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를 제외하고 벌써 열 번째 뉴스레터입니다. 지난 4월, 가벼운 마음 반 걱정 반으로 첫 문장을 떼었던 보란더가 어느덧 두 달이라는 시간을 통과했네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눈에 띄는 구독자 수의 변화도, 어디 가서 성과랍시고 거창하게 공유할 만한 대단한 지표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화면에 찍힌 '10'이라는 숫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집니다. 어찌 됐든 매주 도망치지 않고 저만의 마감일을 지켜냈다는 뜻이니까요.
사실 매주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쓸 때마다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이 행위를 제가 왜 이어가고 있는 걸까 하고 말이죠. 그 답을 찾기 위해 다가오는 여름에 마주할 연극 한 편을 기다리며, 제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오랜 무대 하나를 꺼내어 봅니다.

첫 번째 직장을 거의 도망치듯 퇴사하고 난 뒤,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으로 주변을 기웃거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매년 가을마다 열리는 '서울공연예술제(SPAF)'라는 연극 축제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관객들을 안내하는 대가로 연극을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때 대학로 극장에서 마주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라는 작품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주인공 이반이 혼란스러운 길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에서 무대 바닥이 갈라지더니, 천장에서는 거센 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좁고 한정된 극장 안에서 바닥이 열리고 비를 표현한 물이 쏟아지던 그 압도적인 장면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갈 길을 잃었던 20대의 제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누군가는 연극이 오글거린다거나 현실성이 없어 민망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게 연극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치열한 '상상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영화와 달리, 연극은 눈앞에 놓인 한정적인 무대와 절제된 대사 사이의 빈틈을 관객인 제가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대 위 조명 하나, 배우의 손짓 하나를 보고 듣고 유추하며 주인공의 내면에 깊숙이 이입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꽤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야 하는 일입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매년 서울공연예술제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악령>에서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지현준 배우의 팬이 되어, 다가오는 7월에는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나는 나의 아내다>라는 작품을 예매해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 극은 무대 위에서 배우 오롯이 혼자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채워야 하는 1인극입니다. 텅 빈 무대를 홀로 책임지는 배우의 외로움과 긴장감을 상상하다가, 문득 일요일 아침마다 모니터 앞에서 흰 화면을 째려보고 있는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직업도 아니고 대단한 조회수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매주 기어이 마감을 지켜내는 제 행위도 어쩌면 관객 없는 무대에서 혼자 열심히 독백을 이어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주 발행하는 이 '보란더 뉴스레터'는 결국 저라는 사람의 윤곽을 기록해 나가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제가 어떤 장면에 매료되고 무엇에 유난스럽게 반응하는지 문장으로 남기다 보니, 희미했던 제 취향과 태도가 전보다 조금씩 또렷해지는거죠.
결국 나만의 고유한 취향과 태도를 선명하게 다듬어가는 것, 그것이 곧 '나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시작 아닐까 합니다. 매주 땀 흘리며 쌓아 올린 이 텍스트들이 결국 미래에 선보일 브랜드의 가장 고유한 태도가 될 테니까요. 당장 눈에 보이는 대단한 지표는 없지만, 뭐 어떻습니까. 그저 '해서 손해 볼 일 없다'는 마음으로 다음 주에도 저는 담담하게 모니터 앞에 앉아보려고 합니다. 더불어 매주 배달되는 이 보란더 뉴스레터가 구독자 여러분들에게도 자신만의 오랜 취향과 태도가 전보다 또렷해지는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기장의 한마디
저도 기장님처럼 연극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연극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대학 시절, 누구나 교양 과목은 문화 관련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데, 저는 아마 '연극의 이해'(?) 같은 수업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박준용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나중에 세바시에도 나오셨죠.) 수업의 많은 내용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부조리극'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던 당시, 관객들은 어리둥절했다고 합니다. 무대 위 인물들은 바보 같았고, 배우들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은 공연 중에는 피식 웃기도 했구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깨달았다고 하죠. 무대 위의 바보가 사실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어떤 이는 눈물까지 흘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제 기억 속 이야기라 실제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 이야기가 자꾸 떠오릅니다.
특히 회사라는 공간은 가끔 8시간짜리 부조리극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날은 왜 바쁜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어떤 날은 따분함을 견디지 못해 포털 스포츠 기사만 연신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월급을 받으니 열심히 하려고는 하는데, 문득 그래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도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난히 버티기 힘든 날이면 저는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극의 주인공은 그래도 나라고, 지금은 힘든 장면을 지나고 있을 뿐, 아직 막이 내린 것은 아니라고요.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이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자신의 삶을 마주하듯, 우리도 하루의 무대를 내려오면 각자의 삶으로 조금 더 생기 있게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오늘의 이 장면들이 지나고 나면, 한 편의 연극, 잘 마쳤다 웃으며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 보란더의 시선 : 공연을 고르는 기준
문득 저만의 작은 연극 고르는 팁을 공유해보고 싶어지네요. 저는 연극을 고를 때 평소 좋았던 극단의 이름을 메모해 두었다가 찾아보거나, 저의 취향에 맞는 극장들의 라인업을 주기적으로 검색해 보는 편입니다.
- 두산아트센터 : 사회적 경계를 넓히는 젊고 도전적인 창작자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
- 대학로예술극장 : 한국 현대 연극의 최전선에서 동시대 예술가들의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개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무대.
- 극단 산수유 : <12인의 성난 사람들>처럼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해부하며, 무대 위 팽팽한 긴장감의 진수를 보여주는 극단.
- 극단 미인 : <아들에게(부제: 미옥 앨리스 현)>와 같이 역사나 사회적 프레임 속에 가려진 인물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따뜻하면서도 묵직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극단.
조금 더 시선을 넓혀보면, 여행지에서 그 나라의 전통 공연을 찾아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경험입니다. 제게는 홍콩의 '시취 센터(Xiqu Centre)'가 그랬습니다. 다식과 따뜻한 차를 곁들이며 중국 전통 경극을 관람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솔직히 대사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공연 내내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대사라곤 극 중 여인을 애타게 부르던 "꿀러~" 하는 독특한 발음뿐이었으니까요. 언어의 빈틈을 나만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꽤 근사하고 이색적인 무대 경험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남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에게만큼은 깊은 상상력과 울림을 주는 자신만의 오랜 취향이나 공간이 있으신가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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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oclockpk
인스타에서 이미지와 함께 올라오는 대표 문장들이 참 좋아요
VOLANDER
스치고 지나갈 수 있는 글귀에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스타에 올라가는 사진들은 부기장님이 직접 찍는 필름 사진 위주로 고르고 있어요. 필름의 온도가 글의 빈틈을 잘 메워주는 것 같습니다. 반가운 댓글 덕분에 기분 좋은 일요일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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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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