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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없어!
스페인에는 아주 오래된 격언이 하나 있다고 한다.
"Quien no ha visto Sevilla, no ha visto maravilla."
— 세비야를 보지 못한 자, 기적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예술의 창고, 마드리드에서 나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No hay virus (바이러스는 없어)"라고 호언장담하며 깔깔 거리는 사람들과 뜨거운 태양. 하지만 나는 그 자유에 안주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기적(Maravilla)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저 문장 하나가 나를 세비야로 이끌었다.
나는 축제처럼 쏟아지는 소음과 색채, 그리고 기적을 기대하며 세비야행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도착과 동시에 세상의 스위치가 꺼졌다.
'Estado de Alarma — 국가비상사태' 한국으로 치면 계엄령이 선포됐다.
(내 인생의 첫 계엄이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

도착한 날을 마지막으로, 타파스를 먹으며 샹그리아 잔을 부딪치던 바(Bar)들은 문을 걸어 잠갔다. 아이들이 뛰놀던 광장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북적이던 거리에는 적막만이 깔렸다.
기적을 기대하며 보러 왔건만, 나는 숙소라는 감옥에 갇혀버렸다.

테라스에 앉아 지역 신문을 읽으며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려던 내 계획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우리는 다른 스페인 주민의 조언을 듣고는 문 닫은 카페의 셔터를 두드렸다.

우리를 가둔 도시가 선물한 가장 아름다운 봄
(쿵쿵쿵!)
"라떼 2개, 룽고 하나"
어설픈 스페인어로 외쳤다.
잠시 후 셔터가 빼꼼하고 열렸다. 두리번 한 번 주변을 훓기를 마친 주인장이 커피를 내밀었다.
마치 밀거래를 하듯 손에 쥐어진 라떼 한 잔.
카페에 앉을 수는 없었지만, 뒷골목에 서서 마신 그 라떼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도 야속할 정도로 예쁜 라떼 아트 - 숨 죽이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한 잔의 정성


그 거품 위에서 나는 무너진 일상이 아닌, 여전히 따뜻한 세비야의 숨결을 마셨다.
잠깐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공기속에는 삼엄한 경비도 막을 수 없는 오렌지와 라임 아카시아, 그리고 온갖 꽃향기들이 세비야의 온기와 함께 우리를 충만하게 감쌌다.



우리는 게스트하우스 옥상으로 도망쳤다. 갇혀있다는 공포는 오히려 우리를 끈끈하게 만들었다. 주인장은 남은 술을 원가에 풀었고, 우리는 음악을 틀고 밤새 춤을 췄다. 식료품이 떨어지면 '메르까도(슈퍼마켓) 원정대'가 출동했다.
이 빠지듯 듬성듬성 비어있는 진열대.
우리는 레시피에 맞춰 재료를 고르는 사치를 부릴 수 없었다.
남은 재료를 보고 맞는 레시피를 생각해내는, 기상천외한 세계 음식 요리 대회가 매일 밤 열렸다.

두렵다며 떠난 이들도 있었지만, 남겨진 우리는 서로에게 전우였다.
밖은 차갑게 얼어붙었지만, 우리의 밤은 그 어느 축제보다 뜨겁고 소란스러웠다.
이 뜨거움이 결국 우리가 사고를 치고야 말게 하는 장본인이었으리라.
(세비야를 못 본 자, 기적을 보지 못한 것이다 1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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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W
코로나때 해외라는 특별한 추억은 죽기전까지 잊지 못할 추억이 될것 같네요. 제한되고 닫혔을때 보이는 것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화이트크로우
말도 안되는 광경들이었습니다. 사실 제한되는 것이 더 많았지만, 그 제한으로 인해서 평소 관광객으로 인해 온전히 느낄 수 없었던 현장의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최대 매력이었던 것 같아요. 향수를 많이 뿌리는 유럽 사람들 특성상 사람이 많으면 온갖냄새가 섞여 도시 자체의 고유의 향은 맡기 어려웠을텐데, 문 밖을 나오자마자 오렌지, 라임, 아카시아 향기들이 공기를 가득채우고 제 코끝을 선점하기 위해 아우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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