고, 동시에 앞으로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를 폭동의 배후로 지목했고, 홍콩의 친중 성향 언론은 그를 외국 세력과 결탁한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변화는 그 이후에 나타났다. 중국 정부가 홍콩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부터 홍콩은 더 이상 단순한 금융 도시나 무역 허브로만 보이지 않았다. 홍콩은 정치적 변수였고, 통제되지 않을 가능성을 가진 공간이었으며, 잠재적인 정치적 위험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인식의 변화는, 앞으로 다가올 더 크고 더 어두운 변화의 서막이 된다.
2013년 시위에 참가한 지미 라이의 모습. 출처: 海彥, Voice of America, Public Domain
2019년, 전장이 되어버린 홍콩
2019년 3월, 홍콩 정부는 하나의 법안을 발표한다. ‘범죄인 인도 조례’ 개정안. 표면적으로는 기술적인 법률 개정처럼 보였고, 행정적으로도 비교적 단순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홍콩에서 체포된 범죄 용의자를 중국 본토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명분은 구체적이었다. 대만에서 살인을 저지른 뒤 홍콩으로 도피한 용의자를 처벌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홍콩 사회는 이 문장을 전혀 다른 의미로 읽기 시작했다. 만약 이 법이 통과된다면, 중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불편한 인물이나 체제에 비판적인 인물을 언제든 본토로 송환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대상은 활동가일 수도 있고, 언론인일 수도 있고, 기업가일 수도 있었다. 혹은 단지 권력의 시선에서 ‘문제’로 보이는 누구든 될 수 있다는 불안이 도시 전체를 조용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2019년 6월 9일, 그 불안은 거리로 흘러나왔다. 약 103만 명이 거리로 나와 행진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은 도로 위를 끝없이 이어졌고,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집회라기보다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감정으로 움직이는 장면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기보다, 존재 자체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 신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주일 뒤, 6월 16일, 숫자는 거의 두 배로 늘었다. 약 200만 명. 당시 홍콩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거리 위에 서 있었다. 그것은 현대 도시에서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집단적으로 발언하는 순간에 가까웠다.
2019년 범죄인 인도 조례 개정안 반대를 위해 거리로 나선 홍콩 시민들. 출처: By Studio Incendo - Hong Kong anti-extradition bill protest, CC BY 2.0
그러나 행정장관 캐리 람은 법안 철회를 거부했다. 그리고 시위대를 향해 ‘폭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단어 하나가 상황의 온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 순간 이후, 갈등은 더 이상 협상 가능한 정치적 충돌이 아니라, 정체성과 존엄을 둘러싼 대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홍콩은 서서히 다른 도시가 되어 갔다. 주말마다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고, 시위는 처음의 평화로운 행진에서 점점 더 격렬한 충돌로 변해 갔다.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 물대포를 사용했고, 일부 시위대는 화염병과 벽돌로 맞섰다. 지하철역은 이동 공간이 아니라 충돌의 현장이 되었고, 대학 캠퍼스는 일시적으로 봉쇄된 요새처럼 변했다.
그 변화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마치 도시의 표면 아래에서 오래전부터 균열이 자라고 있었고, 이제야 그것이 한꺼번에 드러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해 11월, 홍콩 이공대학 포위 사태는 그 긴장의 정점을 상징하는 장면이 된다. 수백 명의 시위대가 캠퍼스 안에 남아 농성을 이어갔고, 경찰은 외부를 완전히 봉쇄했다. 밤이 되면 불길이 솟아올랐고, 최루탄 연기가 캠퍼스를 뒤덮었다. 그 장면은 더 이상 도시의 일상적인 갈등이 아니라, 거의 전쟁의 풍경에 가까워 보였다.
