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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 너머로

신이 허락한 하루

2025.12.22 | 조회 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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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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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The Great Escape to Great Britain] Vol. 3 비밀의 문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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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의 향연 그리고 예언

우리가 올라탄 기차는 영국의 시골을 달리는 서던 레일웨이(Southern Railway).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쨍한 하늘, 바람에 물결치는 초록 들판, 중간중간 나타나는 노란 꽃밭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기차의 도색과 풍경이 하나가 된 듯한, 원색의 향연.

 

숨 가빴던 달리기가 끝나자, 객실 안에는 안도감과 평화가 찾아왔다.

 

그 때, 표를 검사하러 온 차장이 우리 행색을 보더니 물었다.

 

"어디들 가나? 이 시국에?"

"시포드요! 절벽 보러 가요. 세븐 시스터즈!"

 

멀쑥한 키의 그는 허리를 숙여 창밖의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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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억세게 좋군."

"네?"

 

"원래 저 자매들(Seven Sisters) 성격이 보통이 아니거든. 일 년 365일 중에 300일은 바람 불고 비 오고 난리도 아니야. 그 중에서도 저렇게 얌전하고 예쁜 얼굴을 보여주는 날은 일 년에 딱 10일 정도밖에 안 돼."

 

그는 윙크를 날리며 덧붙였다.

"오늘이 바로 그 10일 중 하루야. 즐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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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탑

시포드 역은 고요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작은 해안가 마을.

우리는 브라이튼 안내소 직원이 알려준 뒷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 마트다! 마트다!"

얼마 가지 않아, 앞서 가던 일행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물론 처음 우리 계획 속에는 마트도 있었고,
달걀 재고까지 확인한 뒤였지만, 버스가 끊기는 바람에 이미 물거품이 된 상태였다.

 

어찌저찌 여기 까지 온 게 어디야라고 기특해하며,
마트따위는 바라지도 않고 있던 우리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대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선 우리는, 입구에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달걀이다...!"

 

런던에서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달걀이, 아니 달걀탑이 매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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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런던의 진열대만 보다가 이 풍요로움을 마주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홀린 듯이 쇼핑을 시작했다. 닭다리 튀김,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종이 박스에 담긴 갓 만든 음식들까지. 짐이 될까 봐 달걀은 "돌아오는 길에 사자"며 내려놓았지만, 양손 가득 들린 음식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달까.

 

 

365일 중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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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즈음 걸었을까? 마을을 벗어나고 탁 트인 해안가 산책로가 이어졌다. 구글맵의 파란 점은 확실하게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었기에 의심은 없었다. 다만, 과연 이 평범한 산책로가 우리가 알던 그 웅장한 절벽으로 이어질지 상상하기 어려웠을 뿐.

 

바닷가에서 아빠와 숨바꼭질 하며 놀고 있던 아이
바닷가에서 아빠와 숨바꼭질 하며 놀고 있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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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가 꽂혀있었다
생화가 꽂혀있었다

 

관광객이 없어 닫힌 형형색색의 나무집(음식점들을 위한 공간 같았다)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위 영문도 모르는 표정의 갈매기들이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랜만의 햇살, 살랑살랑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 그리고 성공해냈다는 묘한 해방감. 걷는 내내 우리는 이미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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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덕(Seaford Head)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상상했던 그림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깨달았다.

 

가장 완벽한 각도

마지막 언덕을 넘어서자 시야가 폭발하듯 터졌다.
우리는 동시에 떼던 발을 멈췄다. 탄성조차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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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바다 건너편, 거대한 하얀 병풍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의 원래 계획대로 갔다면, 우리는 절벽의 머리 위에 서 있었겠지.
그랬다면 이토록 압도적인 세븐시스터즈의 전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길이 막혀서 돌아온 샛길,
그곳이 인도한 비밀의 문 뒤로, 신이 설계해 둔 가장 완벽한 각도의 풍경이 펼쳐졌다.
사진으로는 절대 담을 수 없는 입체감과 규모.

돌아오는 길에는 숙소들과 어우러져 더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숙소들과 어우러져 더 아름다웠다.

 

백신 (The Vaccine for the Soul)

우리는 절벽이 가장 잘 보이는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마트에서 사 온 간식들을 먹으며, 멍하니 하얀 거인들을 바라보았다. 차장의 말대로 날씨는 아름다웠고 바람은 거짓말처럼 부드러웠다.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잃고 그 압도적인 풍경 속에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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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분다는 곳이지만,
그날의 바람은 5월의 봄바람 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그 곳을 빠져나오기가 다른 의미로 어려웠다.

 

드문드문 보이는 현지인 커플과 가족들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마스크도, 공포도, 사재기도 없는 세상. 마치 세상이 멸망하기 전 마지막 낙원에 온 듯한 비현실적인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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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멍하니 절벽을 바라보던 친구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이거 봤으니까 됐다."
"응?"

"이제 다시 런던 가서 갇혀 있어도...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그곳에서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그 큰 자매들의 어깨, 관광객이 아무도 없는 그 잔디밭에서, 저녁식사 요리와 설거지를 두고 달리기도 했다. 격리 생활의 답답함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그 순간만큼은 하얀 절벽 아래 파도 속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갑자기 시작된 달리기
갑자기 시작된 달리기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석양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한다.
버스는 끊기고, 정문은 닫혀있다.
하지만 그 실패 덕분에 우리는 더 완벽한 문을 열 수 있는 거라고
실패의 끝에서 신이 준비해 둔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을 만나는 거라고

 

 

 

런던은 여전히 회색빛일 것이고, 온 세계의 뉴스는 바이러스의 창궐로 떠들썩 하겠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파란 눈의 이방 섬에 갇혀있어야할지도 가늠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날 우리가 눈에 담은 그 하얀 풍경은, 그 어떤 약보다 강력한 마음의 백신이 되어 우리를 지켜줄 테니까.

 

(3부 비밀의 문 너머로 -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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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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