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문학으로 읽는 영국

함께 읽는 영국 추리소설, 『사일런트 페이션트』④ 치료와 처벌 사이, 영국 법정신의학의 세계

정신 병원을 관광지로 사용했던 과거, 치료라는 이름의 격리와 장기 수용의 현재까지

2026.01.25 | 조회 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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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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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NT

영국 인문교양 뉴스레터 | 매주 여러분의 시야를 영국이 전세계에 미친 광활한 영향력만큼 넓고 깊게 확장해드립니다.

런던 북부, 정신건강 치료 시설 더 그로브. 높은 담장이 건물을 에워싸고 있다. 철조망은 없지만 담장은 충분히 높다. 정문에는 보안 검색대가 있고, CCTV 카메라가 모든 복도를 감시한다. 직원들은 출입증을 목에 걸고 다니며, 방문객은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복도에는 그림이 걸려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정원에는 벤치가 있고, 환자들은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 미술실에는 캔버스와 물감이, 치료실에는 편안한 의자가, 식당에는 따뜻한 음식이 있다.

이곳은 병원인가, 감옥인가? 환자들은 치료받는 것인가, 처벌받는 것인가? 그들은 아픈 사람인가, 위험한 사람인가?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사일런트 페이션트에서 더 그로브는 단순한 소설 속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정신질환과 범죄 사이, 치료와 처벌 사이, 동정과 두려움 사이에 놓인 경계의 공간. 이번 주 우리는 그 경계를 탐구한다. 영국 법정신의학의 역사와 현실을, 그리고 우리가 위험한 미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광기와 범죄 사이의 역사

 

영국은 정신질환자를 가두어 온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기원은 1247, 런던에 세워진 베들럼 왕립병원(Bethlem Royal Hospital)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는 수도원이었지만, 14세기부터 미친 사람들을 수용하는 장소로 변모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베들럼(Bedlam)이라 불렀고, 그 이름은 곧 혼돈과 광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 베들럼은 하나의 관광 명소였다. 사람들은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 환자들을 구경했다. 마치 동물원을 찾듯이. 쇠사슬에 묶인 몸들, 끊임없이 울부짖는 목소리들, 자신의 배설물 위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구경꾼들은 웃었고, 손가락질했으며, 때로는 환자들을 희롱했다. 광기는 관람의 대상이 되었고, 고통은 오락으로 소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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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에 출판된 베들럼 병원의 전경. 출처: By Unknown author. Original uploader was IxK85 at en.wikipedia - Transferred from en.wikipedia. Public Domain, 

19세기 중반,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정신질환자 역시 인간이며,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1845, 광인법(Lunatics Act)이 통과되면서 모든 지역은 정신병원(asylum)을 설립해야 했다. 그러나 이 치료는 종종 또 다른 형태의 격리에 불과했다.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들을 시야에서 지워내는 제도적 장치였던 셈이다.

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들은 더 복잡한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처벌을 받아 마땅한가. 그것도 아니면 치료의 대상인가. 1800, 군인 제임스 해들필드(James Hadfield)는 조지 3세를 암살하려 했다. 그는 정신이상을 주장했고(insanity defense),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국왕 폐하의 뜻에 따라평생 구금되었다. 무죄와 감금이 동시에 선고된, 모순의 판결이었다.

1843, 또 하나의 사건이 사회를 뒤흔들었다. 다니엘 맥노튼(Daniel M’Naghten)가 재무부 공무원 중 한 사람을 총리 로버트 필의 비서를 오인해 총으로 쏴 죽인 거다. 그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재판에서 그는 다시 정신이상을 주장 했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중은 분노했다. 어떻게 살인자가 무죄로 풀려날 수 있냐면서 말이다.

그 분노는 제도로 굳어졌다. 이른바 맥노튼 규칙(M’Naghten Rules)’이 만들어졌다. 정신이상으로 무죄를 주장하려면, 피고인이 범행 당시 자신의 행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거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이 기준은 오늘날까지도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의 법정에서 살아 있다.