2019년 11월 18일 야우마테이에서, 홍콩이공대학교 안에 고립된 시위대에게 도달하기 위해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려던 시위대의 모습. 출처: By Studio Incendo - DSCF5290, CC BY 2.0
그 시기, 애플 데일리는 매일 시위 현장을 1면에 실었다. 이미 70대 중반이 된 지미 라이는 여전히 거리로 나갔다. 그는 관찰자로 머무르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2019년 8월, 약 170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그는 이 싸움이 단순한 정책 논쟁이 아니라, 홍콩이라는 도시의 미래를 둘러싼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해석은 완전히 달랐다. 이 움직임에는 외부 세력이 개입했으며, 특히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주장들이 공식 담론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근거 중 하나로 지미 라이가 미국 정치인들과 만난 사실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실제로 그는 2019년 7월 미국을 방문했고, 미국 정부 인사들과 의회 관계자들을 만나 홍콩의 자치와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중국 관영 언론은 이 행동을 외부 세력과의 결탁으로 규정했고, 홍콩 정부 역시 점점 더 비슷한 어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상황은 단순한 시위와 정부 대응의 문제를 넘어섰다. 도시는 이미 깊게 갈라져 있었고, 각자가 바라보는 현실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시점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더 큰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거나, 혹은 곧 시작될 것이라는 감각을.
시위를 위해 거리로 나선 홍콩 시민들. 이제 홍콩에서 이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출처: By Studio Incendo - DSCF8925, CC BY 2.0
홍콩 국가보안법
2020년 6월 30일이라는 날짜는 단순한 입법 절차의 하루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선택된 상징처럼 보였다.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지 정확히 23년이 되는 날,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홍콩특별행정구 국가안전유지법’, 즉 홍콩 국가보안법을 공식 통과시켰고, 그 순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도시가 조용히,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 법은 네 가지 범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 활동, 그리고 외국 또는 외부 세력과의 결탁. 법률 문장 자체는 기술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그 문장의 적용 범위와 해석 가능성이었다. 각 범죄는 최고 무기징역형까지 선고될 수 있었고, 특히 홍콩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법의 소급 적용 가능성이었다. 법 시행 이전에 이루어진 행위조차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조항은, 법이 단순히 현재를 규율하는 장치가 아니라 과거까지 다시 재구성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만들어냈다.
법이 발표된 순간, 홍콩 사회의 분위기는 겉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빠르게, 그리고 매우 조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풍경은 여전히 비슷했고, 금융 시장도 평소처럼 움직였지만, 사람들의 행동 방식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자신의 SNS 계정을 삭제했고, 과거 시위 사진과 게시글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온라인 흔적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도시 자체를 떠나는 선택을 했다. 공항은 여전히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그 공간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이전과 다른 긴장이 담겨 있었다.
2020년 7월 1일, 법이 실제로 시행된 첫날, 경찰은 370명을 체포했고, 그중 일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숫자 자체만 보면 그것은 통계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많은 홍콩 시민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법 집행 사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확인하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정치적 회색지대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고, 앞으로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될지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감각이 도시 전체에 퍼져 나갔다.
2020년 7월 1일, 보안법 시행 다음 날 수만 명의 홍콩 시민들이 코즈웨이베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했다. 참고로 이 ‘홍콩을 해방하라, 우리 시대의 혁명’이라는 구호는 홍콩 및 중국의 모든 영토에서 사용이 금지되어있다. 이와 관련된 그 어떤 물품 (사진, 기념품 등)을 소지해도 처벌 받으니 주의할 것. 출처: Voice of America, Cantonese Service, Iris Tong. Public Domain
그날, 애플 데일리는 1면에 강한 메시지를 실었다.
“악법이지만,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그 문장은 단순한 저항의 표현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에 가까웠다. 그 문장은 그 신문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지미 라이는 이후 인터뷰에서 자신이 감옥에 갈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 발언은 정치적 수사라기보다, 오랫동안 축적된 확신이 만들어낸 문장처럼 들렸다. 그는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 길의 끝이 어디로 이어질지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예고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홍콩이 빠르게 변해 가는 동안, 그가 말했던 미래 역시, 놀라울 만큼 정확한 속도로 현실이 되어 갔다.
