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제 티켓에 당첨되셨습니다! 티켓 교환권을 보내드릴 주소를 기재해 주세요.”
스팸인가 했더니 일본 카가와현의 서울 사무소에서 온 문자였습니다. 지난 봄 화랑미술제의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홍보 부스에 명함을 넣고 왔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진행되는 이번 행사의 가을 회기 관람권에 당첨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네요.
카가와현은 쿠사마 야요이 호박과 미술관들로 유명한 나오시마 섬이 위치한 곳입니다. 이 곳에서는 2010년부터 3년마다 국제예술제를 개최하는데, 2025년 올해 여섯번째 트리엔날레가 열렸습니다. 상장처럼 고급 종이에 인쇄된 티켓 교환권과 정성스레 동봉된 관광 안내서를 받아보니 ‘이 정도로 진심이 담긴 초청이면 가야겠구나’ 하는 마음에 곧장 다카마쓰행 항공편을 예약했습니다.

세토우치 트리엔날레
세토우치는 일본 규슈, 시코쿠, 혼슈 세 섬에 둘러쌓인 세토 내해에 인접한 지역을 말합니다. 한국의 통영처럼, 세토 내해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어요. 각 섬은 고유의 문화와 아름다움이 있지만 산업화, 고령화의 변화 속에 인구가 줄어들면서 점차 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토우치 국제 예술제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섬마을을 예술로 다시 부흥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바다의 복권(復権, Restoration of the Sea)을 주제로, 아티스트와 지역 주민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모아 세토우치의 17개 지역에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방문객은 ‘트리엔날레 패스포트’ 라는 티켓을 들고 바닷마을의 아트 스폿들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죠.

나오시마 말고, 오기지마와 우타즈로
세토우치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섬은 나오시마입니다.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도 있고, 베네세 하우스, 이우환 미술관, 그리고 올해 개관한 나오시마 신 미술관까지 많은 미술관이 밀집된 대표적인 예술섬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어촌 내음이 물씬 풍기는 작은 바닷가 마을을 찾았습니다. 예술제의 의미를 제대로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다녀온 오기지마 섬과 우타즈 마을에서 받은 감동을 구독자님과 나눠볼게요.

오기지마 섬 풍경
다카마쓰 항에서 페리를 타고 40분 이동하면 오기지마 섬에 도착합니다. 오기지마 항에 인접하면 Ogijima’s Soul 이라는 근사한 건축물이 방문자들을 맞이합니다. 스페인의 조각 예술가 Jaume Plensa의 작품으로, 전 세계와 교류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아 여러 언어의 문자들로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건물이 잔잔한 수면 위에 떠 있어서, 물과 처마 사이로 한 바퀴 돌다 보면 출렁였던 마음이 잠잠해지고 세토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오기지마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마카베 리쿠지의 골목 벽화 프로젝트가 보입니다. 이 섬에서 모은 폐자재에 풍경을 다채롭게 그린 뒤, 판넬을 쪼개고 다른 조각들과 섞어 합쳐 독특한 패턴을 만들었습니다. 폐가가 많은 섬 골목 골목에 이렇게 아트월을 두니 스산한 느낌 대신, 모퉁이를 돌면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하는 설렘이 생깁니다.
마을의 언덕 위를 올라가면 오기지마 파빌리온이 있어요. 종이로 집을 짓는 일본의 천재 건축가 반 시게루가 설계하고, 오이와 오스칼이라는 브라질 아티스트가 유리창과 벽면에 오기지마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마을의 상징이 그려진 유리창 너머로 세토해와 마을 풍경이 펼쳐집니다. 파도의 물결, 문어, 고기잡이 배 - 모두가 이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이 곳 사람들의 삶입니다. 오기지마 파빌리온은 지역 주민 일상의 시선으로 마을과 바다를 감상하는 경험을 방문객들에게 선물합니다.
보리가 살려낼 오기지마 섬의 미래
온 섬이 계단식 보리 농사를 짓고 이 곳에서 난 보리로 만든 맥주로 우리 섬이 유명해진다면 너무 좋겠다. 우리가 만든 이 맥주가 이 섬을 살릴거야. 게다가 장수마을이 되서 아무도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서, 전 세게가 우리 섬의 장수 비결을 주목하는거야!
인구가 소멸되어가는 섬 마을이, 지역 보리로 만든 맥주와 미소된장으로 전 세계인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고 모두가 장수한다는 상상. 아티스트 그룹으로 결성된 1965년생 동갑내기 여섯명이 꿈꾸는 미래입니다. 이들은 꿈만 꾼게 아니고, 이걸 아예 100년 후 가상 현실로 만들어 버립니다.


BFMO (Barley and Future Museum of Ogi Island). 빈 집을 미래의 오기지마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입장하는 순간 2125년으로 시간 여행이 시작됩니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오기지마 섬의 회생 스토리를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만들고, 진짜 맥주도 만들어서 판매합니다. 베스트 시나리오로 채워진 공간을 둘러보고 부흥의 주인공 뽈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이제는 상상이 아닌 현실 같습니다.
고령화, 인구 소멸, 경기 침체 - 우리는 다가오는 암울한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비관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다 BFMO를 보고 나오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입니다. 우리는 늘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희망이 담긴 베스트 시나리오를 꿈꿔본 게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주로 현실과 타협하고 쓸쓸하게 각자도생을 준비하지요. 하지만 오기지마 섬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찬 미래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맥주를 직접 만들며 그 꿈에 한 발짝 다가갑니다. 100년 후 오기지마의 성공 신화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희망찬 배경 음악을 듣다 보면, 좋아질 수 있다는 긍정의 에너지가 저도 모르게 솟아납니다.
우리가 만든, 우리를 위한, 우리의 섬
오기지마의 노인정에는 프랑스 작가 Emilie Faif의 텍스타일 조형물, Our Island가 있습니다. 섬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 굴곡이 아름답고, 푸르고 거대한 천 덩어리가 주는 규모감에 압도됩니다. 사용된 원단이 모두 섬 주민들의 것이라는 점이 특별합니다. 작가는 오기지마에 살고 있는 200여명의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주민들로부터 원단을 모았습니다. 섬 모양을 따라 걷다 보면, 단체 사진과 바둑판, 마을 행사를 적어둔 칠판까지, 정감 있는 노인정의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민들의 옷으로 섬을 짓고, 삶의 자리를 예술에 내어준 진짜 우리의 섬. 예술이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말이 무엇인지, 가장 완벽한 구성으로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의 첫 일정으로 오기지마를 방문한 것은 정말 뿌듯한 선택이었습니다. 섬 사람들과 아티스트가 지역을 살리기 위한 마음을 모아 정성스레 만든 프로젝트가 이 작은 섬에 15개나 있으니까요.
아트 프로젝트들을 찾아 골목을 걷다 보면, 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곤니찌와’ 하며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주시고, 섬 전체가 제 것인 마냥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함께 지켜내고 살려가는 섬 마을 이야기, 오기지마에서 희망이 주는 따뜻한 감동을 안고 옵니다.
다음 편은 소금 마을 우타즈와,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다카마쓰의 이야기로 찾아뵐게요.
세토우치 트리엔날레 방문기 2편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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