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떠받치는 3가지 기둥

마음만 청춘이라고 해서 그게 청춘인 것은 아니다.

2025.07.08 | 조회 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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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벤자민

브런치북 <서른의 나는 세살의 나를 불러본다> 연재중

젊음을 말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단어

  '청춘', 젊음을 가리키지만 그 어떤 단어보다도 올드하다. 청춘이 젊음을 뜻하는 단어이기에 젋은 세대는 자신의 단어인줄 알았다. 사실은 아니다. 도전, 열정, 자유로 점철된 청춘의 개념은 1980년대에 만들어져 이어오고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청춘을 온전히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낡은 단어이다.

  그렇다면 지금 청춘의 모습은 과거와 어떻게 다를까. 현재 젊은이의 80%는 대학생이다. 반면, 1980년대 까지만해도 대학생 비율은 30%에 불과했다. 청춘을 논할 때 흔히 이 부분이 간과된다. 그 시절 젊은이들은 대부분 일터에 있었다. 청춘을 누릴 새도 없이 노동에 뛰어들었다. (* 정지우 <청춘인문학> 참고)

  즉, 청춘담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과거의 대학생들에게는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70%가 있었다. 그외 소수만 청춘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청춘의 개념이 오늘날 대부분의 청년들에게 확대 적용되면서 이미지와 현실간의 간극이 심각하게 벌어졌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청춘은 나 혼자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청춘이냐 아니냐는 단순한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청춘을 지탱하는 데에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토대가 필요하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 부모님께 청춘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 아버지께선 언제부터 '내가 더이상 청춘이 아니구나'하고 느끼셨어요?"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빠는 아직도 청춘 같은걸."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거야 당신이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청춘이란 무엇인가, 복잡다단한 이 질문에 대해 의외로 정말 간단한 답을 깨달았다. 청춘이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이다. 현실에 옭아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 철근도 씹어먹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건강 상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공교롭게도 인간의 생애주기상, 보통 20대 초중반에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가 주어진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아직 부모님을 부양할 필요도 없고 키워야 할 아이도 없다. 몸은 여전히 성장 중이며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 없다. 세계일주, 해외 살이, 창업 등 가장 크고 무모한 꿈도 품을 수 있다.

 

청춘을 떠받치는 3가지 기둥

  청춘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 가족, 그리고 개인의 노력이 맞물릴 때 비로소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가 완성된다. 내 청춘을 지탱했던 세 가지 기둥을 돌아보려 한다.

  첫째, 사회적 버팀목.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혜택이 많다. 장학금과 대외활동, 기타 정책 등이 청년을 위해 마련되어있다. 또한 학교에서 인턴십이나 교육, 해외 연수 기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한다. 이 모든 사회적 지원은 청춘이 청춘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현실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둘째, 가족의 지지.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경제적 지원과 정신적 지지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부족함 없는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대학 등록금과 주거비, 약간의 생활비 까지 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건 정신적 지지이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인턴의 채용전환을 마다하고 해외 교환학생을 떠났다. 이 선택의 배경에는 나의 의지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지지도 크게 작용했다. 부모님께서 경제적,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준 덕분에, 나의 청춘은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셋째, 나 자신의 의지. 무엇보다도 나는 스스로 이 젊은 날을 잘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학교 과제나 취업 준비 활동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해외로 나가 새로운 세계를 보고, 책을 읽고, 강연을 하는 등 세상을 넒히고 마음을 깊였다. 내 청춘을 잘 살아내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개인적 노력, 가족의 응원, 사회의 뒷받침이 삼박자를 이뤘다. 그 덕에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나는 왜 청춘이 사라진다고 느꼈을까

  한달 전 까지만 해도, 내 청춘을 이끌어온 건 오직 나의 의지 덕분이라고 믿었다. 오만했다. '내 마음은 그대로인데, 왜 이렇게 청춘이 멀어지는 기분이지?'라며 혼자 고민했다. 이제서야 깨달았다. 내 마음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을지 몰라도, 사회와 부모의 지원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대학생으로서 누리고 있던 지원이 끊겼다. 취업을 하며 부모님의 경제적 울타리도 벗어났다. 특정 나이가 지나면 국가에서도 나를 더이상 청년으로 봐주지 않는다. 사회도 부모도 더이상 나를 '청춘의 주인공'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내안의 열정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그 불씨만으로 청춘의 불꽃을 활활 태우기에는 부족하다. 서서히 그 작은 불씨마저 꺼져가고 있다. 그 쓸쓸한 마음을 지난 뉴스레터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그래, 이제 알겠다. 청춘이란 마음가짐만으로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청춘은 이어진다

  그런데, 같은 시기. 오히려 청춘을 되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부모님과의 대화로 돌아가보자.

  "어머니 아버지께선 언제부터 '내가 더이상 청춘이 아니구나'하고 느끼셨어요?"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빠는 아직도 청춘 같은걸."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거야 당신이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진지한 질문이 농담처럼 흘러가 아쉬웠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내 표정을 고치고 말을 이어가셨다.