홍콩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 왼쪽부터 네이선 로, 아그네스 차우, 조슈아 웡. 이들은 6월 30일 자신들이 속해 있던 민주 정당 데모시스토를 탈당했고, 그날 늦게, 해당 정당은 즉각 해산을 발표했다. 네이선 로는 현재 해외 망명 생활을, 아그네스 차우는 국가 보안법 혐의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후 유학 생활을, 같은 혐의로 체포된 조슈아 웡은 여전히 수감되어있는 상태다. 출처: Voice of America, Cantonese Service, Iris Tong. Public Domain
애플 데일리와의 작별
2020년 8월 10일 아침, 홍콩의 하루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역사의 한 장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전 7시, 약 200명의 경찰이 지미 라이의 자택에 진입했고, 몇 분 뒤 그는 수갑을 찬 채 집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 장면은 단순한 체포 장면이라기보다 하나의 상징적 순간처럼 기록되었고, 전 세계 언론은 거의 동시에 그 이미지를 전송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법 집행의 장면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은 한 시대의 균열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2020년 4월 경찰에 연행되는 지미 라이. 그는 2020년에만 다양한 혐의로 최소 4번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출처: 立場新聞, copirighted free use
같은 날, 애플 데일리 사무실 역시 수색을 받았다. 경찰은 25개 상자 분량의 자료를 압수했고, 뉴스룸은 순식간에 범죄 현장처럼 변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다음 날 정상적으로 발행되었다. 그리고 그 1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수갑을 찬 채 연행되는 지미 라이의 사진이 실렸다.
그날 애플 데일리의 판매 부수는 평소의 두 배에 가까운 50만 부를 기록했다. 홍콩 시민들은 가판대 앞에 줄을 섰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신문을 사는 행위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일종의 의사 표시였다. 그것은 지지였고, 동시에 작별 인사를 준비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가까웠다.
2021년 6월 17일, 더 조직적이고 더 결정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약 500명의 경찰이 애플 데일리 본사를 급습했다. 뉴스룸은 다시 한번 봉쇄되었고, 편집국장 라이언 로와 최고운영책임자를 포함한 주요 임원들이 체포되었다. 혐의는 ‘외국 세력과의 결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체포보다 더 치명적인 조치가 이어졌다. 홍콩 당국은 애플 데일리의 은행 계좌를 동결했고, 약 1,800만 홍콩달러의 자금이 묶였다. 그 순간, 문제는 더 이상 언론 자유나 정치적 압박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문사는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할 수 없게 되었고, 조직 자체의 생존이 불가능해지는 단계로 들어갔다.
편집국 내부에서는 긴급 회의가 열렸다. 선택지는 단순했지만 잔혹했다. 즉시 폐간을 선언하거나, 남아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해 가능한 한 오래 버티는 것이었다.
그들은 두 번째를 선택했다.
2021년 6월 23일, 애플 데일리는 마지막 저항처럼 보이는 결정을 내렸다. 100만 부를 인쇄했다. 그것은 홍콩 신문 역사상 최대 발행 부수였다.
그날 새벽, 사람들은 가판대 앞에 줄을 섰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신문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조급함보다는, 어떤 의식에 참여하고 있다는 감정이 더 강하게 보였다.
새벽 1시쯤, 많은 시민들이 몽콕 신문 가판대에《애플 데일리》를 사기 위해 줄을 선 모습. 출처: 立場新聞, copyrighted free use
인터뷰에 응한 한 70대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평소 애플 데일리를 열성적으로 읽는 독자는 아니었고, 때로는 그 신문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반드시 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그것이 홍콩 시민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목소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6월 24일 자정 무렵, 편집국장 라이언 로는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다음 날이 마지막 발행일이 될 것이라는 결정이었다.

애플 데일리 마지막 호 신문 교정과 지면 편집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출처: 立場新聞, copyrighted free use
2021년 6월 24일, 애플 데일리의 마지막 호가 발행되었다. 1면에는 편집국 직원들이 서로 손을 흔드는 사진이 실렸고, 헤드라인은 빗속에서도 신문을 사기 위해 줄을 선 홍콩 시민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부제는 더 조용했고, 더 직접적이었다. 26년 동안 감사했다는 인사와, 작별 인사.

