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본 조카를 온종일 졸졸 따라다니는 고모에게, 조카는 맑은 눈으로 물었습니다.
“내가 좋아요?”
한참을 같이 놀다가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어 “다음에 또 만나자” 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조카가 말했습니다.
“그럼 나 한 번 안아주고 가.”
헤어지고 돌아서는 길에도 그 말 한마디들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이들의 말은 참 단순합니다. 그 말에 어떤 의미가 더 있는지, 내가 어떻게 보일지 굳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저렇게 마음을 그대로 담아 표현해 본 게 언제였을까.

어릴 적 저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그날 있던 일들을 엄마에게 재잘거리며 털어놓을 만큼 말이 많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가급적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 합니다. 말 한마디로 나라는 사람이 쉽게 읽히는 게 싫어진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사투리를 고치기 전까지 말 한마디 한마디를 유난히 조심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이나 부족함을 괜히 말로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한몫했을 테고요.
말을 아끼는 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괜한 오해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고, 내 마음을 쉽게 들키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데 가끔은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말을 아끼는 사이, 정작 건네고 싶었던 마음까지 함께 아껴두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평소 길을 걷거나 대중교통을 탈 때 사람들의 대화나 인상 깊은 말 한마디를 메모해두기도 합니다. 어린이날에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면서도 게임에서 눈을 떼지 않던 초등학생과, 그 뒤에서 엄마가 나지막이 던진 한마디가 기억에 남아 블로그에 적어둔 적이 있습니다.
“너 어린이날 한번 맞아볼래?”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말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짧은 한마디가 상황을 단번에 바꾸기도 하고,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하니까요. 돌이켜보면 제가 기억하고 있는 말들은 대부분 대단한 것이 아닌 누군가 무심코 건넨 한마디, 오래전 들었던 다정한 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온 농담 같은 것들입니다.
요즘도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 괜히 말했다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말이 줄어든 데에는 어쩌면 이런 생각들이 조금씩 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카들의 말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동안 하지 않았던 몇 가지 말들이 떠올랐네요.
여러분도 문득 떠오르는, 아직 하지 않은 말들이 있나요?

🎙️부기장의 한마디
기장님과 반대로 저는 말이 좀 많습니다.
말을 하기 조금 늦은 나이인 4살에 처음 말을 시작했다고 하니 아마 그 때 모자란 말을 지금 다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서 요즘 많이 느끼는 건, 말이라는 게 생각의 1/10도 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하일 수도 있고요. 말이라는 것 자체는 매우 섬세해서 인간에게 말이 탄생한 이래로 무수한 시간동안 많은 것들을 담아내 왔지만 대명사처럼 자주 쓰이는 몇몇 말은 오히려 내 안의 다양한 감정을 너무 쉽게 하나로 뭉뚱그려 버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짜증나"라는 말은 너무 많은 상황과 다양한 감정을 너무 쉽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기도 하죠. 덥거나, 춥거나, 슬프거나, 화날때, 사람 관계가 힘들 때도, 그냥 짜증나 버리는 것처럼요.
요즘 저도 말을 조심히 하려고 합니다. 말이 지금의 나를 정의해 버리기도 하니까요.
보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좋은 태도를 말과 함께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촌철살인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도 있지만, 요즘은 "촌철다정". 작은 말의 다정함이 좀 더 의미 있지 않나 생각돼서요!
🔭 보란더의 시선
말 많은 부기장님 덕분에 저는 가끔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경험을 하곤 합니다. (ㅎㅎ)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부기장님의 말은 대부분 일에 대한 것이거나 사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코 개인적인 감정이나 사적인 푸념으로 제 귀를 피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반면 저는 부기장님보다 훨씬 감정적인 말과 생각들이 많은 사람입니다. 오롯이 제 고민의 화살표가 내면으로 향해있는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서 번지는 이 복잡하고 세밀한 감정들을 말이라는 그릇에 담으려니, 부기장님의 말처럼 생각의 1/10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기분이 들더군요. 어쩌면 제 마음을 완벽하게 담아낼 단어를 찾지 못해, 차라리 입을 닫아버리는 편을 택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말을 아끼거나, 혹은 더 많은 말을 내뱉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말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고, 어떤 마음은 단어를 찾지 못해 조용히 내 안에 머물기도 합니다. 비록 말이 내 마음의 아주 작은 조각밖에 담아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늘만큼은 너무 완벽하게 전달하려 애쓰지 말고 가벼운 마음 한 자락 꺼내어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 '보란더' 구독하기 : https://maily.so/volander
📧 '보란더' 관련문의 : rrpptkd@naver.com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