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The Great Escape to Great Britain] Vol. 4 낯선 혐오, 그리고 더 낯선 다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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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효는 딱 일주일
"이거 봤으니까 됐다. 이제 런던 가서 갇혀 있어도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세븐시스터즈의 절벽 위 우리가 청춘드라마 마냥 했던 고백.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그 웅장한 대자연이 준 마음의 백신의 유통기한은 고작 일주일이었다. 지루한 격리 생활이 반복되자, 잠재워뒀던 역마살이 또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을 때쯤,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아이슬란드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인연, 바로 학교 후배였다.
"오빠! 바스(Bath)로 놀러 와! 나 이제 곧 한국 들어가잖아. 여긴 정말 평화롭고 예뻐!"
오로라를 찾아 밤을 지새우며 끈끈해진 그녀의 마지막 초대. 게다가 바스는 런던보다 훨씬 조용하고 안전하다는 달콤한 유혹. 우리는 "그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를 외치며 짐을 쌌다. 이번에는 옆 게스트하우스 친구들까지 모아 판을 키웠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찾아 떠나는 법. 나는 이 끔찍한 세계 비상사태 속에서 어느새 여행이 여행을 낳는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몰랐지, 10년 전의 악몽을 소환할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Go back home, Chinese!"
영국의 대표적인 요양 도시이자, 로마 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도시 바스.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고풍스럽고 차분했다. 여행객에 치이며 걸어야할 거리는 요양 도시라는 바스의 다른 이름처럼 조용했다.



우리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익숙한 햄버거 가게 파이브 가이즈를 찾았다. 실내 취식이 금지된 탓에, 포장(To-go) 주문을 하고 가게 밖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나이 든 여성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술인지 약인지 모를 것에 취해 풀린 눈으로 우리 여섯 명을 훑어보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다짜고짜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Hey! Go back to your home, f**ing Chinese! You spread the virus!"
(야! 너네 나라로 꺼져, 짱개들아! 바이러스 퍼뜨리지 말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2020년의 바스가 아닌, 2009년의 런던으로 소환된 기분이었다. 나에게 화풀이하던 집주인, 길에서 나를 보며 코를 막던 사람들. 투명 인간 취급하던 점원들.
'아, 역시 영국은 변하지 않았구나'.
수치심과 공포가 발목을 잡았다. 우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위협적으로 우리 코앞까지 다가왔다.
버거봉투를 든 기사들 (Knights with Burgers)
그녀가 우리를 밀치려던 찰나였다. 지나가던 건장한 영국인 남성 두 명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주저 없이 우리와 취객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고 섰다.
재밌는 건, 그들의 한 손에는 방금 산 햄버거 봉투가 들려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소중한 햄버거를 든 손을 벌린채, 온몸으로 그녀를 밀어내며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Stop it. That is very rude." (그만해요. 당신, 지금 굉장히 무례해.)
"That is racism. Leave them alone." (이거 인종차별이야. 이 사람들을 내버려 둬.)
여자가 악을 쓰며 달려들려 하자, 그들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거대한 방패처럼 버텼다. 마치 성벽같은 그들의 등 뒤에서, 우리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결국 기세에 눌린 여자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고, 이내 욕설을 중얼거리며 사라졌다.
그녀가 틀린 거야
상황이 정리되자, 두 남자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우리도 혼나지 않을까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Are you okay?"
"Don't mind her, she's in the wrong. She doesn't know what she's talking about."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여자가 틀린 거예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Don't let it ruin your meal. Enjoy your burgers."
(신경 쓰지 말고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들은 쿨하게 눈인사를 남기고, 식기 전에 햄버거를 먹어야겠다는 듯 서둘러 갈 길을 갔다.

낯선, 그리고 낯선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2009년, 그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그 차가운 거리에서, 나는 늘 혼자였고 도망쳐야 했다. 그래서 영국은 나에게 두려움 그리고 낯섦 그 자체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오늘, 낯선 이들이 나를 위해 대신 싸워주었다. 한 손엔 햄버거를 든 채, 아주 우아하고 품위 있게. 그들이 막아선 것은 단순한 주정뱅이가 아니었다. 내 마음속 깊이 박혀 있던 피해 의식 내지는 트라우마라 불릴만한 것들로부터 막아준 것일지도.
"형, 괜찮아?"
함께 간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멍 때리던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받아 든 햄버거 봉지. 우리는 서로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햄버거는 여전히 따뜻했고, 내 마음 속에도 무언가 따뜻한 것이 뭉근하게 올라옴이 느껴졌다. 10년 묵은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있었음을. 낯선 사람으로부터 받아, 다시 낯선 사람으로 인해.
(4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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