애플 데일리 폐간 직전 마지막 기념 사진을 찍는 직원들. 이 중 대다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거나 해외에서 망명 중이다. 출처: 立場新聞, copyrighted free use
그날 인쇄된 100만 부는 몇 시간 만에 모두 팔렸다. 많은 사람들은 신문을 손에 쥔 채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단순히 한 언론사의 폐간을 애도하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 눈물은 더 길고 더 복잡한 시간을 향해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시대가 끝났다는 감각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날 밤, 애플 데일리 본사 건물에서는 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26년 동안 밤마다 켜져 있던 뉴스룸의 불빛은,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불빛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시대가 남았다.
그것은 더 조용했고, 더 단단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시대였다.

폐간 직전 애플 데일리 본사 창문에 부착된 메시지. "You can't kill us all." 출처: 立場新聞, copyrighted free use
법정의 78세 노인
지미 라이는 2020년 8월 첫 체포 이후, 계속 구금 상태에 머물며 단 한 번도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다. 보석과 구금, 재구금이 반복되는 일반적인 형사 절차와는 달리, 그의 시간은 거의 멈춘 것처럼 보였다. 바깥 세상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그의 시간은 구치소의 벽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재판은 2023년 12월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형사 재판과는 다른 형태였다. 국가보안법 재판에서는 배심원이 존재하지 않았고, 세 명의 판사가 모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판사들은 모두 행정장관이 지정한 ‘국가안전 사건 전담 판사’였다.
그 구조는 법적으로는 제도 안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미 강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법정은 단순히 사실을 판단하는 공간이라기보다, 국가와 개인이 서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결정하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소 내용은 방대했고, 동시에 상징적이었다. 주요 혐의는 외국 세력과의 결탁, 선동성 출판물 발행, 그리고 국가 안보 위협이었다.
검찰은 그가 미국과 영국 정치인들과 만난 사실을 강조했고, 애플 데일리의 사설과 기사들을 국가 안보 위협의 증거로 제시했으며,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그의 공개적 지지를 하나의 정치적 행동으로 재구성했다.
2019년 7월 8일 당시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와 만난 지미 라이. 지미 라이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꾸준히 미국과 영국의 관료들에게 홍콩 상황에 대해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그의 이런 활동들은 추후 국가 보안법 재판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는 빌미가 되었다. 출처: Office of U.S. Vice President
재판 과정은 길었다. 검찰은 100명 이상의 증인을 소환했고, 제출된 증거 자료는 수천 페이지에 달했다. 재판은 몇 달이 아니라,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법정은 단순한 재판 공간이라기보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공간처럼 보였다.
변호인단은 언론 자유를 중심으로 방어 논리를 세웠다. 그들은 지미 라이를 정치 활동가가 아니라 언론인으로 규정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고, 정부를 비판했고, 그것은 언론 활동의 본질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검찰의 논리는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었다. 그에게 언론 활동은 단순한 표현 행위가 아니라, 외국 세력을 활용해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려는 정치적 행동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그 해석 속에서, 그는 언론인이 아니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자로 재정의되었다.
특히 2019년 미국 방문은 재판 내내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었다. 검찰은 그가 미국 정부 인사들에게 중국에 대한 제재를 요청했다고 주장했고, 그 행위를 외국 세력과의 결탁의 직접적 증거로 제시했다.
지미 라이는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홍콩의 상황을 설명했을 뿐이며, 외국 정부에 홍콩을 공격하라고 요청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단지 홍콩의 자유와 제도를 지켜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정의 분위기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판사들의 표정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그 침묵은 어떤 판결보다 먼저 결과를 예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26년 2월 9일, 판결이 선고되었다. 유죄.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였다.
형량은 징역 20년이었다.
78세의 남성에게 내려진 20년 형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가 형기를 모두 마칠 때 쯔음이면, 그는 90대 후반이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형벌이라기보다, 사실상 남은 생 전체를 국가와의 갈등 속에서 보내야 한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법정을 나서며, 지미 라이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해석하기 어려운 종류의 표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용기라고 불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마지막까지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 혹은 체제에 대한 조용한 도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순간 이후 그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한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홍콩이라는 도시가 지나온 시간,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지미 라이가 처음으로 구속됐을 때의 사진. 출처: 湯惠芸
멈춘 시계, 계속되는 시간
지미 라이가 감옥 밖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혹은 돌아올 수 있다 해도 어떤 세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형벌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문이 완전히 닫히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그렇듯, 개인의 시간과는 다른 속도로 흐른다.
