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The Great Escape to Great Britain] Vol. 5 소용돌이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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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물결, 풀트니 다리(Pulteney Bridge)
소란스러웠던 파이브 가이즈 앞을 떠나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풀트니 다리였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신념이 무너진 자베르 경감이 몸을 던졌던 바로 그 장소.
실제로 마주한 강물은 생각보다 훨씬 세차게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층층이 계단을 타고 부서지는 하얀 물살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 겪었던 불쾌한 소음들이 그 거센 물결에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극적인 영화의 배경이었던 이곳이,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는 혐오의 잔상을 털어버리는 정화의 장소가 된 셈. 우리는 그 물결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비로소 긴장을 풀고 웃기 시작했다.

로얄 크레센트, 자유의 경계
발길을 옮겨 도착한 곳은 바스의 상징, 로얄 크레센트였다.
이름 그대로 거대한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고풍스러운 대저택들과 그 앞으로 펼쳐진 광활한 초록 잔디. 우리는 그 잔디밭 한 가운데에 털썩하고 앉았다.미미한 온기가 남은 햄버거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카메라를 든 채.

우리는 그곳에서 이른바 인생샷을 남기며 한참을 떠들었다. 거리를 두고 앉은 사람들도 떠들썩하던 세상에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달콤하게 애정을 나누는 연인들, 뛰어노는 아이들과 웃음 짓는 부모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내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가 당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했을 것이다. 런던의 좁은 방에서 마주하던 벽지 대신, 초승달이 품은 푸른 잔디와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곳에서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해방감.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다시 일상의 감각을 되찾았다는 안도감만이 혀 끝에 더 강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자유는 자신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라 생각했는지, 근처를 지나던 한 노인이 애꿎은 우리에게만 다가와 날 선 목소리로 뱉었다.
"어디서 왔나? 모여 있지 말고 얼른 집으로들 가게."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바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후배가 당황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 어디에 사는 주민임을 차분하게 설명했고, 노인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무안해하며 자리를 떴다. 낯선 이에 대한 배타성을 우아하게 돌파해내곤, 후배는 뿌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곧 웃음을 되찾았다.


이름 모를 언덕
바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후배의 안내로 오른 이름 모를 언덕. 바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녀가 즐겨 찾는다던 그곳은, 바스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비밀 장소라고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높아서 언덕을 오르는 동안 숨은 가빴지만, 정상에 다다랐을 때 마주한 광경은 우리를 다시 한 번 탄성짓게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노을이 바스의 고풍스러운 모래벽돌 건물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보석함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그 노을을 배경으로 말없이 바스를 내려다보았다.
2009년의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 나라는, 2020년의 나에게 이토록 찬란한 금빛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토록 아프던 상처 그 흉터 위로, 바스의 노을이 내 곁에 있는 이들의 온기와 함께 겹겹이 덧칠해지고 있었다.



무엇이 멈춰 세워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언덕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바이러스를 피해 떠난 탈출 여행들이 사실은 이러한 팬데믹이라는 국제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우리의 삶, 그 끈질긴 생명력을 확인하는 여정이었다고.

잔디밭의 화기애애하던 커플들과 가족들, 햄버거를 든 채 우리를 지켜준 낯선 신사들, 혐오를 뱉는 사람들 조차도 모두 각자의 리듬으로 삶을 견뎌내고 있었다. 재난은 우리의 발을 묶어두었지만, 인간 본연이 가진 평화와 생동감까지는 멈춰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나는 생각한다. 여전히 마스크를 통해 숨을 쉬고 마스크 너머로 대화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목격한 그 끈질긴 일상의 생명력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기꺼이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5부 마침)

휴재 공지
The Trail 애독자 여러분께,
안녕하세요 에디터. 조나단입니다.
지난 기간 동안 생각치도 못했던 애정으로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모자란 필력에도 관심으로 바라봐주신 덕분에, 매 순간 즐겁게 여행기를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 그리고 팀의 재정비와 콘텐츠 구상을 위해 잠시 쉬어가려고 합니다.
기다려 주시는 만큼 기대에 부합하는 더 좋은 콘텐츠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25년 남은 한 해 따뜻한 연말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The Trail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디터. 조나단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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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ky
풀트니 다리가 인상적이네요. 영화에서 보고 잊지 못했던 곳인데, 영화 밖의 에디터 님이 직접 가신 기록을 보니 또 새로운 기억이 됩니다. 휴재라니 아쉽습니다. 새로운 출발이 되시길 바라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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