1863, 브로드무어 병원(Broadmoor Hospital)이 문을 열었다. 영국 최초의 고도 보안 정신과 시설, 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름은 병원이었지만, 풍경은 감옥에 가까웠다. 높은 벽과 감시탑, 무장한 경비. 치료와 구금의 경계는 이곳에서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20세기 내내 브로드무어와 같은 시설들은 어두운 명성을 쌓아갔다. 잔인한 대우, 비인간적인 환경,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 수용.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러 학대와 부당한 처우가 폭로되면서, 마침내 개혁의 요구가 사회 전면으로 떠올랐다.

광기와 범죄, 연민과 두려움. 이 역사는 단지 제도의 연대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스스로에게 던져온 질문의 기록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를 치료라 부르고, 어디부터를 처벌이라 부를 것인가. 그리고 그 경계 위에 선 사람들을,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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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브로드무어 병원. 출처: By Illustrated London News 1867 - http://wellcomecollection.wordpress.com/2010/11/19/the-mad-the-bad-and-the-greater-good/, Public Domain

 

현대 영국의 법정신과 시스템

 

오늘날 영국의 법정신과 체계는 세 개의 층위로 나뉜다. 고도 보안(high secure), 중간 보안(medium secure), 그리고 낮은 보안(low secure). 이 구분은 단순한 행정적 분류가 아니라, 위험과 치료, 자유와 통제 사이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다.

고도 보안 시설은 극히 제한된 수로 존재한다. 잉글랜드에는 브로드무어(Broadmoor), 램프턴(Rampton), 애쉬워스(Ashworth) 세 곳이 있고, 스코틀랜드에는 카스테어스(State Hospital, Carstairs)가 있다. 전체 병상은 약 800여. 이곳에 수용되는 사람들은 위험하고 폭력적이거나 범죄적 성향으로 인해, 고도 보안 환경에서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된 이들이다. 연쇄 살인범, 대량 살인범, 그리고 통제가 극도로 어려운 폭력적 환자들. 이 공간에서 치료는 항상 감시와 함께 진행된다.

중간 보안 시설은 약 60, 병상 수는 3,500개가량이다. 더 그로브는 이 범주에 속한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중에게 심각한 위험(serious danger)을 가할 수 있지만, 고도 보안까지는 필요하지 않은이들로 분류된다. 살인, 중상해, 성범죄, 방화와 같은 중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많다. 주목할 점은, 이 중 약 35%가 민간 부문에 의해 운영된다는 사실이다. 치료와 관리의 영역에 시장 논리가 스며든 지점이다.

낮은 보안 시설은 가장 덜 제한적인 공간이다. 사회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단계를 밟는 이들을 위한 곳. 여전히 자신과 타인에게 중대한 위험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되지만, 동시에 지역사회로의 복귀를 준비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문은 더 자주 열리고, 규칙은 조금 느슨해진다. 자유는 여전히 조건부이지만, 더 이상 완전히 닫힌 형태는 아니다.

이 시스템은 이론적으로 하나의 치료 경로(treatment pathway)”를 제시한다. 고도 보안에서 출발해, 중간 보안을 거쳐, 낮은 보안으로 이동하고, 마침내 지역사회로 돌아가는 선형적인 여정. 위험은 점차 낮아지고, 자유는 조금씩 확장된다.

그러나 현실의 경로는 그렇게 매끄럽지 않다. 많은 이들은 그 선 위에서 멈춘다. 다음 단계로 옮겨가지 못한 채, 중간 지대에 머문다. 치료는 진행되지만,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위험 평가는 반복되고, 결정은 지연된다. 이론 속의 경로는 현실 속에서 종종 정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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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tairs State Hospital. 출처: By Alan Stewart, CC BY-SA 2.0

 

1983년 정신건강법

 

영국의 법정신과 시스템은 하나의 법률 위에 세워져 있다. 1983년 제정된 정신건강법(Mental Health Act 1983). 그리고 2007, 시대의 변화에 맞춰 수정된 이 법은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려 한다. 우리는 언제, 어떤 근거로, 한 인간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가.

이 법은 정신질환자를 구금하는 조건과 절차를 세밀하게 규정한다. 치료라는 이름으로, 혹은 보호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신체를 사회의 통제 안에 두는 순간을 법의 언어로 정의하는 장치다.