빅토리아 하버의 물결은 여전히 밀려온다. 센트럴의 마천루에는 여전히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고, 거래는 여전히 체결되며, 아침이면 사람들은 여전히 지하철로 몰려든다. 도시의 표면은 놀라울 만큼 안정적으로 보인다. 자본과 시간은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삶은, 어떤 정치적 전환과도 무관한 것처럼 계속된다.
그렇다면, 밀항선 밑창에 웅크려 앉아 있던 12살 소년의 꿈은 끝난 것일까.
그 소년이 어둠 속에서 붙잡고 있었던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남고 싶다는 욕망,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삶, 노력하면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그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빈손으로 홍콩에 도착했던 소년은 패션 제국을 만들었고, 거대한 언론사를 세웠으며, 결국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의 삶은 개인적 성공 서사만으로도 충분히 완결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붙잡고 있었던 꿈은, 개인의 성공보다 더 큰 것이기도 했다. 홍콩이라는 도시 자체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중국인으로서도 자유로운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은, 지금, 끝난 것일까.
법정의 판결은 그것이 끝났다고 말한다. 국가보안법은 그것이 끝났다고 말한다. 국가 권력 역시, 그것이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하나의 목소리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 조약이 바위투성이 섬 하나를 세계 금융 중심지로 바꿔 놓을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97년 반환 당시에도, 홍콩이 또 다른 20년 이상 독특한 정치·경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20년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을 때, 지금 이후의 20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제국은 흥하고, 또 쇠퇴한다. 법은 만들어지고, 수정되고, 때로는 사라진다. 도시는 무너지는 대신, 종종 형태를 바꿔 살아남는다.
2021년 2월 1일, 구금 상태의 지미 라이. 출처: Studio Incendo - _A4U0345,CC BY 2.0
홍콩은 분명히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홍콩과는 다른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여전히 홍콩이기도 하다. 750만 명이 여전히 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미래를 상상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타협하거나 저항하며, 혹은 단순히 하루를 살아간다.
어쩌면 지미 라이의 진짜 유산은 신문이 아니라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평생 던졌던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유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만큼은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들은 판결문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문이 폐간되었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법률도, 그것을 완전히 금지할 수는 없다.
그 질문들은 계속 남는다. 홍콩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자유라는 단어가 여전히 의미를 갖는 모든 장소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밀항선 밑창에서 시작된 그 꿈은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다음 세대에게 조용히 건네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세대가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할지, 어떤 방식으로 이어갈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밀항선 밑창에서 시작된 그 소년은 꿈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음 세대에게 조용히 건네졌을 뿐이다
에필로그: 지미 라이와 영국
영국에서 지미 라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전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한때 “성공한 이민자”의 서사였고, 홍콩 언론 자유의 상징이었으며, 이제는 런던이 베이징을 상대할 때마다 마주하는 질문을 대표하는 표지가 되었다. 영국은 홍콩에 대해 무엇을, 어디까지, 어떤 자격으로 말할 수 있는가. 지미 라이가 20년형을 선고받은 순간, 국제사회가 그것을 “정의의 판결”이 아니라 “정치의 판결”로 읽어낸 이유는, 바로 그가 한 도시의 몰락을 압축한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국은 정말 홍콩에 개입할 여지를 갖고 있는가. 법적으로 영국이 들고 나올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서는 1984년의 중영 공동선언이다. 이 문서는 유엔에 정식 등록된 조약이며, 중국이 일국양제와 고도의 자치, 권리와 자유의 유지라는 기본 정책을 약속한 텍스트로 남아 있다. 영국 의회 조사자료 역시 중국의 역사 문서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공동선언이 여전히 중국의 의무를 규정한다고 명확히 적시해 왔다.
