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멈춰 있던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

홍승혜 «On the Move 이동 중» 국제갤러리 부산

2026.06.17 | 조회 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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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혜 «On the Move 이동 중» 전시 전경
홍승혜 «On the Move 이동 중» 전시 전경
<Emotical Practice 표정 연습> 세부, 2025, animate, garageband 4'16
<Emotical Practice 표정 연습> 세부, 2025, animate, garageband 4'16"

구독자 님, 어렸을 때 인쇄물이나 모니터 화면의 작은 점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조악한 인쇄물이나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 더 쉽게 보이는 그 점들, '픽셀' 말이에요. 수많은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선이 되고, 면이 되고,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이 되지요. 부산에 간 차에 마침 광안리 드론쇼를 보면서 고도화 된 픽셀의 실시간 움직임을 생생하게 감각하는 경험을 했는데요. 드론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기계적 구상이 인물의 피부색, 눈동자와 머리카락까지 섬세하게 묘사하고 빠르게 전환하는 장면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잡아당깁니다. 한편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6월 28일까지 열리는 홍승혜의 «이동 중»에서는 정반대의 광경을 마주했어요. 간결한 도형들이 느린 호흡으로 움직이다 멈춰서서 만들어내는 원과 반원(스마일 기호)의 영상 같은 것 말이에요.

극사실적인 구상 이미지가 주는 만족감이 있다면, 극단적으로 단순화 된 이미지가 주는 만족의 세계가 있습니다. 홍승혜의 작업은 가장 순수하고 정제된 형태의 기하 도형으로 구축된 세계입니다.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방식, 일련의 기하-추상-도형이 보이는 움직임과 리듬은 절제된 구상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가령 ○와 ✕가 천천히 움직이다 어느 지점에 잠시 멈춰서면 특정한 감정을 내포한 [emotical] 얼굴 표정으로 읽히는 식입니다. 픽셀로 모든 이미지를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간결한 도형이 천천히 움직이다 멈춰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여전히 감정을 느껴요. 인간-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우리는 무생물에서도, 도형에서도, 점 하나에서도 곧잘 너, 나, 우리를 봅니다. 어쩌면 마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점 하나 혹은 선 하나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기적 기하학

<Cover-Up 덮기> 2020, 

archival pigment print on paper, wood frame, 40x30cm (3 pieces)
<Cover-Up 덮기> 2020,  archival pigment print on paper, wood frame, 40x30cm (3 pieces)
<Organic Geometry 유기적 기하학> 2014, archival pigment print on paper, wood frame, 42x42cm (2 pieces)
<Organic Geometry 유기적 기하학> 2014, archival pigment print on paper, wood frame, 42x42cm (2 pieces)

홍승혜는 1997년부터 그림판과 포토샵을 만나 픽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색을 찍어 네모 안에 집어넣으면 선도 되고 면도 되고 그걸 채우면서 형태를 만드는 것에 푹 빠졌다"고 합니다. 작가는 장식적인 패턴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이를 구현하기 위해 그림판에서 포토샵의 저해상도로 넘어갑니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일은 무한한 캔버스 위에 점을 찍는 일과 같은데, 이때 망망대해와 같은 화면 위의 길잡이가 되어준 것은 '그리드' 즉 격자무늬의 구획입니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특정한 대상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 "(알고보니까) 백지에서 무언가 생겨나는, 백지에서 무언가 그려지는 상태"였습니다.

이는 홍승혜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유기적 기하학 Organic Geometry'으로 연결됩니다. 점, 선, 면 등 공간에 있는 도형의 크기, 모양, 상대적 위치를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학은 생명 활동의 여러 요소가 긴밀하게 움직이고 협력하는 유기적 상태와는 언뜻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데요. 작가에게 모니터 화면 속의 세계에서 증식하는 픽셀들은 마치 자연계에서 생명체가 싹이 돋고 성장하는 느낌과 같았습니다. 기하학이라는 인공적이고 기계적인 세계에 인간적인 시선과 해석을 더해 자연적이고 불확실한 유기적 형태를 모색하는 일. 픽셀 하나하나가 세포로 치환되고, 구조를 갖추고 연결된 형태가 될 때 비로소 '유기적 기하학'의 세계가 열리는 셈입니다. 


