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8년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도시였다.
낮의 에딘버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상이었다. 유럽 계몽주의의 심장부, ‘북방의 아테네’라 불리던 도시였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그리고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허튼까지, 이름만 들어도 시대를 규정하는 인물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 이 작은 도시에 유럽의 지성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에딘버러 의과대학이 있었다. 1726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대’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해부학, 임상 교육, 실험을 통한 학습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한국에서 ‘좋은 대학’이 미래를 바꾼다는 믿음이 있듯, 18세기와 19세기의 젊은이들에게 에딘버러는 인생을 바꾸는 장소였다. 전 세계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훗날 하버드 의과대학, 예일 의과대학,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세울 인물들 또한 이곳의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해가 지면 도시는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냈다.
어둠이 깔린 뒤의 에딘버러는 더 이상 철학과 학문의 도시가 아니었다. 교회 종소리가 멎고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면, 도시의 가장 조용한 곳인 묘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삽을 든 남자들이었다.
1853년, 샘 보우가 그린 「에든버러 대학교 밖의 눈싸움」 출처: Samuel Bough - https://www.nationalgalleries.org/art-and-artists/20538/snowballing-outside-edinburgh-university,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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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을 가르치려면 시신이 필요했다. 그것은 단순한 교육 도구가 아니라, 의학이라는 학문이 서 있는 유일한 토대였다. 살아 있는 몸을 다룰 수 없었던 시대, 의사는 죽은 몸을 통해서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피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장기가 어떻게 놓여 있는지, 피가 어디로 흐르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의사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었다.
18세기 유럽, 그중에서도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의학 교육의 중심지였다. 런던보다도, 파리보다도 더 많은 학생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유학 열풍’이라는 말이 있다면, 그 시대의 에딘버러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지식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국경을 넘어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종의 ‘의학의 수도’였다.
문제는 법이었다. 스코틀랜드 법은 해부에 사용할 수 있는 시신을 극히 제한했다. 감옥에서 처형되거나 사망한 사람, 자살자,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극빈층이나 고아들뿐이었다. 의과대학에는 수백 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합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시신은 그 수요를 턱없이 따라가지 못했다. 이 불균형은 단순한 행정적 문제가 아니라, 당시 의학 교육 전체를 흔드는 구조적 균열이었다.
수요가 있으면, 반드시 시장이 생긴다.
갓 묻힌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고, 그것을 의과대학에 넘기는 사람들, ‘부활자(Resurrection Men)’가 생겨난 것도 이 시기였다. 죽은 이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올린다는, 기묘하게도 신성한 어감의 이름이었지만, 실상은 철저히 계산된 범죄였다.
이에 맞서 사람들은 죽은 이를 지키기 시작했다. 교회 묘지 위에는 ‘모트세이프(mortsafe)’라는 무거운 쇠 우리를 씌웠다. 한국의 장례 문화와 달리, 당시 영국에서는 매장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무덤 자체를 물리적으로 보호해야 했다. 가족들은 막 묻은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도록 밤새 지키는 감시인을 고용하기도 했다. 죽은 자를 위한 마지막 예의가,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자들의 밤을 앗아갔다.
그렇게 도굴된 시신에는 가격표가 붙었다. 더운 여름에는 부패가 빨라 8파운드 정도였고, 보관이 가능한 겨울에는 수요가 몰리며 1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당시 노동자 몇 달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인간의 몸은, 계절에 따라 값이 오르내리는 ‘상품’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에딘버러는 두 개의 얼굴을 갖게 된다. 하나는 계몽주의의 중심에서 인류의 지식을 확장하던 도시, 또 하나는 밤마다 무덤이 열리고 시신이 거래되던 암시장의 수도.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세계는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하며,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결국 한 사건을 향해 조용히 모여들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페니쿠익의 한 펍 벽에 그려진 시체도굴꾼들(부활자)의 그림. Kim Traynor - Own work,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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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명의 윌리엄이 만난건 1827년 가을이었다.
윌리엄 헤어는 아일랜드 뉴리 출신이었다. 운하 공사 노동자로 스코틀랜드에 건너와, 에딘버러 웨스트포트의 허름한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윌리엄 버크는 아일랜드 남부에서 왔다. 고향에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둔 채 스코틀랜드로 건너와, 이곳저곳 공사장을 떠돌다가 1827년 헤어의 하숙집에 세입자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다. 둘 다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이방인이었고, 둘 다 가난했으며, 둘 다 에딘버러 서쪽 빈민가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타향에서의 고단한 삶은 사람을 빠르게 엮어 놓는다.
그해 11월 29일, 하숙집에서 노인 한 명이 숨을 거두었다. 이름은 도널드였다. 군인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4파운드의 집세를 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다.
헤어는 분통이 터졌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받기 어려운 돈이었는데, 죽은 사람에게서 빚을 받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때, 우연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흘러들어왔다. 에딘버러 서전스 스퀘어에 있는 로버트 녹스 박사가 해부용 시신을 사들인다는 소문이었다.

