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벤자민] 수채화는 망할 수가 없어

당신의 삶이 망한 것 같을 때, 수채화를 떠올려보세요. 망할 수 없는 그림처럼, 망할 수 없는 삶이니까요.

2025.06.03 |
주간 벤자민의 프로필 이미지

주간 벤자민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한 사람의 자전적 기록

  초여름의 주말, 여자친구와 뚝섬 한강공원에 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늘진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과 의자를 펴고, 다이소에서 사온 미술 도구들을 늘여뜨려 놓았다. 20색 고체 물감 팔레트, 5종 붓, 종이컵에 담긴 물까지 준비되었다. 우리만의 작은 사생대회가 시작되었다.

  한창 그림을 그리던 중, 그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 망한 것 같아.." 나는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수채화는 망할 수가 없어."

 

수채화는 망할 수가 없다

  정말 오랜만에 잡아보는 붓이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어릴적 나는 그림을 참 못 그렸다. 특히 수채화는 더 어려웠다. 그림이란 놈은 항상 내가 상상한 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금방 싫증을 내고 포기했다. 그 기억이 떠올랐지만, 이번엔 조금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스케치는 대충 했다. 하늘, 나무, 강 구역만 나누고 바로 붓질을 시작했다. '구름이 섞인 하늘이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원하는 하늘 색을 상상하며 물감을 섞어봤지만 그 색이 나오지 않았다.

  '에잇, 그냥 칠하자.' 내가 의도하지 않은 연한 하늘색이 종이를 적셨다. 그리고 그 위에 다른 하늘색을 덧입혔다. 완벽한 색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색을 덧대고 겹쳤다. 그렇게 쌓아올린 하늘은 처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하늘다워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수채화는 망할 수가 없구나.'

 

수채화를 망치는 법

  그렇다면 나는 왜 어릴적 그토록 많은 수채화를 망쳤을까?

  첫째로, 완벽한 색을 찾으려고 했다. 어릴적 나는 컴퓨터처럼 정확한 RGB 값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물감은 다르다. 20가지 색만을 가지고 어림짐작으로 섞어보는 수 밖에 없다. 완벽한 색을 찾기보다 '지금 쓸 수 있는 색'을 덧대는 게 낫다.

  둘째로, 경계선을 정확히 긋고 싶어 했다. 자연은 경계가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도, 하늘과 강 사이도 흐릿하다. 번지는 물감처럼, 자연도 그렇게 어우러진다. 색의 경계를 조절하려 애쓰기보다, 번짐을 받아들이고 물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더 수채화스럽다.

  셋째로, 실수를 지우려고 했다. 수채화에는 '되돌리기'가 없다. 그걸 억지로 지우려 하면 결국 도화지가 찢어지고 만다. 실수로 튄 붉은 물감도 나무에 있으면 열매가 되고, 강에 있으면 물고기가 된다. 수채화는 실수를 지우는 그림이 아니라, 실수를 품는 그림이다.

 

인생은 망할 수가 없다

  삶도 그렇다. 처음부터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는다. 명확한 경계를 그으려 하면 번번이 어긋난다. 오점을 지우려 하면 오히려 더 엉망이 되곤 한다.

  반대로 완벽주의를 버리면 삶은 본래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걸 알게 된다. 경계를 허물면 세상은 더 부드럽게 다가온다. 오점을 끌어안으면, 그것은 또 하나의 무늬가 된다.

  우리의 삶은 그저 덧대어지고 번져갈 뿐이다. 물감이 종이 위에 스며들 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삶을 그릴 때에도 수채화처럼 살아가면 된다.

첨부 이미지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주간 벤자민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주간 벤자민의 프로필 이미지

    주간 벤자민

    0
    18 day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2025 주간 벤자민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한 사람의 자전적 기록

뉴스레터 문의benjamin.sm.byeon@gmail.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뉴스레터 광고 문의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