리듬과 움직임

<Searchlight 서치라이트> 2023, animate, garageband, 2'50
<Searchlight 서치라이트> 2023, animate, garageband, 2'50", <Back Stool 백스툴> 2023, hpl + birch plywood, 40x41.5x49cm (2 pieces), <Round Stool 원형스툴> 2023, hpl + birch plywood, 35x35x35cm
<Light Upon 불빛> 2021, animate, garageband 2'08
<Light Upon 불빛> 2021, animate, garageband 2'08", <Wall Shelf 벽선반> 2023, birch plywood, acrylic latex paint, 80x18x20cm

납작한 디지털 이미지를 다시 물리적 세계로 불러오는 과정에서 평면은 때로 입체가 됩니다. 홍승혜의 작품 세계에서 도형은 액자 바깥으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도형이 하나의 몸체가 되어 벽에 부착되기도 합니다. 패턴과 그리드가 현실로 확장되면 공간 속에서 건축적 요소로 나타나기도 하고요. 실제로 작가는 공간 자체를 불확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가변적인 '파편'들을 사용하고 재구성하기도 했고, 반복되는 사각형의 격자로 가득찬 광장-공간을 연출하기도 했고, 디자인 가구를 만들어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이동 중» 전시장에 놓인 <벤치>나 <스툴>은 직접 만져볼 수도 있고, 앉아볼 수도 있어요. <서치라이트>와 <불빛>처럼 사각형의 화면 밖으로 나온 도형들은 디자인 가구 위로 흩어지고 모이고, 레이어가 겹쳐지기도 하고, 색색깔이 계속 변화하며 새롭고 재미난 광경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예측불가능성은 저를 작업하게 만드는 굉장히 중요한 동력이에요. 재미있는 건 그런 결과물들이 결국 옛날부터 제 안에 있었던 형태라는 거죠." 선명한 색채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은 마티스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작업부터 최근까지 작가가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입니다. 유무형의 작품을 이루는 도형에서는 앵포르멜과 종이 콜라주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종이를 자르는 데 쓰는 레드메이드-금형으로 찍어낸 듯한 꽃모양이 선반에도 하나, 불빛에도 하나 떠다닙니다. 멈춰있는 물리적 오브제에 움직임을 불어넣는 것은 빛의 리듬 그리고 음악입니다. 작가는 거장들의 고전적이고 센티멘털한 선율을 차용하는 단계를 지나, 애플의 개러지밴드 프로그램으로 직접 리듬과 멜로디를 만듭니다. '움직임의 세계는 0.001초도 정말 다르다'고 말하는 작가가 직접 영상과 음악까지 창작하게 된 건 일견 자연스러운 흐름 같아요.


<Tree Speak 말나무 / Invisible Geometry 보이지 않는 기하학 / Robert Filiou 로베르 필리우> 2006, artist's book, 15x15cm, 320pp
<Tree Speak 말나무 / Invisible Geometry 보이지 않는 기하학 / Robert Filiou 로베르 필리우> 2006, artist's book, 15x15cm, 320pp

그림판에서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에 이르는 일련의 작업들이 작가가 우연히 컴퓨터 속 '실행취소' 기능을 통해 도형이 이동하는 순간을 처음 목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봅니다. 어떤 찰나의 움직임에서 발견한 가능성을 모니터 화면에서 끈기 있게 탐색하고, 구현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이동 중'인 작가의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전시장 동선을 따라 걷습니다. 액자 속의 회화, 조각, 영상과 음악은 '순간캡처'처럼 멈춰있거나 느리게 반복되지만, 관람자는 각자의 리듬과 호흡에 맞춰 스스로의 인식과 감상과 따라 움직이며 전시를 완성합니다. "움직인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무엇보다도 '유기적인' 상태"입니다.

문득 우리는, 삶은, 유기적이라는 것은 결국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서서히 이동 중[Create tween]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단조로운 여정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예술이 주는 심미적 감상과 같은 '의미'있는 것들일 겁니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이라는 로버트 필리우의 말은 오랫동안 작가의 작업에 영향을 준 문구입니다. 볼 수 있는 시각적 경험을 넘어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움직이며 변화하는 작가의 예술 작품을 통해, 삶이 예술을 넘어 더 풍부하고 즐거워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라면 이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각형 그리드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는 작가의 여정이 어디로 움직일지 궁금해집니다.  

<Frame Type Relief 액자형 부조> 2024,

 hpl + birch plywood, frame: 52x40x9cm, object inside: dimensions variable, <Love Bench 러브 벤치> 2023, hpl + birch plywood, 90x41.5x54cm (2 pieces)
<Frame Type Relief 액자형 부조> 2024,  hpl + birch plywood, frame: 52x40x9cm, object inside: dimensions variable, <Love Bench 러브 벤치> 2023, hpl + birch plywood, 90x41.5x54cm (2 pieces)

참고

국제갤러리 홍승혜 작가

홍승혜 <복선을 넘어서Ⅱ> 전시도록, 국제갤러리, 2023

홍승혜 <점·선·면> 전시도록,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어린이박물관, 2016

MMCA 작가와의 대화 | 홍승혜 작가 / MMCA Artist Talk | Hong Seunghye [Youtube]

Studio Visit l Hong Seung-Hye [Youtube]

홍승혜 | 리움, 작가를 만나다 #32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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