섹션 37은 이 체계의 첫 관문이다. ‘병원 명령(Hospital Order)’. 법원은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을 감옥 대신 정신병원으로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조건이 붙는다. 피고인이 정신장애를 앓고 있어야 하고, 그 장애의 성질이나 정도가 병원 치료를 정당화해야 하며, 실제로 적절한 치료가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 처벌의 공간이 치료의 공간으로 대체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섹션 37 위에는 또 하나의 층위가 덧붙여질 수 있다. 섹션 41, ‘제한 명령(Restriction Order)’. 이것은 명시적으로 대중의 보호를 위한 조항이다. 법원이 이 명령을 함께 부과하면, 환자의 자유는 더 이상 의료진이나 법원의 판단만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내무부 장관의 허가 없이는 석방될 수 없다. 그 기한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평생이 될 수도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알리시아 베렌슨은 바로 이 섹션 3741 아래에서 더 그로브에 수용되어 있다. 그녀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감옥 대신 병원으로 보내졌다. 치료의 이름으로. 그러나 동시에, 내무부 장관의 허가 없이는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그녀가 아무리 회복되었다고 평가받아도,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되어도, 마지막 열쇠는 다른 곳에 있다.

여기에서 법정신과 시스템의 핵심적인 딜레마가 드러난다.

언제 한 사람이 충분히 나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판단을 내리는 권한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법 조항의 해석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회가 광기와 위험,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어떤 저울 위에 올려놓고 있는지를 묻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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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베들럼에 수용된 환자들을 관광에 사용하던 모습을 묘사한 작품. 출처: By William Hogarth - The Yorck Project (2002) 10.000 Meisterwerke der Malerei (DVD-ROM), distributed by DIRECTMEDIA Publishing GmbH. ISBN: 3936122202., Public Domain

 

치료인가, 처벌인가

 

더 그로브와 같은 시설은 스스로를 병원이라 부른다. 그곳에는 의사와 간호사, 치료사가 있고, 환자들은 약물 치료와 심리 치료, 작업 치료와 예술 치료를 받는다. 언어는 부드럽고, 명칭은 인간적이다. 모든 것이 마치 회복을 향해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환자들은 수감되어 있다. 그들은 그 시설을 자의로 떠날 수 없다. 방문은 통제되고, 소지품은 검사받으며, 일상의 움직임조차 기록된다. 규칙을 어기면 격리실로 옮겨지고, 폭력적이라고 판단되면 물리적으로 제압당한 뒤 진정제를 투여받는다. 치료의 공간은 언제든 통제의 공간으로 변한다.

소설 속에서 알리시아는 다른 환자인 엘스를 연필로 찌른다. 엘스가 알리시아의 그림 위에 창녀라는 단어를 적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알리시아는 격리되고, 직원들은 그녀를 위험한 환자로 분류한다. 그림을 그릴 권한마저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테오는 반대한다. 그림은 알리시아의 치료 그 자체라고. 그녀가 말하지 않는 대신, 그림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다른 직원들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가, 아니면 대중을 보호하고 있는가. 알리시아가 나아지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그녀가 다시는 누구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법정신과 의사들은 이중의 책임을 짊어진다. 환자에 대한 책임과 사회에 대한 책임. 두 책임은 종종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환자에게 최선인 선택이 사회에는 위험이 될 수 있고, 사회를 안전하게 만드는 결정이 환자에게는 또 하나의 억압이 될 수 있다. 석방은 치료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대중의 안전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 딜레마를 그들은 위험 관리(risk management)”라고 부른다. 위험을 측정하고, 가능성을 계산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 이 환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은 얼마인가.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수치와 척도, 평가표와 보고서가 쌓여간다. 그러나 미래는 통계로 길들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정교한 도구를 사용해도, 확실한 답은 없다.