윌리엄 버크

윌리엄 헤어
로버트 녹스는 당시 에딘버러에서 가장 이름난 해부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파리로 건너가 당대 최고 수준의 해부학을 익혔다. 그리고 1826년부터 서전스 스퀘어에서 자신의 해부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의 강의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학생들은 몰려들었고, 강의실은 비좁을 정도였다. 해부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의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그리고 그 관문의 중심에 녹스가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같았다. 시신이 부족했다.
녹스는 항상 더 많은 시신을 필요로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버크와 헤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했다. 그렇게 두 남자는 도널드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말없이 거리를 건너 녹스의 연구실로 향했다.
녹스는 시신을 확인하더니 7파운드 10실링을 건넸다. 그 금액은 두 사람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돈이었다. 그리고 그의 조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다음에도 구할 수 있으면, 언제든 가져오시오.”
4파운드를 받지 못해 분노하던 두 남자는, 그날 밤 7파운드 10실링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같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시신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로버트 녹스. 출처: Desmond A. 1989. The politics of evolution. p78,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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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희생자부터는 더 이상 자연사를 기다리지 않았다.
하숙집의 또 다른 세입자였던 조셉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회복을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다른 선택을 했다. 위스키를 억지로 먹여 정신을 흐리게 만든 뒤, 그를 살해했다. 시신은 다시 녹스에게 팔렸다.
그다음부터는 점점 쉬워졌다. 세 번째, 네 번째 희생자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됐다. 방법은 단순했고, 무엇보다 흔적이 남지 않았다. 한 사람이 피해자의 가슴 위에 올라타 호흡을 억누르고, 다른 한 사람이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술에 취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죽음은 거의 소리 없이 찾아왔다. 몸에는 외상이 남지 않았고, 해부대 위에 올라간 시신은 그저 자연사처럼 보였다.
이 방식은 훗날 두 사람의 이름을 따 ‘버킹(Burking)’이라는 말로 남게 된다.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들이 노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매춘부, 노인, 노숙자, 떠돌이들.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던 이들이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그들의 삶은 이미 사회의 시야 밖에 있었고, 죽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27년 12월부터 1828년 10월까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이 녹스로부터 받은 돈은 132파운드 10실링에 이르렀다. 한 사람당 평균 10파운드. 당시 노동자라면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 돈은 오래 남지 않았다. 술과 향락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돈이 생기면 마셨고, 마시다 보면 다시 돈이 필요해졌다.
그렇게 반복되는 사이, 두 사람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동시에 점점 더 조심성을 잃어갔다.
윌리엄 헤어가 운영하던 하숙집. 1902년에 철거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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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은 아주 미세한 곳에서 시작됐다. 희생자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게 되면서였다.
메리 패터슨은 에딘버러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로버트 녹스의 해부대 위에 올랐다. 학생들은 곧 이상함을 감지했다. 시신이 지나치게 신선했던 것이다. 죽은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강의실 안에는 낮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서로 눈을 마주치는 이들도 있었고,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질문은 여전히 금기였다.
매리 패터슨. 출처: Public Domain
그리고 제임스 윌슨이 있었다. 열여덟 살의 청년으로, 에딘버러 시민들 사이에서는 ‘멍청이 제이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다리를 절었고, 거리의 누구나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헤어는 그를 하숙집으로 유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제이미는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충분히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받은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몸부림치며 버텼고, 두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어서야 겨우 제압할 수 있었다.
며칠 뒤, 그의 시신이 다시 해부대 위에 올랐다. 그 순간 강의실의 공기는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 제이미 아닙니까.” 그 말은 금세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나 녹스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시선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얼굴부터 해부를 시작했다. 의심은 그 자리에서 잘려 나갔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제임스 윌슨(제이미).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도시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과 얼굴이 있는 사람이 사라지면, 그 빈자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소문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퍼져 나갔다.
그럼에도 두 명의 윌리엄은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사건은 1828년 10월 31일, 핼러윈 밤에 일어났다. 메리 도허티는 아들을 찾아 에딘버러를 떠돌던 아일랜드 출신의 중년 여성이었다. 버크는 자신도 같은 성을 가졌다고 속이며 그녀를 하숙집으로 끌어들였다.
그날 밤, 하숙집에는 다른 세입자 부부가 머물고 있었다. 제임스와 앤 그레이였다. 버크는 그들을 잠시 다른 곳으로 내보낸 뒤, 메리를 공격해 살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았다.
다음 날, 그레이 부부가 돌아왔다. 앤 그레이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꼈다. 공기가 어딘가 어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이불 아래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들은 곧장 경찰로 향했다.
버크와 헤어는 급히 시신을 처리하려 했다. 녹스에게 넘기면, 모든 것이 다시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늦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침대 밑에는 피 묻은 옷가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두 남자는 체포됐다. 열 달에 걸쳐 최소 16명을 살해한 끝에 맞은 결말이었다.
