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여행 동선을 짜는 방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중심축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유명한 맛집을 중심으로, 누군가는 반드시 가봐야 할 명소나 로컬 골목길을 궤도 삼아 항로를 설계하더군요.
제 여행법은 그들과 비교하면 조금 다른 편입니다. 저는 철저하게 ‘어느 호텔에 묵을 것인가’를 중심으로 여행의 모든 동선을 기획합니다. 현지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에어비앤비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다니는 낭만 같은 건 제게 없습니다. 제게 여행이란 낯선 길거리를 헤매며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마주하는 고생이 아니라, 일상의 피로와 소음이 차단된 '정돈된 공간'을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호텔을 고를 때 눈여겨보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조의 창문이 있는 방을 고르는 것입니다. 물론 매번 비싸고 좋은 방만 갈 수는 없으니 늘 상황과 예산에 맞게 조율하곤 하지만, 누운 시선 끝에 무심히 걸리는 창밖의 풍경만큼은 쉽게 양보하기 힘든 기준입니다.

사실 저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기 전, 이미 한국에서 구글 지도를 통해 여행지와 이동 동선을 수십 번씩 샅샅이 시뮬레이션해 본 상태입니다. 막상 도시 한복판에 첫발을 디뎠을 때 여행 특유의 낯선 설렘보다는, 내가 설계한 항로에 단 하나의 오차도 변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더 크더군요. 그렇게 익숙해진 도시를 지나 호텔 방에 들어서면 비로소 진짜 휴식이 시작됩니다. 푹신한 침대에 깊숙이 누워 창밖으로 펼쳐진 빌딩 숲과 불빛들을 가만히 응시할 때, 제 마음에 밀려오는 감정은 황홀함이라기보다는 묘한 '안전함'에 가깝습니다.
현실의 삶은 늘 제 통제 범위를 벗어납니다. 해야 할 업무들, 얽혀있는 인간관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늘 서툴게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지난주 고향 부산의 축제 인파 속에서,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제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렸던 것처럼 말이죠.
유리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저 바깥의 세상은 숨 가쁘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알맞은 온도로 제어된 실내, 정갈하게 정돈된 침구 위에 누워있는 나는 그 혼돈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내 손으로 암막 커튼의 버튼을 누르고 조명을 조절하는 그 사소한 행위를 통해, 비로소 이 작은 세계의 완벽한 통제권을 내가 쥐고 있다는 안도감을 즐깁니다.

재미있는 건, 이토록 철저하게 예습하고 마음에 드는 정돈된 공간에 머물러도 여행 3일째나 되면 언제나 어김없이 집에 가고 싶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멋진 대도시의 야경과 완벽한 호텔 서비스도 내 손때가 묻고 익숙한 내 집 침대가 주는 편안함을 이기지는 못하나 봅니다. 낯선 타지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시야를 확보하려 애쓰다가도, 결국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제 모습을 보며 픽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가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대단한 여행의 경험이 아니라, 잠시 완벽하게 고립되어 숨을 고를 수 있는 '일시적인 도피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다시 내 집이 그리워질 때쯤, 비로소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아주 조금 얻는 것이죠.
🎙️ 부기장의 한마디
글로만 보면 기장님의 여행이란 마치 까다롭게 괴로워하는 일처럼 느껴지네요. 그런데 실제로 기장님과 함께 여행해 본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저처럼 100% 무계획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건 결국 기장님 같은 분들이 있기 때문이죠.
저는 여행을 가면 정말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습니다. 일단 도착하고 나서야 뭘 할지, 뭘 먹을지, 어디를 갈지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상하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 우연히 발견한 가게, 충동적으로 사게 된 물건들이 더 큰 기쁨으로 남습니다. 계획해서 만나는 즐거움도 좋지만, 우연히 마주친 즐거움은 두 배쯤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제가 여행에서 좋아하는 것은 의외의 것, 그리고 낯선 것입니다.
브레히트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여줄 때 비로소 사람은 생각하기 시작한다고 보았습니다. 너무 익숙한 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당연한 것은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낯선 것은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왜 이들은 이렇게 행동할까, 왜 이 도시는 이런 모습일까, 왜 나는 여기에 놀라고 있을까. 여행의 즐거움도 비슷한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계획은 효율을 높여주지만, 낯섦은 이해를 넓혀줍니다. 예상했던 풍경을 확인하는 대신 예상하지 못한 세계와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배움은 새로운 장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낯선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보란더의 시선 : 숙소를 고르는 기준
결국 3일 만에 집을 그리워할 걸 알면서도, 제 마음은 벌써 내년에 개최될 세계적인 현대미술 축제인 '카셀 도큐멘타'로 향해 있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찾게 될 그곳을 앞두고 아직 1년이나 남았음에도 틈틈이 구글 지도를 켜고 독일 카셀의 숙소 주변을 뒤적거립니다.
낯선 곳에서 유독 쉽게 지치거나 불안을 느끼는 분들을 위해, 제가 완벽한 안도감을 얻기 위해 체크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들을 공유합니다.
- 코너 룸(Corner Room) : 엘리베이터와 멀어 한참 걸어야 하지만, 복도 맨 끝 방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과 양면 창문이 열어주는 개방감은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 바닥의 마감재 : 카펫 바닥보다는 가급적 우드나 타일 마감을 선호합니다.
- 도시의 고가 도로 뷰 : 인공적인 도시 구조물과 불빛 속을 바쁘게 흘러가는 사람들을 아득히 내려다보며, 그들의 하루와 삶을 문득 궁금해하는 이질적인 시선을 좋아합니다.
- 샤워 커튼 없는 독립된 샤워 부스 : 몸에 감기는 찝찝함이 없는 샤워 부스를 선호하지만, 압도적으로 뷰가 좋은 곳이라면 샤워 커튼의 불편함쯤은 기꺼이 포기합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까다롭나요? 사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숙소는 없기에 늘 타협하지만, 단 하나라도 만족한다면 흔쾌히 오케이입니다. 일상에선 가질 수 없는 취향을 한껏 밀어붙이는, 저만의 소소한 사치니까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완벽한 안도감을 위해 여행지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는 기준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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