그래서 이 병원들의 시스템은 항상 조심스럽다.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리고 조심스러움은 종종 구금의 연장으로 이어지고 이 때문에 환자들은 이 시설들에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물게. 왜냐하면 아무도 그들을 풀어줬다가 혹시라도 다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치료와 처벌의 경계는 흐려진다. 회복은 허용되지만, 자유는 보류된다. 소설 속 작가는 더 그로브라는 시설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들을 낫게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안전하게 가두려는 것인가. 그리고 그 두 가지가 과연, 동시에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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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윌리엄) 노리스, 베들럼 병원 환자, 1815년. 출처: By G. Arnaud (1763-1841) - Published coloured etching (20 October 1815) after himself (1814). - Scan of a public domain image printed in Roy Porter, Madmen: A Social History of Madhouses, Mad-Doctors and Lunatics (Stroud, 2006), Public Domain.

 

비용과 사회적 딜레마

 

법정신과 치료는 막대한 비용을 요구한다. 영국에서 중간 보안 시설 한 병상을 유지하는 데 드는 연간 비용은 약 175천 파운드. 한화로 환산하면 3억 원에 가깝다. 중간 보안 체계 전체가 한 해에 소비하는 예산은 약 12억 파운드, 대략 2조 원 규모다. 이는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전체 예산의 약 1%, 정신건강 분야 예산의 10%에 해당한다.

고도 보안 시설은 더 많은 자원을 삼킨다. 병상 하나당 연간 30만 파운드 이상, 한화로는 5억 원을 넘는다.

그래서 이들의 존재는 꾸준하게 사회적 이슈로 다루어져왔다. 이 지출은 정당한가. 살인자와 성범죄자, 방화범들에게 이만한 돈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들은 치료받을 자격이 있는가, 아니면 처벌받아야 할 대상인가 등등.

물론 반대편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이들은 범죄자이기 이전에 환자라는 주장이다. 그들의 행위는 질병의 증상이었고, 치료를 통해 재범을 줄일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사회는 더 안전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비용은 단지 지출이 아니라, 위험을 줄이기 위한 투자라는 논리.

장기 수용이라는 문제도 있다. 어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법정신과 시설에 머문다. 많은 수의 이들이 이미 안정적이고, 관리 가능한 상태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을 어디로 보낼 것인가라는 문제 때문이다. 지역사회 정신건강 서비스는 부족하고, 지원 주거 시설은 이들을 받아들이기를 꺼린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머문다. 병원도, 감옥도 아닌 경계의 공간에서.

『사일런트 페이션트는 이 모든 딜레마를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 테오와 동료들의 대화 속에서, 더 그로브의 일상 속에서, 그리고 알리시아라는 한 인물의 침묵 속에서.

테오의 상사 디오메데스는 이상주의자다. 그는 환자들을 진심으로 돕고자 한다. 아무리 깊은 광기 속에 있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폭력적인 과거를 지녔더라도, 치료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믿는다. 더 그로브를 단순한 수용 시설이 아니라, 진정한 치료 공동체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은 냉소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고, 어떤 환자들은 그저 위험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역할은 치료가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연민보다 안전이 우선이라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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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에 카이우스 가브리엘 시버(Caius Gabriel Cibber)가 조각한 〈멜랑콜리아와 광란의 광기(마니아)〉로, 무어필즈에 새로 세워진 베들럼 병원의 입구 포털을 장식했던 조각 작품이다. 출처: https://wellcomeimages.org/indexplus/obf_images/53/21/60984c714578e5f2581ccb7ec9d5.jpgGallery: https://wellcomeimages.org/indexplus/image/V0013192.htmlWellcome Collection gallery (2018-04-03): https://wellcomecollection.org/works/a2fh4qdt CC-BY-4.0

 

경계 위에서

 

소설 속 더 그로브는 경계에 서 있다. 병원과 감옥 사이, 치료와 처벌 사이, 동정과 두려움 사이. 그곳은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않은 채, 늘 중간 지대에 머문다.

그곳의 환자들 또한 경계 위에 놓여 있다. 미침과 악함 사이, 희생자와 가해자 사이, 인간과 괴물 사이. 우리는 그들을 한쪽으로 분류하려 애쓰지만, 그들의 존재는 늘 그 구분을 흔든다.