  "결혼하고, 너를 낳고 키우면서… 그때부터 엄마의 삶은 사라졌던 것 같아. 그때 나도 20대였으니,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겠니. 근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다보니, 그때의 나는 없어졌어."  

  역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청춘은 끝나는 건가. (밴드 산울림의 김창완도 아이의 돌잔치를 하던 날, 불현듯 '아, 내 청춘도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때 탄생한 곡이 <청춘>이다.) 그렇게 단순히 이해하려던 순간,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마치 긴 터널 속에 있는 느낌이었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주 깜깜한 터널. 근데 결국 끝은 오더라. 아들인 네가 다 크고 어른이 되어 제 몫을 할 때쯤, 그때서야 엄마도 내 삶을 찾았어. 지금의 엄마는 정말 즐겁고 행복해. 20대에 잠시 두고 온 나를, 50대가 돼서 다시 만난 기분이야."

  그제서야 알았다. 내가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에서 독립하면서 내 청춘이 멀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부모님은 자신들의 청춘을 천천히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청춘은 결코 영원히 잃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기'는 단순히 20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때로는 멈추고, 돌아서고, 잠시 잃어버릴 수 있어도 결국 언젠가 다시 되찾을 수 있다. 20대의 청춘을 50대에 이어 갈 수 있다. 내가 내 안의 마음을 소중히 잘 간직하고 있다면 말이다. 청춘은 그렇게 돌아오는 것이다.

 

영원한 청춘을 좇는 사람들

  영원히 청춘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그리고 요즘 그런 욕망이 주변에서 많이 보인다.

  결혼을 미루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고,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물론 그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경제적인 현실 때문일 수도 있고, 사회적 시스템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공통된 두려움 하나가 선명히 보인다. 어른이 되는 순간, 청춘의 막이 내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자신이 살던 그 자유롭고 충만했던 시간들이 끝나버릴것 같은 불안감. 그래서 청춘을 벗어던지고 한 발짝 내딛는 걸 주저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나도 그랬다. 약 5년 전, 세상이 요구하는 어른의 삶을 마주했을 때 무척 겁이 났다. 어머니 앞에서 밥상을 앞에 두고 너무나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취업을 해야 하고,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하고,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평범하게 늙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버거웠다.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영원히 쳇바퀴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기를, 그 어쩔 수 없는 흐름에 편입되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불현듯 진시황과 불로초 이야기가 떠올랐다. 진시황은 기원전 중국을 통일한 황제이다. 권력의 정점에 올랐으나, 그는 늙음과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 두려움은 점차 집착으로 변해갔다. 젊음과 청춘을 영원히 붙잡아 두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지배했다.

  그는 영원한 젊음을 줄 수 있다는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동쪽 바다로 떠났다. 하지만 불로초도 영원한 젊음도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진시황도 결국 죽었다. 그의 청춘과 제국도 그렇게 끝났다. 수많은 희생과 허망함만이 역사의 구석에 덩그러니 남았다.

  이 이야기가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불로초를 좇고 있다. 청춘을 잃지 않기 위해 어른의 삶을 외면한 채 머물러 있으려 한다. 마치 그 자리에 멈춰서기만 하면 시간도 멈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청춘도 삶도 시간도 흐른다.

 

떠나보낼 용기, 돌아온다는 믿음

  청춘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청춘은 어느 날 불쑥 주어질 뿐이고, 때가 되면 스르르 빠져나간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청춘에게는 역설적으로 청춘을 놓아줄 수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사실을 나는 부모님을 보며 배웠다. 부모는 자신의 청춘을 보내주고, 아이는 그 덕에 청춘을 누린다. 그리고 부모는 언젠가 아이를 통해 또 다른 모습의 청춘을 다시 맞이한다. 나도 그 순환 속에 있다.

  더는 청춘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청춘의 끝을 아쉬워하기보다, 그 이후의 시간을 더 깊이 살아낼 것이다. 학창시절을 마무리하고 스무 살을 맞이 했을 때처럼, 이제 청춘이 끝나감을 담담히 인정하고 그 다음의 삶을 두 팔 벌려 맞이할 것이다. 그래, 와라. 내가 떠나보낸 청춘이 다시 돌아오는 그날까지, 나는 이 삶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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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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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아의 프로필 이미지

    경아

    1
    5 months 전

    요즘 제 자신의 담론으로 가지고 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셔서, 글을 읽으며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엄청납니다! 한편으로는 대개 청춘을 미래에 의탁하며 보내 버리는데 그래서인지 '지나고보니 청춘이더라' 같은 감상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 이게 씁쓸하게 다가올까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흘러가는 청춘 잠시 붙잡아 둔 것같은 기분을 느꼈네요 ^^

    ㄴ 답글 (1)
  • Camila의 프로필 이미지

    Camila

    0
    5 months 전

    The fear of aging often prevents us from living our lives. We're not really as young as we once were, but I believe youth isn't just about age, but about being joyful, happy, and having a youthful spirit. Your thoughts are excellent; another lesson learned.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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