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뉴스레터를 쓰는 일과는 보통 목요일까지 초안을 쓰고, 부기장님과 글을 주고받으며 발송일인 일요일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일정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번 주는 유독 일이 바빴던 탓인지 도통 글을 쓸 시간이 나지 않더군요. 마감일인 목요일이 되도록 주제조차 잡지 못해 마음만 조급해졌습니다.
문득 뉴스레터를 처음 시작할 때 '지금 이 순간의 내 생각을 그대로 나누자'고 했던 다짐이 떠올랐습니다. 거창한 메시지를 찾으려 욕심내기보다, 차라리 한 주 동안 제게 있었던 일과 감정들을 솔직하게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지난주 저는 오랜만에 고향인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저희 집은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 대신, 일 년에 딱 한 번 석가탄신일에 온 가족이 산소로 향하는 묘제가 있거든요. 겸사겸사 부산에 내려간 김에 '2026 LOOP LAB BUSAN'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도모헌과 뮤지엄 원을 찾았습니다.
옛 부산시장 관사였다는 도모헌은 참 예쁘더군요. 창밖으로 펼쳐진 기가 막힌 풍경을 보며, 예전에는 권력을 가진 이들만 이런 뷰를 독점했다는 생각에 심술궂은 심통이 슬그머니 피어오르기도 했습니다. 내친김에 부산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정작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영화의 전당으로 큰맘 먹고 발길을 옮깁니다. 하필 맥주 축제 기간이라 행사 준비물들로 가려진 덕분에 건물의 온전한 형태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이번 행사 중 유일한 유료 전시라는 곳을 찾아갔지만, 결과는 큰 실망이었습니다. 아무리 난해한 현대미술이라지만 작품의 해설을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전시는 제 취향이 아니니까요. 평소 영상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의미를 알 수 없는 AI 영상들이 반복되는 모니터들 사이에서 전시실 내부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덥기만 했습니다.
이제 살았던 세월과 떠나온 세월이 비슷해져서 인지, 내가 자란 고향인데도 이제는 고향이라 말할 수 없을거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 마음을 안고 다음 날은 동생이 운영하는 거제의 카페로 향했습니다. 거제 시내에서도 차를 타고 꼬박 4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한적한 곳이었지만, 노란 금계국이 흐드러지게 핀 마당에서 조카들과 신나게 뛰어놀다 보니 비로소 마음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복잡한 생각 없이 그저 웃을 수 있는, 이번 여정 중 가장 편안했던 시간이 지나고 숙제 같은 날이 왔습니다.
드디어 묘제 당일. 사실 1분 1초라도 자식들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애틋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오랜 이동으로 쌓인 피로, 그리고 사위나 며느리 같은 새로운 가족들이 늘어나며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과 눈치 싸움 속에서, 저는 결국 서둘러 헤어짐을 강요하고야 맙니다. 마음의 불편함이나 어색함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리는, 아주 익숙한 회피 방식을 쓰면서 말이죠. 그렇게 도망치듯 서둘러 인사를 드린 후,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역으로 향합니다.
기차 출발까지 시간이 좀 남았기에 작년에 들렀던 역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침 그날이 함안 낙화축제가 열리는 날이라 주변은 온통 인파로 북적북적하더군요.
북새통 속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으니,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늘 찾아오던 해묵은 후회가 다시 밀려왔습니다. '그때의 나는 왜 조금 더 다정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 머리로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현실의 어색함 앞에서는 자꾸만 도망쳐버리는 나약한 나를 마주합니다.

문득 나이를 이만큼 먹었을 뿐, 어릴 적 내가 상상했던 '단단하고 유연한 어른'은 영원히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불편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고, 주변을 넉넉하게 품어주며, 관계의 어색함 정도는 가볍게 넘길 줄 아는 멋진 어른 말이죠.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세월이 흘러도, 내 안의 알맹이는 여전히 서툴고 유약해서 자꾸만 회피할 궁리부터 합니다.
설명 없는 현대미술 전시관처럼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리고 여전히 애매하고 서툰 관계들 속에서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생각보다 고단한 일입니다. 함안 낙화축제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는 어른은 되지 못하더라도,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내 안의 서투름을 조용히 인정해 봅니다.
완벽한 어른이 되지 못해 자책하는 밤을 보내고 계실 당신에게, 오늘만큼은 우리 안의 서툰 아이를 탓하지 말자는 위로를 건네고 싶습니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 창밖으로 밤이 깊어갑니다.
이번 한 주, 당신의 항로는 어떤 서툰 발걸음들로 채워지셨나요?
🎙️ 부기장의 한마디
기장님과 여행을 가면 보통 진한 기억이 하나 둘 남습니다. 이번에는 그 비쌌던 현대미술 전시가 마음에 꽤 남네요. 얼마 전 큐레이터를 흉내 낸 어떤 희극인의 모사처럼 현대미술은 그냥 이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상이 무엇이 됐든 걸어두고 그저 스토리를 만드는 일이죠. 그 전시도 그랬습니다. 과거에 패션지에서의 글톤을 보그체라며 조롱한 적이 있는데 요즘은 ‘전시서문체’라고 한다죠? 그 전시서문체들이 어렵사리 전시의 스토리와 권위를 부여하는 가여움. 그게 보는 이를 스스로 부끄럽게 해서 가뜩이나 성난 초여름의 날씨가 더 덥게 느껴졌습니다. 5월의 여행이지만 많이 더웠네요. 몸도 마음도.
🔭 보란더의 시선
원고에 나온 '2026 LOOP LAB BUSAN' 행사는 도모헌, 뮤지엄 원 등 부산의 상징적인 공간들을 연결하는 문화 프로젝트입니다. 영화의 전당처럼 때로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아쉬울 수도, 해설 없는 현대미술에 당황할 수도 있지만, 공간 그 자체를 둘러보는 재미는 분명히 있습니다. 혹시 주말에 부산을 찾을 계획이 있다면 가볍게 동선에 넣어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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