그러나 어쩌면, 경계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큼 선명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그 위에 서 있다. 이성과 광기 사이, 선과 악 사이, 통제와 혼돈 사이. 안전하다고 믿는 땅은 생각보다 좁고, 균열은 언제든 발밑에서 벌어진다.

사일런트 페이션트의 탁월함은 이 불안정한 지형을 드러내는 데 있다. 테오는 치료사였지만, 동시에 치료가 필요한 존재였다. 알리시아는 환자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정직한 인물이었다. 더 그로브는 회복을 약속하는 장소였지만, 동시에 비밀과 기만이 쌓여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누구를 가두고, 누구를 치료하며, 누구를 믿는가. 그 판단은 과학의 언어로 내려지는가, 아니면 사회의 감정으로 내려지는가. 의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가, 정치의 논리로 정당화되는가. 그것은 정의로운 선택인가, 아니면 단지 편리한 선택인가.

이 질문들은 책을 덮은 뒤에도, 독자의 일상 속으로 따라 들어온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야기 속 인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알리시아 베렌슨은 침묵했다. 하지만 어쩌면, 침묵하고 있는 쪽은 우리일지도 모른다. 불편한 질문들 앞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들 앞에서.


우리는 지난 한 달간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함께 읽으며 침묵과 목소리, 고대의 신화와 현대의 범죄, 예술과 치료, 정의와 광기라는 서로 다른 층위들을 넘나들며, 하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질문을 품을 수 있는지를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탐문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에 대한 성찰이며, 진실과 거짓, 기억과 망각, 사랑과 배신 사이를 오가는 하나의 사유의 여정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침묵에 관한 이야기다. 말할 수 없는 것들, 말하지 않으려는 것들, 그리고 끝내 들리지 않는 것들에 대한. 알리시아는 입을 닫았지만, 그 침묵은 어떤 고백보다도 큰 소리를 냈다. 그것은 부재의 언어였고, 결핍의 증언이었으며, 우리가 외면해 온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경청하는 법일 것이다.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보이지 않는 이들의 존재를, 잊혀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태도. 그리고 질문하는 법이다. 우리가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것들, 이해하지 못한 채 밀어내는 것들에 대해 다시 묻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이야기와 함께 배운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큰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질문들

  • 알리시아는 석방되어야 하는가? 그녀가 여전히 침묵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아직 아프다는 증거인가?
  • 테오의 행동이 밝혀진 후, 그는 범죄자로 처벌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환자로 치료받아야 하는가?
  • 당신은 법정신과 시스템이 주로 치료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회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위험한정신질환자에 대한 두려움은 정당한가, 아니면 과장된 것인가?
  • 우리 사회는 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들에게 너무 관대한가, 아니면 너무 가혹한가?
  • 당신이 법정신과의사라면, 환자의 권리와 대중의 안전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겠는가?

4주간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달에는 또 다른 영국 작가, 소피 해나Sophie Hannah의 『리틀 페이스Little Face』를 함께 읽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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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침묵하는 여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끊임없이 외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앨리스는 출산 후 잠시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자신의 딸 플로렌스가 다른 아기로 바뀌어 있는 걸 발견하고 이를 경찰에 신고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남편조차도요. 소설은 앨리스가 뒤바뀌어 버린자신의 딸과 얽힌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시인 출신 범죄소설가인 소피 해나는 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레베카( Rebecca )가스라이트(Gaslight)의 계보를 잇는 작가입니다. 거대한 집, 억압적인 남편, 그리고 아무도 진실을 들어주지 않는 여성. 공간과 관계, 시선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불신의 구조가 그녀의 소설 속에서 다시 한 번 되살아납니다.

알리시아가 침묵으로 말했다면, 앨리스는 목소리로 싸웁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녀의 말을 들어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정말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다음 달, 다시 만나요. 이번에는 리틀 페이스와 함께.

* 리틀 페이스의 한국어 번역판은 절판되어 일반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쿠팡에서 20261월 기준 로켓 배송으로 구입 해 받아 보실 수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또한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등의 플랫폼에서 중고 서적으로 구하실 수 있습니다. 외국어가 편하신 분들은 아마존 등에서 이북으로 구입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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