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컨대, 내 생각이 명확한 표현을 찾게 해주소서.' 단테 신곡 천국 편 24곡에 있는 문장이다. 책상 위,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나도 간절히 바랐었다. 얽히고설킨 생각을 또렷하고 적절한 단어와 문장으로 가지런히 표현할 길은 없을까? 하고 말이다.
마음속 말을 다 쓸 수 없어 답답한 고구마를 먹던 날들에 고해본다. 나는 이제부터 마음의 빗장을 열 텐데 부디 질서 있게 나와다오! 어떤 재료로도 맛있게 우아하게 요리를 내올 테니 기다려 주겠니? 적어도 목이 메는 고구마보다야 더 요리 다운 요리를 약속하지. 요리에 대한 값은 시간과 열정과 성실로 대신하고 마침내 가장 좋은 값을 지불해 주길 바란다.
글 쓰는 마음에 빗장이 풀리고 그 모든 말들이 질서 없이 마구 쏟아져 나오지 않게 잘 정리 정돈해주고 싶었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주제 하나를 정하지 못하고 각각의 주제의 아이디어들이 여러 개 떠올라 일단 적어둔다. 그러다 큰 수확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처음에 떠오른 몇 개의 글감들은 결국 임시 보관소에 다시 저장된다. 그러다 '됐다'라고 생각한 그 주제는 끝도 모르고 서술되어 많은 시간이 흐른다.
근사한 요리가 목적이면 그 목적에 맞는 요리가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과 열정을 할애해야만 한다. 매일 대어를 낚으면 좋겠지만 힘을 빼는 글쓰기를 훈련 중인 요즘은, 어쩌다 한 번으로 족하기로 했다. 그래도 열정은 버리지 않기로 한다.
미술에서 재능은 타고난 감각, 창의력, 꾸준한 연습이 모두 합해 드러나지만, 가장 큰 재능은 '그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한동안 그림 협업 하면서 아파서 너무 힘든데도, 그리고 싶은 마음 하나로 마감을 지켰다. 덧붙이면 마감이 명작을 낳는다는 말에도 동의가 됐다. 거창한 명작이 아니어도 열정과 시간의 압박, 이 두 박자만 맞는다면 적어도 스스로 만족 되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글쓰기도 예술의 영역이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글쓰기 동력은 '마음속 말을 질서 있게 꺼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그 또한 체력의 한계와 지병으로 인해 쉽게 약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글쓰기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의 동력은 나 스스로 만족한 글을 쓰는 것에 맞추어졌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정량으로 유지되지 않고 변동성이 매우 크다. 거기 맞추다 보면 어느 날은 잠을 못 자고 어느 날은 너무 무리해서 아프기도 하는 것이다. 무리한 상태로 가져가는 글쓰기는 후에 내가 글을 지속적으로 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쓰디쓴 교훈을 명심한다.
글 쓰면서 삶의 패턴에도 깨달은 바가 있다. 에너지의 그래프가 있다면 내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너무 모든 일에 100을 쏟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삶의 패턴이 매번 치열하게 빡빡하게 흘러가는 이유가 그것이다. 나머지 일에 대한 배분이 없다. 모든 것에 열심히 사는 것이 삶을 균형 있게 사는 것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선택과 집중은 이럴 때 정말 필요한 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심지어 의사는 오래된 배터리라는 표현을 하셨다. 오래된 배터리는 충전을 해도 쉽게 소진되기 때문에 배터리 성능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운동으로 체력을 키우라는 말이다.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이 바둑을 배울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 심중에 남는 말이 있다.
아무리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있어도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 쓰고 싶다는 말은 허공에 울리는 공허한 말이 된다. 알면서도 최소한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이 마음처럼 쉽지 않아 소원해질 때면, 느리게 굴러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스쿼트 자세를 취한다. 그런 후에야 글쓰기 아이디어들을 간단히 정리한다. 매일 같은 시간, 글을 쓴다. 안 써지는 날도 많다는 것을 상기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버퍼를 늘 남겨둔다. 열정은 버리지 않되, 모든 열정을 쏟아붓지 않는다. 이것으로 나의 글쓰기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글 쓸 동기도 확실하고 글 쓸 몸도 만들었다면 이젠 글을 쓰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글은 이상하게 단어와 문장의 표현에만 꽂혔다. 진심과 멀어진 나 아닌 생소한 글이 툭! 던져져서 당황스러웠다. 뭘 놓친 걸까?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글을 대하며, ‘머리도 가슴도 아닌 온몸으로 써야 한다’는 말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덕무의 ‘문장의 온도’ 중 한 문장을 읽고 마음이 쑤욱 내려앉았다. ‘머리로만 글을 쓰는 사람은 애써 꾸미거나 자꾸 다듬으려고 한다.’ 글 쓸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나는 머리로만 열심히 글을 썼나 보다. 이 문장으로 나의 글이 간파당했다.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내 삶과 동떨어진 꾸며진 글은 내가 아니다. 온몸으로 얻어낸 경험과 통찰에 의한 글이야말로 쓰는 이도 읽는 이도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것이야말로 온몸으로 쓰는 글쓰기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초석임을 어렴풋이 알 듯하다.
