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생 K장녀의 힘 빼기 연습

나를 안녕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 관계 재정립하기

[87년생 K장녀의 힘 빼기 연습] by 따티제

2024.02.07 | 조회 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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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당신의 존재의 온도를 딱 1도 높여주는 그런 글 한잔이 되길 바라며 -

Image by andreas160578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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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늘 나눠준다. 집에 손님들이 들렀다 갈 때면 꼭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다. 특별히 나눌 게 없어도 잘 익은 김장 김치 한 그릇이든 쟁여 놓은 고구마 몇 개든 작은 마음을 함께 들려 보낸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서인지 어느 순간 나도 똑같이 그러고 있었다.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이 돌아갈 때, 왠지 빈손으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때마저 빈손으로 가면 실례인 것 같은 강박이 들 때도 많다.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사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밌기도 하다. 상대방의 입담과는 상관없다. 호기심 천국에 질문 봇이라 지루할 틈이 없다. 상대방에게 던질 질문이 없어져도 내 이야기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곤 한다. 먼저 물어오지 않으면.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랄까. 물심양면으로 넉넉한 사람이 되려 했다. 선입견을 품고 사람을 대하지도 않았다. 내가 직접 그 사람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슬프게도 다른 사람의 귀띔이 맞아떨어지는 경우들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거친 가시가 있더라도 다 그의 상처 때문인 거라고 그 가시를 나의 맨살로 덮어내려 했다.

   나의 속사정을 알면서도 자신의 힘듦만 털어놓던 친구와의 통화가 기억난다. 나는 안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잠시 나의 안부를 묻는가 싶더니 자기 이야기만 수십 분을 털어놓았다. 도리어 그 통화로 나는 안녕하지 못해졌다. 자기 의견만 끝끝내 고집하는 사람, 모든 대화의 끝을 삶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 내가 계산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 생각하기 시작하니 안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류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모두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에는 모든 만남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는 나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큰 몫을 했다. 하지만 모두를 받아주고 싶다는 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는 때가 찾아왔다. 아무것도 줄 수 없이 메마른 때가 찾아왔다. 아니, 줄 것은 고사하고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도리어 내가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때도 찾아왔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따랐던 어른이 있었다. 그는 나의 진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멘토였다. 당연히 나는 늘 진심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는 어떠한 목적만을 가지고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이를 알아채고 난 뒤에도 나는 몇 번을 참고 참았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ㅡ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다음번 연락하실 땐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저를 만나고 싶어서, 저와의 관계를 위해서 연락하셨으면 좋겠어요.

ㅡ아, 그랬구나. 알겠어. 앞으로 그러자~

그는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완곡하게 거절하고 피하며 껍데기뿐인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진심이었던 만큼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도 그날의 통화가 뚜렷이 기억난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내 모습도, 이게 잘하는 일일까 쿵쾅대던 심장박동도, 웃으며 전화를 끊던 그 사람의 목소리도. 하지만 나는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최근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 계기는 퇴사 후 유산을 겪으면서였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다. 누구에게도 굳이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나를 안녕하지 못하게 할 관계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피했다. 나부터 살아야 했다. 자연히 나를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고요해졌다, 드디어.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는데도 내가 생각나서 연락했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안부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눈물을 머금고 있던 침대 머리맡에서 전화벨이 울렸고 밥 한술 넘기기 싫어 늘어져 있던 날 카톡이 울렸다. 우리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된 것 같았다. 그들은 나에게 무엇 하나 바라지 않았다. 아니, 내가 괜찮기만을 바랐다. 내 곁에서 그저 묵묵히 함께 울어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만남에 이유가 있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 그 모든 만남에 내가 무조건 착한 사람 역할을 맡을 필요는 없다. 지금 이 관계가 불편하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 나 지금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우리 이제 부정적인 이야기 그만하면 안 될까 하고 끊어내는 사람, 오늘은 내가 여유가 없으니 더치페이하자고, 아니면 다음에 만나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어쩌면 나를 안녕하지 못하게 하는 이들의 삶 속에는 그런 역할을 해 줄 이가 없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빨래 후 건조기에서 막 꺼내 까슬까슬하니 기분 좋은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는다. 두꺼운 스포츠 양말을 발목까지 올려 신는다. 텀블러에 찰랑찰랑 물을 담아 공원으로 나선다. 차갑지만 살을 에지는 않는 아직은 기분 좋은 바람. 뛰기 딱 좋은 온도. 걸음이 빨라진다. 심박수가 높아진다. 서서히 맺히기 시작하는 땀과 함께 오늘의 체증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다.

Image by Tumisu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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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필명 따티제. 풀어서 말하면 따뜻한 인티제(MBTI 성향 중 INTJ의 별칭). 서울 올림픽 기억 안나는 87년생. 흔한 K장녀. 혼자 다 해야 하는 작은 외국계 기업 1인 마케터로 본능을 거스르고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강제장착. 아무거나 안 하는 고집쟁이 프리랜서 도전 중. 밥먹듯이 밤새는 수학강사의 아내. 쓰고뱉다 21기(대한민국 No.1 글쓰기 강좌)에서 글 배우는 중. 정리되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 속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듯, 읽으면서 시원해지는 글을 쓰려는 중. 오후 늦게 일을 시작한 포도원 일꾼들에게도 일찍 일을 시작한 이들에게와 같은 품삯을 주는 사회적기업 대표가 되는 꿈 꾸는 중.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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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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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피어

    0
    7 months 전

    따티제님의 모든 문장마다 공감이 되어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저 또한 k장녀로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다보니 그런것도 같아요! 따티제님 글엔 뭐랄까, 따뜻한데 명확하고 똑소리가 나서 너무 시원하고요, 늘 넘치지 않는 뭉클함 한 스푼 들어 있다고 해야할까요? 글 읽을때마다 대화하고 싶어집니다. 글의 힘이 참 크구나!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에 겪하게 동의하게 됩니다. 관계뿐아니라 모든 삶, 늘 응원드립니다.

    ㄴ 답글 (1)
  • yunL

    0
    7 months 전

    목적없이 안부를 전할 수 있는 만남이 삶의 위로됨을 글을 통해 다시 한번 느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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