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 내리다. 아이슬란드 행성(Melting Point: Planet Iceland)]Vol. 1 외계 행성 착륙기 - 레이캬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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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밤비행기
승객 2명, 승무원 4명
영국발 밤 비행기였다. 비수기 중의 비수기.
기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승객이라고는 나와 낯선 외국인, 단 두 명뿐이었다.
승객보다 승무원이 더 많은 기묘한 비행.
적막함에 비행기 엔진소리만 귀에서 웅웅거렸고,
텅 빈 좌석들 사이로 "커피 더 드릴까요?"라고 묻는 승무원의 목소리조차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그때 알아차려야 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계절의 아이슬란드는, 그냥 여행지가 아니라 다른 행성으로 가는 길이란 것을.

새벽 2시, 레이캬비크에 바퀴가 닿았다.
공항 리무진에서 내리자마자 뺨을 때리는 건 날카로운 눈보라였고,
길이라고 불리었던 것들은 이미 눈보라에 덮여 사라진지 오래였다.
바퀴가 헛도는 캐리어를 질질 끌며 숙소까지 걷는 골목길.
세상은 온통 하얗고, 가로등 불빛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마치 지구가 아닌 곳에 불시착한 우주인이 된 기분, 그래 딱 그 기분이었다.
아래로는 푹푹 빠지는 눈을 밟으며, 위로는 눈보라를 뚫고 숙소로 향했다.
"봉사활동 하면 오로라 보여준대"
내가 이 고생을 사서 한 이유는 딱 하나 : 오로라 헌팅(Aurora Hunting)
"이 환경 보호 워크캠프에 지원하면, 밤마다 오로라를 찾아다닌대."
친구의 그 한 마디 이야기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환경 보호라는 문구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 워크캠프는 물가 비싼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 사진을 공짜로 찍게 해주는 가성비 패키지 정도로 보였다. '사진 찍고 노는데 봉사활동 시간도 준다고? 완전 좋은데?' 이런 가벼운 마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철저히 이해타산적인 마음으로 신청한 봉사활동이었다.

우중충한 아침, 어색한 버스
다음 날 아침, 약속 장소로 나갔다. 시간은 늦은 오전이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캄캄했다.
'고위도의 겨울 아침이란... 원래 이런 것인가!' 하며 우중충한 레이캬비크 도로를 걸었다.
밤새 누가 치운건지, 불과 몇 시간 전 온통 눈에 쌓여 구분이 가지 않던 그 길들 말이다.
나는 그렇게 질척한 도로를 뚫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낯선 얼굴들이 하나둘 모였다.
프랑스, 네덜란드, 멕시코, 일본... 우리는 입김을 호호 불며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Hi...", "Cold, huh?"
누구는 방학을 즐기러, 누구는 진짜 환경을 지키러 왔겠지만, 눈곱도 떼지 못한 채 버스에 오르는 우리들의 표정은 비슷했다. 온통 눈 세상인 도시, 그리고 매서운 추위. 무슨일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외계 행성에 온 듯한 기분에 상기된 표정 말이다.
오로라가 아닌 예상치도 못한 것들이 내게 쏟아질 줄은 이때는 몰랐지.

과거로부터 온 편지
레이캬비크 언덕 위, 페를란(Perlan) 박물관.
캠프 리더는 우리를 그 거대한 돔 안으로 데려갔다.
박물관을 돌다 어떤 비석 앞에 우리를 세웠다.
묘비처럼 세워져있는 얼음 덩어리 하나.
그리고 그 아래 교훈인지, 저주인지 모를 덤덤하게 적힌 글귀.

Ok is the first Icelandic glacier to lose its status as a glacier.
('옥'은 빙하로서의 지위를 잃은 첫 번째 아이슬란드 빙하입니다.)
나는 멍하니 그 문장을 읽는다. 몇 번이고 다시.
그리고 생각한다.
오로라 사진 찍는 꿀팁이나 알려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빙하의 부고장이라니.
In the next 200 years all our glaciers are expected to follow the same path.
(향후 200년 안에 우리의 모든 빙하가 같은 길을 걸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확신에 찬 예언.
비석은 이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고,
마지막 줄에서는 오히려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 같았다.
Only you know if we did it.
(우리가 해냈는지는, 오직 당신들만 알겠지요.)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로라를 사냥하러 왔는데, 오히려 거대한 덫에 내가 걸린 기분이다.
녹아, 내리다. 아이슬란드 행성
그제야 알았다. 왜 오로라 헌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봉사단체인 워크캠프의 활동으로 포함되어 있었는지. 왜 첫 목적지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빙하가 죽음을 선고받은 기록관이었는지.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설원이 아니라, 녹아내리고 있는 거대한 전선으로. 나는 카메라를 고쳐 잡았다. 오로라 찍을 생각에 들 떠, 큰 맘먹고 들고 온 그 카메라를.
이번 여행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비행기 승객이 고작 2명이었던 것부터가 복선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저자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워크캠프 해당 활동 소개 가장 처음부터 "환경 보호에 관한 위험성을 자각하고 토론하며, 자국으로 돌아가 알린다." 라고 떡하니 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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