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암에 걸렸다. 그녀의 암이 난소암으로 확인된 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수술이 진행되었다. 1차 수술이 끝나고 간절히 기도한 내용은 암이 재발 되지 말고 전이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세상은 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암은 재발되었고 하나 남아있는 난소로 전이되었다. 그녀는 2차수술을 해야 했다. 2차 수술 뒤에 그녀는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아니 항암치료를 할 수 있는 체력도 없었다. 의사선생님은 백혈구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아무런 치료를 할 수 없다 말했다. 의사는 얼마를 살지 모르니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한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나를 학교 앞에 있는 카페로 불렀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아직도 그 카페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손가락에 있던 커플링을 빼서 내 앞에 둔다. 그리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빠 이제 우리 헤어져요.”
내 눈앞에 놓여 있는 커플반지를 보고 있으니 눈물이 솟구쳐 나온다. 벌건 대낮에 카페에 사람들의 시선 따윈 상관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반지를 쳐다보며 그녀에게 다시 되물었다.
“우리가 헤어져야 할 분명한 이유 세 가지를 말하면 헤어질 수 있겠다.”
그녀는 이미 준비된 마음인지 담담하게 뱉는다. “첫 번째는 전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래서 헤어져야 해요. 두 번째는 살더라도 전 평생 약을 먹어야 해요. 그래서 헤어져야 해요. 마지막은 전 더 이상 오빠의 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린 헤어져야 해요.”
세 가지의 이유를 다 듣고 나니 헤어질만한 이유가 되는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직 죽지 않았고 약은 건강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고 내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헤어짐의 이유는 안 된다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그녀는 나의 생각이 그렇다면 결혼을 하든지 헤어지던지 결단해주라 한다. 자기를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오빠를 사랑하지만 사랑하기에 이제 그만 해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께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울고 울어도 이 상황은 해결되진 않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정의가 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설레는 감정을 사랑이라 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고귀한 가치라 말하기도 한다. 사랑이 어떤 정의와 의미를 가지고 있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랑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는 거다. 그 사랑이 짝사랑이든 어떤 모양의 사랑이던지 사랑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
사랑은 대상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사랑에 대한 답을 찾기 원한다. 나도 동일하게 사랑에 답을 찾기 원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그녀와 헤어져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결혼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물음 앞에 하나님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매일 모든 어두움 내린 시간, 홀로 하늘을 쳐다보면 부르짖었다. 기도가 끝나면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쳤다. 성경을 펼치면 내게 짠하고 이렇게 해라라고 답이 나오길 바랐다.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 않는 어린 치기 같은 행동이었지만 그땐 그렇게 간절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도 주어지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 본들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어떤 친구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었다. “넌 결혼을 할 수 없는 환경이다. 어느 누구도 너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없어. 그러니 그녀를 놓아주고 넌 새로운 삶을 사는 게 좋겠다.” 그렇게 말해주었다. 친구의 조언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진다면 더 이상 누구와도 사랑하지 못할꺼란 생각이 들었다. 난 이미 내 사랑의 총량 그 이상의 감정과 마음을 그녀에게 쏟아 부었다. 이런 사랑의 마음과 노력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을까란 그건 불가능하다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였다.
나는 다가올 일들을 걱정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걱정이 아니라 좀 더 완벽함을 요구했다. 그녀가 죽지 않는 완벽함, 그녀가 약을 먹어도 괜찮을 완벽함, 그녀가 지금의 상황에서도 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완벽함을 원했다. 그 완벽함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에게 완벽함이 사랑을 가로막았다면 그녀는 미안함이 사랑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수술 후에 늘 내게 하던 소리가 있다.
“미안해요.”
그녀만 내게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족도 내게 미안해했다. 미안함이란 큰 벽은 그녀와 나와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장애물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벽과 같았다.
완벽함과 미안함이 모든 것을 가로막았다.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할 꽉 막힌 도로가운데 방황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의 앞에 어떤 길과 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의 마음을 간직한 채 계속 걸어간다면 그것자체로 괜찮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완벽함과 미안함이 아닌 서로를 받아내며 함께 걸어가는 여정 그 자체를 말이다. 그러고 몇 달 뒤 난 그녀에게 프러포즈했다. 나와 함께 길을 걷자고. 우리의 여정의 종착역이 보이지 않고 어딘지는 모르지만 함께 하자고 말이다. 그렇게 우린 21년째 계속 함께 걸어가고 있다.
사랑은 완벽함으로 다가서지 않고 부족함을 인정하고 품는 것이 아닐까! 아내와 난 함께 걸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종착역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한 세 가지 이유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내는 아직 죽진 않았지만 언젠가 끝을 만나게 될꺼다. 아내는 지금도 여전히 약을 먹고 있고 내 아이를 낳지도 않았다. 완벽하지 않는 상황에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지난 20년간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품어온 것이리라. 완전하지 않음이 사랑에 방해가 되진 않았다는 것을 세월로 증명해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에 온전하고 완전한 도착점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부지런히 함께 걸어갈 뿐이다.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함께 걸어간다면 이게 사랑이다 생각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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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
헤어짐을 요구하며 헤어짐이 오기를 기다리는 제게 이 글이 눈물로 다가옵니다. 사랑이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해답이 짠 하고 나타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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