하지만 그 조약이 곧바로 개입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선언은 홍콩의 주권과 행정권이 1997년에 중국으로 이양된다는 사실 위에 세워졌고, 따라서 영국이 홍콩의 사법, 행정 과정에 직접 개입할 법적 장치는 애초부터 제한적이다. 영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조약 위반을 국제정치의 언어로 번역해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동맹과 함께 비용을 올리며, 무엇보다 “영국은 약속의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일에 가깝다. 영국의 여지는 법정에서 집행되는 권능이 아니라, 조약과 외교, 도덕적 책무라는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때 지미 라이는 영국에게 불편할 정도로 선명한 거울이 된다. 그는 영국 시민권자라는 점에서 단순한 ‘해외 인권 이슈’가 아니라 영국 국내정치로 바로 유입되는 사건이 되었다. 로이터는 스타머 총리의 최근 방중을 두고, 지미 라이의 아들이 “영국이 훨씬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압박했다고 전했고, 스타머가 방문 중 그의 석방을 거론했지만 경제 의제를 우선한 듯 보였다는 비판도 함께 실었다.
이 지점에서 영국의 대중 경제 의존, 정확히는 성장 압박 속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유혹이 칼날처럼 드러난다. 스타머의 방중은 ‘관계 재설정’이라는 말로 포장되었지만, 보도들은 이 방문이 무역과 투자 같은 실익을 강하게 동반한 일정이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영국은 성장률과 투자, 산업 전환, 생활비 위기를 붙들고 있는 정부이고, 중국은 그 불안 위에 “실용”이라는 언어를 올려놓으려 한다. 이럴 때 지미 라이는 늘 껄끄러운 존재가 된다. 말해야 할 것 같지만 말할수록 거래의 온도가 떨어지고, 침묵하면 국내에서 비난이 터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미 라이가 영국 정치에서 갖는 의미는 ‘말하지 못한 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역설적으로 영국이 홍콩 문제에서 실제로 실행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조치, 즉 사람을 옮기는 정책과도 연결된다. 영국은 홍콩의 국가보안법 이후 BN(O) 비자 (해외 영국 시민 비자. 2020년 6월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영국이 홍콩 주민의 이주를 허용하기 위해 새로 만든 것) 경로를 확대해 왔고, 최근 지미 라이의 중형 선고 직후에도 이 경로를 더 넓히는 조치를 발표했다. 가디언은 BN(O) 경로 시행 이후 23만 명 이상이 비자를 부여받고 약 17만 명이 영국으로 이동했다고 전했다.
이 정책은 단순히 인도주의적 제스처가 아니라 영국이 홍콩에 대해 아직도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현실적 지렛대다. 영국은 홍콩의 법정을 멈출 수 없지만, 홍콩 사람들이 홍콩을 떠나는 길은 넓힐 수 있다. 공동선언이 약속했던 생활방식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굳어질수록, 런던은 비자 정책을 통해 그 붕괴를 ‘사람의 이동’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그 번역이 커질수록 홍콩은 더 조용해지고, 영국의 도시는 더 시끄러워진다. 새로운 이주민 공동체의 정착, 노동시장, 주거, 학교, 정체성의 문제들이 영국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이다.
그래서 영국에게 지미 라이는 단지 홍콩의 언론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계산서를 들고 서 있는 증인에 가깝다. 그의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하면, 영국은 공동선언의 당사자로서 최소한의 일관성을 지키는 듯 보이지만 경제적 실익을 중시하는 외교 노선과 충돌한다. 반대로 그 사건을 소극적으로 말하면, 영국은 '약속을 말로만 기억하는 나라'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의 영국이 홍콩을 대하는 방식의 핵심 모순일 것이다. 홍콩은 더 이상 영국의 식민지도, 영국의 행정 구역도 아니지만, 영국은 스스로를 완전히 외부자로 만들 수 없다. 조약의 서명은 기억을 남겼고, BN(O)라는 법적 지위는 사람을 남겼으며, 지미 라이라는 이름은 그 기억과 사람을 잇는 매듭이 되어 버렸다. 그 매듭이 단단해질수록, 베이징과의 관계를 실용으로만 정리하려는 런던의 문장은 번번이 어딘가에서 걸린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키어 스타머 총리를 향해 '공산주의자'라고 칭하며 '지미 라이와 관련한 그 어떠한 성과도 얻어내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영국 보수당 당수 케미 베이드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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