글을 읽을 때, 문체와 세부적 문장 속에 드러난 가치들을 가늠하며 작가를 떠올린다. 그가 생각하는 가치, 그가 살아온 날들과 하나 된 경험이 모여 곧 그 사람을 표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의 삶 전체를 엿볼 수 있다. 몸으로 살아내지 않은 것은 생생하게 글로 표현될 수 없다. 동그라미 모양으로 살아온 작가, 네모 모양으로 살아온 작가, 어떤 형태로든 글로써 작가를 말한다. 그 사람이 말하는 글에 반해, 작가가 궁금해지고 처음 글을 사랑하게 되었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들의 글이 좋았던 건, 온몸으로 체득된 삶을 글로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이 참 좋다고 느끼는 지점, 작가가 궁금해지고 반하게 되는 시점이 참 매력 있다. 나 아닌 생소한 글이 아니라, 글이 곧 나라고 말해주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비로소, 온몸으로 쓰는 글을 꿈꾼다.
저자소개
필명: 인사피어(INSIGHT+INSPIRE)
_통찰로 격려하는 삶이 꿈이다
sns그림 작가, 종이 공예와 예쁜 글씨 쓰는 사람. 피아노 반주 봉사하는 사람. 천상 예술인 이지만 글쓰기 공동체 '쓰고뱉다'를 만나면서 내 안에 끝 모를 진지함과 은근한 다정함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궁금해지고 나를 알게 될수록 점점 시선은 타인에게로 향했다. 나의 얘기로도 타인과 닿을 수 있다는 글쓰기는 이제 숙명과도 같은 만남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존재의 이유가 설명되고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날을 꿈꾸며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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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산소통
인사피어님께 입덕한 것 같아요. 어쩜 (감히) 제 고민을 이렇게 세심하게 풀어주셨나요. 인사피어님 글에서 인사피어님을 발견하고 반해버렸다고 고백해 봅니다. (그림까지 그리시는 줄 몰랐어요).
인사피어
반려산소통님! 저 오늘, 잠 못 이룰 것 같아요! 이런 공감과 창찬을 받다니요!!!(ಥ﹏ಥ) 어쩌면 제가 너무 듣도 싶은 말이었나봐요(ღ◕ܫ◕ღ) 덕분에 저, 오늘 힘내서 걸어갈게요! 그리고 다음 글도 반려산소통님으로 인해 쓸 힘을 얻어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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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다리
글 너무좋아용^^백일 쓰기 진행 중인 제 상황을너무 잘 표현해 주셨어요
인사피어
그 일을 정말 시작 하셨군요!(ღ◕ܫ◕ღ) 정말 존경스럽습니다ლ(╹◡╹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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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니신나
글이 곧 나인 글. 정말 멋진 소망입니다. 이리 저리 재기 바쁜 세상 속에서 존재 자체를 드러낸 진실된 글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피어
쓰니 선배님의 주옥같은 코멘트에 마음이 마구 요동칩니다. 늘 쓰니선배님이 글이 곧 나인 글을 써주셔서 감탄하며 꿈을 키우기도 했어요. 쓰.뱉을 만나 글로서 저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요즘에 힘이 되는 말씀, 너무 감사해요!! 무더위에 건강히 사역 감당 하시길 응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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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
작년에 250여 개의 글을 쓰고 나서 완전히 지쳐 쓰러진 저를 발견했어요. 그만큼 힘든 삶을 통과 중이기도 하지만 체력에 대해, 쓰는 방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인사피어
와!!! 250여개의 글을 쓰시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인걸요!!!? 글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수 있다지요? 체력과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하셨다니 천천히 가더라도 세빌님만의 글을 종종 보고 싶네요.Ꮚ❛ꈊ❛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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