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은 항상 마음이 설렌다. 모든 수업이 마치고 이제 쉴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한 사회복지 공부는 쉽지가 않다. 잠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모두들 안녕. 터벅 터벅 교문앞에 이르니 누군가 나를 부른다.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그녀다.
“오빠. 이거 받아요. 집에 가서 읽어보세요.” 분홍색 편지다. 편지를 보는 순간 직감했다. 이건 러브레터다. 재수 없는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난 유치원시절부터 이런류의 편지를 받아봤다. 받아본 사람은 안다. 이건 필히 러브레터다.
집에 가서 읽어보라는 이야기에 어색한 웃음을 띄운 채 헤어졌다. 웃기는 상황이다. 같은 과에서 함께 수업을 들으며 어울려 다닌 동생이다. 단 둘이서 같이 걸어가 본 적도 없다. 그런데 편지라니. 빨리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며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자취방까지 가려면 제법 긴 시간 지하철을 타야한다. 7호선을 타고 군자역에서 다시 5호선을 갈아타야 한다. 지하철은 늘 붐볐고 자리에 앉아서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이다. 자리가 있다. 주변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환승역인 군자까지 가려면 제법 긴 시간이니 앉아서 가야 한다. 자리에 앉은 다음 분홍색 편지를 꺼내었다. 세장이다.
편지지를 꺼내어서 첫 페이지에 첫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입니다.’ 러브레터치곤 무겁다. 지하철에서 읽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집어넣어 가방에 넣었지만 내용이 궁금하기 그지없다. 다시 꺼내 읽을까 말까 생각하다 벌써 군자역이다. 군자역에서 광나루는 지척이다. 조금만 참고 집에 가서 읽자.
지하철역에 내려 자취방까지 가려면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길을 오르는데 숨이 찬다. 길이 가팔라 가슴이 뛰는 건지 편지 내용이 궁금해 가슴이 뛰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자취방에 들어서니 공기가 상쾌하다.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반지하방에서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몇 년간 있던 반지하방을 탈출해서 더 이상 꿉꿉한 곰팡이 냄새를 맡을 필요가 없다. 가방을 휙 던지고 편지를 집어 들었다.
다시금 첫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입니다.’ 그녀는 새벽마다 학교 운동장을 걸으며 함께 만날 사람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렇지 나름 난 인기있는 교회오빠였으니 떠올랐겠지 라고 재수없는 생각이 차박차박 떠오른다.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이 웃기다. 러브레터면 나를 좋아한다든지 그런 내용이 적혀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자기도 인기 많단다. 교문앞에 자기 좋아한다고 여럿 사람 줄서 있단다. 그럼에도 자기가 나에게 편지를 쓰는 건 대단히 용기있는 행동이란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첫발을 내디딘다 한다. 그래서 자기는 용기 있는 사람이란다.
마지막 내용이 더 가관이다. ‘당신을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묻고 추신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답변은 삼일 이내로 해주세요.’ 많이 기다릴 수 없으니 3일이내 답변해달라 한다.
그 자리에서 편지를 5번은 족히 읽은 것 같다. 읽으면 읽을수록 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이내 고민이 된다. 삼일이내에 답변을 달라고. 뭔가 편지에 마법을 걸은 것 같다. 그저 예전에 그런것처럼 거절하면 될 것을 말이다. 자꾸 생각난다. 이번 주말은 쉬기가 글렀다.
친구가 들어왔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반쯤 미친 행동같지만 삼일이내 결정을 하려니 조언이 필요했다. 25세 나이 여자를 한 번도 사겨 본적이 없는 모태솔로의 처절한 부르짖음이랄까.
친구가 웃는다. “박대원 안 죽었네.” 미친 소리 작렬이다. “그런 말 말고 어떻게 하면 되는데.”목소리를 높인다. 친구가 진지하게 말한다. “한번 만나봐라. 뭔가 다르다.” 뭔가 다르다는 말이 가슴에 꽂힌다. 애써 네 생각이 내 마음과 비슷하다고 설왕설래 설명하고 있는 내 자신이 웃기다.
그녀의 편지를 읽고 있으니 문득 이제까지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난 스스로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거나 먼저 발걸음을 옮긴 적이 없다. 분명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고백한 적이 없다. 필경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거절에 대한 걱정이었다. 스스로 상처받지 않으려고 괜찮은척 한거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척 했지만 난 늘 사랑에 겁쟁이였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그의 책 ‘사랑예찬’에서 사랑은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말한다. 그것은 만남과 지속성이다. 사랑의 시작은 만남이 필요하며 누군가 나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만남으로는 사랑이 시작되지 않는다 말한다. 난 사랑에 대한 만남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홀로 금요일 토요일 이틀 밤낮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읽었다. 내 평생에 편지를 이렇게 많이 읽은 적이 있던가. 껍데기만 밝은 빛으로 칠해져 있는 나의 자아를 정직함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삼일째 되는 날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에 학교에서 보자.”
저녁시간이다. 밤공기의 어색함이 학교 운동장을 휘감는다. “내 좋아하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을 그녀에게 하고 있다. 좋아하니 편지를 썼겠지. 이상한 질문에 그녀는 담담하고 친절하게 답변한다. “네 그럼요. 좋아하니 편지를 썼죠.” 그리곤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오빠 하나님은 내게 사랑과 생명이세요. 그분은 내게 먼저 다가오셨어요. 하나님이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용기를 내어보았답니다. 전 오빠와 생명을 나누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녀의 꾹꾹 눌러 담은 깊숙한 마음이 하얀 입김으로 내게 다가온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구름에 가리었던 달이 새초로이 나온다. 내 마음 같은 달빛이 그녀를 비추고 그녀의 얼굴이 비로소 보인다. 오늘밤 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에 내 마음도 밝히 드러난다. “삼일동안 나도 많이 생각했는데 우리 서로 알아가보는게 좋겠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게 처음이야. 어색할 수 있는데 한번 만나보자.”라고 이야기를 하자마자 처음 여자를 사귄다는 말은 뺄껄하고 후회되는 마음이 드는 찰나 그녀가 답한다. “네 오빠”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한발 내디딘다고 한다. 그녀가 나를 향해 먼저 한걸음을 걸었다. 그녀의 내디딘 걸음에 나도 한걸음을 내딛는다. 사랑이 시작되었다.
댓글 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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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니신나
오~ 앞으로의 이야기가 무척 기대되네요.^^ 설레는 첫사랑, 뭔가 다른 분의 다가옴... 다음 주를 고대하겠습니다~^♡^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감사합니다. 저도 쓰니신나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일주일에 한개씩 읽는 기다림과 두근거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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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실🌱
역시나 다시 읽어도 설렙니다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푸실님은 저의 힘이예요. 항상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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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산소통
다음 이야기 너무 궁금해지는 글이에요. 두근두근 하네요.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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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피어
풋풋하지만 유치하지 않은 흥미진진한 진진님의 글에 마음이 몽글 몽글 따뜻해집니다. 없던 사랑의 기억들이 마구 꿈틀댑니다. 그 사랑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지 너무 기대가 되는 좋은 글이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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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
먼저 다가온 만남을 통해 먼저 다가서는 만남을 경험하셨군요! 다음편을 설레며 기대해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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