버크가 마거릿 도허티를 살해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출처: Robert Seymour - Original: (1829) The Murderers of the Close, London: Cowie and Strange OCLC: 316658309.Current: http://www.ourtownstories.co.uk/story/1665#page8,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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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182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됐다. 이미 도시 전체가 들끓고 있었다. 재판이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 신문들은 평소보다 8,000부를 더 찍어냈고, 사람들은 이 사건의 결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방청석은 새벽부터 인파로 가득 찼고, 법정 안은 단순한 재판장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모여든 하나의 무대처럼 느껴졌다. 이 재판은 더 이상 두 사람의 범죄를 다루는 절차가 아니었다. 에딘버러라는 도시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자리였다.
윌리엄 헤어는 결국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그는 ‘왕의 증거’가 되어, 처벌을 면제받는 대신 법정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하숙집에서 벌어진 일들, 술에 취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의 증언은 담담했지만, 그 내용은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입을 열수록 윌리엄 버크의 운명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1828년 웨스트 포트 살인 사건 재판에서의 윌리엄 헤어와 헤어 부인. 출처: Hare by D. McNee; Mrs Hare by George Andrew Lutenor; a portrait painter who was also one of the jurors at Hare's trial (see Burke and Hare murders) - Roughead, William (1921) Burke and Hare, Edinburgh: William Hodge & Co, p. facing page 12 OCLC: 60737065., Public Domain
배심원단은 크리스마스 당일 평의를 마치고 돌아왔다. 평의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었던 듯했다. 유죄. 그 한마디로 재판은 사실상 끝났다. 판사는 사형을 선고하면서 한 가지를 덧붙였다. 형이 집행된 뒤, 그의 시신은 공개 해부에 사용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형벌을 넘어, 일종의 선언처럼 들렸다. 살아 있는 동안 그가 팔아넘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죽은 뒤 그의 몸으로 다시 드러내겠다는 의미였다.
1829년 1월 28일 아침, 에딘버러 론마켓 광장에는 약 2만 5천 명의 군중이 모였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버크는 교수대 위에 올랐고, 도시는 숨을 죽인 채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밧줄이 내려오는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곧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정의에 대한 환호였는지, 단순한 구경꾼의 열광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아마 두 가지가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교수대 위에 오른 버크. 출처: Public Domain
그의 시신은 곧바로 의과대학으로 옮겨졌다. 해부대 위에 오른 그의 몸은 더 이상 한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절개되고, 관찰되고, 기록되며 지식으로 바뀌어 갔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버크의 골격은 오늘날까지 에딘버러 의과대학 해부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그의 피부로 제본된 책은 외과 관련 박물관에 남아 있다. 시신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몸을 가장 오래 남는 방식으로 내어놓게 된 셈이다.
윌리엄 헤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석방된 뒤 덤프리스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지만, 역에서 그를 알아본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는 ‘미스터 블랙’이라는 가명을 쓰고 도망쳤고,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야기는 남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달래며 “말 안 들으면 헤어가 잡아간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그는 현실을 넘어선 존재가 되었다.
로버트 녹스는 끝내 기소되지 않았다. 버크는 자백에서 녹스가 살인을 부추긴 적은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법적으로 그는 무죄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집 근처에서는 군중이 허수아비를 불태웠고, 동료 의사들은 등을 돌렸다. 왕립 외과의사 협회는 그의 직위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했고, 그는 결국 에딘버러를 떠나 런던으로 향해야 했다. 그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1862년 뇌졸중으로 생을 마쳤다.
그는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내 묻지 않았고, 바로 그 ‘묻지 않음’이 무엇을 가능하게 했는지는 이 사건이 충분히 말해주고 있었다.
1829년 1월, 버크가 「에든버러 쿠란트」에 밝힌 진술: “녹스 박사는 결코 그를 부추기지 않았고, 어떤 사람을 살해하도록 가르치거나 권유한 적도 없다”. 출처: William Burke - Anon (1829), West Port Murders, or An Authentic Account of the Atrocious Murders Committed by Burke and His Associates, Edinburgh: Thomas Ireland Junior,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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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와 헤어 사건이 남긴 충격은 결국 영국 의회를 움직였다. 1832년, 해부학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일정 시간 안에 인수되지 않은 시신을 해부 교육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동안 해부학 교육을 떠받치고 있던 불법적인 공급망, 즉 무덤 도굴과 시신 거래를 가능하게 했던 법적 공백이 비로소 메워진 것이다. 두 아일랜드 이민자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는 단순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의학 제도가 안고 있던 구조적 결함을 드러냈고, 결국 법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는 그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했다. 에딘버러의 아이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이런 노래가 불렸다고 전해진다.
버크는 도살자, 헤어는 도둑, 그리고 녹스는 그 고기를 사들이는 자.
잔혹하면서도 기묘하게 건조한 이 노래는, 이 도시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했다.
세계 최고의 의과대학을 품고 있던 도시가 만들어낸 노래였다.
에딘버러 의과대학 해부학 박물관은 현재도 대중에게 일부 공개되며, 버크의 골격을 포함한 의학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버크와 헤어 사건에 관한 기록은 에딘버러 의과대학 공식 역사 페이지(medicine-vet-medicine.ed.ac.uk)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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