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인도 북부의 작은 마을 다람살라에 살 때다. 다람살라는 중국의 강제 점령 이후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로 넘어온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곳에는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망명 정부를 따라 정착한 난민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어느 해인가 일요일 아침 볼 일이 있어 한껏 여유 있게 아랫마을로 향하는 길에 망명 정부 건물 앞에 길게 늘어선 티베트 사람들과 마주쳤다. 휴일 아침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지? 궁금해 물어보니 그날이 총리를 선출하는 투표일이라고 했다. 중국에 나라를 뺏기고 수십 년째 망명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열심히 투표에 참여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그날의 기억이 유독 선명한 것은, 망명 정부임에도 투표로 정치에 참여하는 티베트 사람들과 달리 수 년 째 외국에서 살면서 대통령 선거마저도 참여하지 않았던 나의 상황이 대비되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그 줄을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줄에 선 사람과 줄을 바라보는 사람은 같은 광장에 있어도 보는 풍경이 전혀 다르다. 기한을 정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길어지던 외국 생활을 어느 순간엔가 정리하게 된 데에는 이날의 기억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처하는 인도에서, 비록 망명 정부일지언정 정치 참여에 뜨거운 열기를 보이던 티베트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도 무언가를, 어떻게든 말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 후 실제로 정치의 현장에 가까워진 것은 몇 년이 지나 광주에 돌아온 뒤였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의 밤 이후 녹색당 사람들과 함께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며 지역의 정치 활동을 고민하게 되었다. 중앙의 권력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권력으로부터 가장 먼 자리에 있는 지역의 정치란 무엇인가를 동시에 묻게 됐다. 그런데 광주에서 경험하는 정치는 당연히 인도에서의 그것과는 달랐다. 소위 정치 고관여층이 수두룩한 광주에서 정치는 언제나 뜨거운 화제이지만, 그것은 중앙정치에 압도적으로 불균형하게 기울어 있다. 다가오는 전국동시지방선거도 광주에서는 그 자체로 관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때도 다르지 않았다. 전국적으로는 뜨거운 열기의 정치 담론도 광주에서는 정작 후보가 결정되고 나면 시들하다. 선거운동도 찾아보기 어렵고, 각종 매체에서도 그 흔한 여론조사 결과도 찾아보기 어렵다. 가뜩이나 중앙 정치의 들러리로 소비되어온 지방 정치가 광주를 포함한 호남에서는 더욱 관심의 밖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과 다르게 광주를 휩쓴 뜨거운 이슈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탄생에 대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후 5극 3특 국가균형성장 전략에 따라 5개의 권역으로 전국을 나누고 특별지원을 하겠다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중앙정부의 대규모 재정 지원 약속에 힘입어 전국에서 최초로 광주시와 전라남도는 통합지방정부 추진을 선언했다. 물론 이재명 정부의 지방 정책은 지역별 특화 지원을 통해 지역 소멸을 막겠다는 좋은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통합을 통해 송두리째 삶의 조건이 바뀌게 될 시민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중앙정부에 의한 지역의 주체성 훼손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통합반대 국회청원이 등장하고, 진보정당을 포함한 시민사회에서는 시민대응 연대체를 만들어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전라남도와 광주시가 통합할 경우 발생할 위헌적인 상황 때문이다. 이미 헌법재판소는 시도의회의 인구 당 의석수의 비례가 최대 3:1 이상을 넘어서는 안되며, 비례대표 의석 배분 3% 봉쇄조항이 위헌이라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 이렇게 명백하게 위헌으로 판결된 상황이 재현될 것이 분명한데도, 광주전남의 통합은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위해 광주가 앞장서야 한다는 정치적 압력과 민주당 정부의 장밋빛 지원 약속 속에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지방에서의 정치는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나 기회가 아니라 중앙정치를 위한 인질이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설치를 위한 특별법안이 공포(2026.3.5.)된 이후 이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전남광주의 시민들은 '시민주권 권력구조 설계'를 위한 공론장을 열고, 입법과정에 있는 시민참여기본법과 국가시민참여위원회가 실질적인 시민주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충분한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다람살라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에 했던 그 일—자기 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일—을, 광주와 전남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정치의제는 정부와 집권여당의 일방적인 독주에 휩쓸리거나,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거대 양당의 힘겨루기에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실종되면서 지역의 고유한 의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광주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 시민사회가 활성화되어있고,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가진 지역이지만, 그런 광주에서조차도 알고 보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정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선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라고 한다. 광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지방에서의 선거과 정치가 어떤 모습인지 잘 알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소위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필요한 ‘지방 정치’라는 뿌리가 죽어가고 있었다.
지난 4월 16일, 광주녹색당에서는 광주버스터미널 앞 광장에서 처음으로 세월호 참사 12주기를 기리는 정당 연설회를 열었다. 광주를 떠나거나 광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장소였지만, 대부분은 발걸음을 옮기기 바쁜 탓에 녹색당의 소박한 집회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십 여 년 전 일요일 아침의 다람살라에서와 달리 나는 더 이상 그 줄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광주 정치의 당사자였고, 내 옆에는 티베트 사람들 만큼이나 뜨거운 마음을 가진 녹색당 사람들이 있었다. 죽어가는 뿌리에 물을 주는 마음으로, 그런 마음들을 모아 광주에서 정치를 만든다. 이것이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오은영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전임연구원. 오랫동안 문화 기획과 정책을 연구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인도 다람살라에서 6년 정도 살았다. 평화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평화학을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피스모모를 알게 되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평화학을 공부하면서 딸 셋, 아들 하나인 가정에서 셋째 딸로 자랐다는 사실이 자신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게 되었다. 평화가 있다면 ‘자기 자신과의 평화’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세상으로 평화를 확장하는 일에 노력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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